제임스 힐먼 James Hillman의 주저 중 『Re-Visioning Psychology』(Harper & Row, 1975)의 서문을 번역해 올린다. 그의 학문적 약력과 소개는 이전에 올린 <영혼은 고통을 통해 본다>를 참조하면 되겠다.
이 저서의 제목을 직역하자면 "심리학 다시 보기/재구상(再構想)"이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인간 마음에 대한 탐구는 심리학이라는 분과 학문과 자연 과학 너머를 향한다는 점, 즉 융Jung의 심층 심리학을 기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성학", "영혼의 정신학" 정도로 의역할 수 있겠다.
이번에 번역한 <서문>의 내용을 간략히 개관해본다.
이 글에서 제임스 힐먼은 영혼psychē의 관점에서 심리학을 다시 구성하려는 시도를 '영혼-만들기soul-making'로 부른다. 심리학의 영역 안에서 영혼의 자리를 마련하고 그 작업을 수행할 개념적 도구들을 세우는 요구를 동반한다.
그에게서 영혼이란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관점·중개·반성적 공간'이다. 이는, 사건을 경험으로 전환시키는 심층적 작용, 죽음과 의미의 관계, 상상·이미지·환상을 통한 인식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핵심으로 한다. 여기에서 환상fantasy은 기억·지각의 잔여물로서가 아니라 인간 심리의 원형적 이미지이며, 심리학의 기본 기반은 이러한 상상적 삶이다. 이 때문에 그가 말한 원형archetype은 이미지적 방식으로만 접근 가능하며, 심리의 가장 깊은 패턴과 관점을 형성하는 뿌리로 이해된다. 원형은 인간 경험들을 하나의 별자리처럼 묶어 의미를 부여한다.
인간 정신이 그 다면성과 관점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원형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다신론적polytheistic이며, 우리가 말한 '통일성'이란 결국 수많은 원형들 중 하나일 뿐이다. 흔히 '단일한' 자아라고 일컬어지는 이러한 통일성은 일신론적 통합을 이상화하는 기존 심리학에서 보듯이 영혼이 지닌 실제적 다양성을 억압한다.
따라서 영혼의 심리학은 기존 심리학적 접근과 달리 깊고 강렬한 경험을 아우른다. 그러한 점에서 영혼 심리학은 깊이와 강도depth and intensity를 지향하며, 모든 심리학이란 결국 심층 심리학으로 본다.
영혼 심리학에서 '치료/치유'란 임상 장면에 국한되지 않고, 각 개인이 자신의 콤플렉스와 증상을 성찰하는 모든 과정에서 일어난다.
이 책은 신화학, 정신의학, 철학, 인문학을 넘나들며 전통적 경계를 해체한다. 영혼은 끝없이 깊기 때문에 이해는 단선적 결론이 아니라 반복·변주·투쟁의 사유를 필요로 한다. 이 작업 전체는 “진지함 속의 유희serio ludere”라는 태도 아래, 영혼이 요청하는 질문들에 상상력으로 응답하려는 시도이다.
오늘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선택한 길을 묵묵히 걸어가겠습니다.
<서문>
. . . man is but a paltry thing,
A tattered coat upon a stick, unless
Soul clap its hands and sing, and louder sing
For every tatter in its mortal dress,
Nor is there singing school but studying Monuments of its own magnificence . . .
yeats, “Sailing to Byzantium”“
… 인간은 보잘것없는 존재paltry thing일 뿐,
영혼이 손뼉을 치며 노래하고soul clap its hands and sing,
그 죽을 몸의 누더기 하나하나를 위해
더 큰 소리로 노래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노래의 학교도 없다.
영혼 자신의 장엄함의 기념비들을Monuments of its own magnificence
배우는 것 말고는 …
— 예이츠, 〈비잔티움으로 항해하며Sailing to Byzantium〉
이 책은 '영혼-만들기soul-making'에 관한 것이다. 곧 ‘영혼의 심리학psychology of soul’을 시도하며, 심리학을 영혼의 관점에서 다시 구성하려는 논문적 시도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책은 고전적이면서도 급진적으로 새로운데, 이는 영혼에 대한 고전적 관념을 참조하면서도 오늘날의 심리학이 아직 사유해보지 않은 영역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영혼은 심리학만으로 이해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 제시되는 관점은 통상적인 의미의 심리학을 넘어 역사·철학·종교의 영역까지 확장된다. 이 책이 새로운 형태의 심리적 사유와 감정의 방식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에도, 그 뿌리는 여전히 우리의 심리학적 문화의 중심부에 놓여 있다. 즉, 고대 그리스로부터 르네상스와 낭만주의, 그리고 프로이트와 융에 이르는 서구 전통 속에서 축적된 통찰에 의해 지속적으로 영양분을 공급받고 있다.
영혼-만들기라는 용어는 낭만주의 시인들에게서 기원한다. 이 관념은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Vala, or The Four Zoas』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그 표현을 명확히 한 사람은 존 키츠John Keats였다. 그는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계를, 원한다면, ‘영혼-만들기의 골짜기the vale of Soul-making’라고 불러라. 그러면 세계의 쓰임새를 알게 될 것이다”라고 썼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의 여정은 영혼을 만들기 위해 세계의 골짜기를 방랑하는wandering 과정이 된다. 우리의 삶은 본질적으로 심리적이며, 삶의 목적은 삶을 영혼psychē으로 만드는 것, 즉 삶과 영혼 사이의 연결을 찾아내는 데 있다.
영혼-만들기라는 개념은 낭만주의 시인이 아니라 치료에 전념하는 심리학자 therapeutic psychologist가 사용할 때에는 더 엄밀한 규정이 요구된다. 영혼을 불러내고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리학의 과제는 자신의 학문적 장(場) 안에서 영혼을 위한 길을 제시하고, 영혼이 자리할 위치를 마련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인 심리학적 개념들이 필요하다. 이어지는 네 개의 장(章)은 영혼-만들기 과정에 요구되는 네 가지 개념을 제시하려는 시도다.
나는 이 장들의 초고를 집필하던 당시—그 원고는 1972년 예일대학교에서 열린 Dwight Harrington Terry 강연으로 발표되었다—책상 앞 벽에 스페인 철학자이자 심리학적 에세이스트인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set의 다음 문장을 붙여두고 있었다.
“왜 글을 쓰는가? 만일 종이 위에서 펜을 미끄러뜨리는 이 너무나 쉬운 행위가 일정한 투우鬪牛의 위험bull-fighting risk을 부여받지 못하고, 우리가 민첩하며 양쪽에 뿔을 가진 위험한 주제들에 접근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 두 개의 뿔을 가진 주제들 가운데 첫 번째는 바로 영혼이다. 이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서술하며, 과연 어떻게 글로 쓸 수 있는가? 일반적인 심리학 저작들은 이러한 과제를 회피함으로써 스스로를 위험으로부터 구해낸다. 그러나 “영혼soul”은 내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주제이므로, 우선 몇 가지 경계의 표지를 세워둘 필요가 있다.
내가 영혼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무엇보다도 실체substance가 아니라 관점perspective을 뜻한다. 곧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을 향한 하나의 시각 viewpoint을 말한다. 이 관점은 반성적이며, 사건들을 매개하고, 우리 자신과 우리가 겪는 모든 일 사이에 차이를 만든다. 우리와 사건들, 행위자와 행위 사이에는 반성적 순간reflective moment이 존재하며, 영혼-만들기란 바로 이 중간 지대를 변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식은 마치 스스로를 지탱하며 상상하는 어떤 기질substrate—내적 장소, 더 깊은 인격, 지속되는 존재ongoing presence—위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기초는 우리의 주관성subjectivity, 자아, 의식이 모두 일시적으로 가려질 때에도 여전히 그저 ‘거기에there ’ 존재한다. 영혼은 우리가 몰입한 사건들과는 독립된 하나의 요소로 나타난다. 나는 영혼을 다른 무엇과 동일시할 수 없지만, 동시에 영혼을 다른 모든 것과 분리된 채로 붙잡을 수도 없다. 아마도 그것은 흐르는 거울 flowing mirror 속의 반사물 reflection처럼, 혹은 빌려온 빛만을 매개하는 달 borrowed light처럼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 기묘하고 역설적인 중개 변수 intervening variable때문에 우리는 ‘영혼을 가진다’ 혹은 ‘영혼이다’라는 감각을 갖게 된다. 영혼은 비물질적이고 정의 불가능할지라도, 인간 가치의 위계에서 가장 높은 중요성을 지니며, 종종 생명의 원리, 심지어 신성 divinity의 원리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영혼 개념에 대한 또 다른 시도에서 나는 영혼이라는 말이 의미를 가능하게 하고, 사건을 경험으로 전환하며, 사랑 속에서 전달되고, 종교적 관심으로 나타나는 어떤 ‘알 수 없는 구성요소unknown component ’를 가리킨다고 제안한 바 있다.
이러한 네 가지 규정은 이미 수년 전에 제시한 것으로, 그동안 나는 이 용어를 그리스어 psychē, 라틴어 anima와 거의 구별 없이 사용해왔다. 이제 나는 여기에 세 가지 필수적 수정 사항을 덧붙이고자 한다. 첫째, "영혼"은 사건을 경험으로 심화시키는 작용deepening을 가리킨다. 둘째, 사랑이든 종교적 관심이든 영혼이 가능하게 하는 의미는 죽음과의 특수한 관계로부터 나온다. 셋째, 내가 "영혼"이라고 부를 때 이는 성찰적 사유, 꿈, 이미지, 환상을 통해 경험하는 우리 본성 안의 상상적 가능성, 곧 모든 실재를 우선적으로 상징적·은유적 방식으로 인식하는recognizes 태도를 뜻한다.
영혼에 대한 더 구체적인 함의들은 이어지는 장들에서 드러날 것이다. 독자는 이 책 전체를 영혼이라는 관념과의 오랜동안의 조우(遭遇)prolonged encounter, 그리고 나의 쓰기와 당신의 읽기를 통해 영혼을 발견하고 다시 살아나게 하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첫 번째 ‘두 개의 뿔을 가진’ 주제는 두 번째이자 그에 못지않게 어려운 주제를 불러온다. 환상fantasy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나는 융C. G. Jung 매우 가까이 따른다. 융은 우리의 공상과 몽상, 그리고 의식의 모든 순간 속에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환상 이미지들을 심리의 일차적 자료로 보았다. 우리가 알고 느끼는 모든 것, 우리가 말하는 모든 진술은 환상에 기반하며, 다시 말해 심리적 이미지psychic images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기억의 파편flotsam of memory이나 지각의 재생reproduction of perceptions, 혹은 삶의 입력값을 뒤섞은 잔여물rearranged leftovers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융을 따라, 환상-이미지 fantasy-image라는 말을 시적 의미에서 사용한다. 다시 말해, 이미지를 심리적 삶에 근본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basic givens 간주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자기 발생적이며 self- originating, 창안적이고, 자발적이며, 완결되어 있고, 원형적 패턴 archetypal patterns속에서 조직된 존재들이다. 환상-이미지는 심리의 원재료이자 완성품이며, 영혼을 아는 데 접근할 수 있는 특권적 방식이다. 이것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없다. 우리의 마음속 모든 개념, 세계에 대한 모든 지각,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각은 어떤 형태로든 심리적 조직화psychic organization를 거쳐야 비로소 ‘발생 happen’ 수 있다. 모든 감정과 관찰 observation은, 먼저 하나의 환상-이미지를 형성함으로써 심리적 사건으로 발생한다.
여기서 나는 이미지의 심리학 psychology of image을 기반으로 하는 영혼의 심리학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나는 마음의 시적 기반 poetic basis of mind을 상정하며, 심리학이 뇌의 생리학, 언어의 구조, 사회 조직, 혹은 행동 분석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imagination의 과정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제안하고자 한다.
융을 출발점으로 불러내는 것은, 원형 심리학archetypal psychology이 그에게 빚지고 있는 근본적 부채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는 프로이트, 딜타이Dilthey, 콜리지Coleridge, 셸링Schelling, 비코 Vico, 피치노Ficino, 플로티노스 Plotinus, 플라톤을 거쳐 헤라클레이토스까지 이어지는 긴 계보의 직계 조상이며, 아직 추적되지 않은 더 많은 가지가 존재한다. 이 사유의 계보에서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는 뿌리 가까이에 놓여 있다. 그는 영혼psychē을 원형적 제일 원리로 사유했고, 영혼을 끊임없는 유동flux 의 관점에서 상상했으며, 측량 불가능한 깊이를 지닌 것으로 말했다.
‘심층 심리학Depth psychology’은 심리의 무의식적 층위, 즉 영혼의 더 깊은 의미에 관심을 두는 현대의 한 분야이지만, 그 용어 자체는 결코 현대적인 것이 아니다. “심층(깊이depth)”라는 말은 고대 최초의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을 울림처럼 반향하며 그 의미를 되불러온다. 사실 모든 심층 심리학은 다음의 헤라클레이토스 단편 한 구절에 이미 요약되어 있다.
“네가 모든 길을 다 여행한다 해도 영혼psychē의 한계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로고스logos의 깊이bathun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영혼과 깊이soul and depth를 하나의 공식 속에 결합시킨 이래, 영혼의 차원은 넓이나 높이가 아니라 깊이이며, 영혼의 여정 또한 위로가 아니라 '아래로의 하강downward'이다.
융의 저작과 그의 삶은 상상력의 심리학 imaginative psychology의 거대한 전통에 속한다. 융이 이 심리학의 계보로 들어가는 하나의 통로를 제공한다면, 이 책은 융에게 접근하는 통로이자—특히 그의 신학으로부터—융을 벗어나는 통로를 제공한다. 한 사상가에게 전적으로 머무른다는 것은 곧 ‘융 학파’가 된다는 뜻인데, 융 자신이 말했듯이 그런 일은 오직 융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영혼-만들기에 본질적인 것은 심리학-만들기psychology-making이며,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서 발생하는 영혼의 요구를 개념과 이미지의 형태로 구성해 내는 작업을 의미한다.
나의 영혼, 즉 나의 심리적 구성 psychological constitution은 프로이트나 융의 그것과 다르기에, 내가 만들어낼 심리학 역시 그들과 동일할 수 없다. 각 심리학은 일종의 고백 confession이며, 어떤 심리학이 다른 사람에게 가치를 지니는 지점은 그가 자신의 욕구와 동일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심리학이 그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심리학을 응답으로써 구성하도록 자극하는 지점에 있다. 프로이트와 융이 심리학의 대가인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따라 ‘프로이트주의자’나 ‘융 학파’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처럼 심리학적이 되기 becoming psychological 위해서다. 여기서 심리학은 정신의 필수적 활동activity of the psyche으로 이해되는데, 그 활동은 경험을 더 깊고 강렬하게 만들기 위해 스스로 그릇을 만들고 깨뜨리는 과정을 수행한다.
'깊이와 강도depth and intensity'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이 책의 또 다른 기본 관점을 함의한다. 나는 모든 심리학을 심층 심리학으로 본다. 일반적으로 심층 심리학,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심리학therapeutic psychology은 학문 영역에서 주변부에 머문다. 학문적 밑 바닥의 땅은 bottom land는 사회심리학자, 행동주의자, 발달심리학자들이 점유하고 있다.
그러나 영혼에서 출발하는 순간, 심리학은 즉시 심층으로 들어가며 치료적 함의를 갖게 된다.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이 관찰, 이 연구는 영혼을 위해 무엇을 함의하는가?” 영혼과의 연결이 있는 곳에서 심리학이 성립하며, 그렇지 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통계학, 생물인류학physical anthropology, 문화 저널리즘, 혹은 동물의 사육animal breeding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하다.
‘치료/치유 Therapy’라는 말은 병의 고통과 그것을 낫기 위해 겪어야 하는 모든 과정을 떠올리게 하는 무거운 단어이다. 그러나 이 책이 말하는 치료/치유는 각 개인의 증상적 특수성과 그가 지닌 콤플렉스에 대한 자각 속으로—그리고 그 너머로right through—직접 들어간다. 치료, 즉 분석은 분석가가 환자에게 수행하는 특정한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간헐적으로 수행하는 개인 영혼-탐색individual soul-searching, 자신의 콤플렉스를 이해하려는 시도, 그리고 스스로에게 가하는 비판·처방·격려의 과정 속에서 지속되는 것이다. 우리가 영혼-만들기에 관여하고 있는 한, 우리는 언제나 치료/치유 안에 있다We are all in therapy all the time. 여기에서의 핵심 생각은 이렇다. 우리가 모두 심리적으로 환자라면, 동시에 우리 모두는 심리의 치료자이기도 하다 if we are each and every one a psychological patient, we are also each and every one a psychotherapist. 분석은 임상 장면에서만이 아니라 영혼의 상상력 속에서도 이루어진다. 앞으로의 내용을 따라갈 때, 바로 이러한 내적 의미의 치료internal sense of therapy를 염두에 두어 주기 바란다.
우리가 도입해야 할 또 하나의 단어는 ‘원형archetype’이다. 원형이 무엇인지 설명하기가 유난히 어렵다는 사실은, 그 개념 자체의 고유한 특성을 암시한다. 즉 원형은 사물이라기보다는 비유에 가까운 경향을 지닌다. 우리는 원형이 문자 그대로 무엇인지를 말하기보다는, 그것을 이미지로 서술하는describe them in images 방식으로 기울어진다. 원형은 손으로 만질 수도, 가리킬 수도 없고, 단지 우리는 그것이 ‘무엇과 같은지’로 말하게 된다. 원형은 우리를 상상적 담론의 방식으로 이끈다. 실제로 고대의 원형 개념을 현대 심리학에 다시 도입한 융은 바로 이러한 비유적 성격에 주목하며, 원형이 정의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심리학에서 원형적 관점을 취한다는 것은 영혼의 기본적 성질과 구조를 상상적 방식imaginative way으로 그려내는 것이며, 심리학의 기본 질문들에 접근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도 상상력에 의존하는 길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원형을 정신 작용psychic functioning의 가장 깊은 패턴, 즉 우리가 자기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규정하는 영혼의 뿌리roots of the soul 로 상상해 보자. 원형은 정신적 삶과 그에 대한 이론이 끊임없이 되돌아가는 공리적axiomatic이고 자명한self-evident 이미지들이다. 그것들은 다른 분야에서 발견되는 공리적 첫 원리들—모형이나 패러다임—과 유사하다. 왜냐하면 ‘물질’, ‘신’, ‘에너지’, ‘생명’, ‘건강’, ‘사회’, ‘예술’ 또한 전체 세계를 결속시키는 근본적 은유, 어쩌면 원형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세계를 지탱하면서도 결코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도, 완전히 설명할 수도, 적절히 한정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원형에 대해 말하는 모든 방식은 한 비유에서 다른 비유로의 번역 translations이다. 과학이나 논리의 언어로 제시되는 절제된 조작적 정의조차, 원형을 근원적 사상·정신 기관psychic organs·신화적 형상·존재의 전형적 양식·의식을 지배하는govern 지배적 환상 dominant fantasies 등으로 나타내는 이미지와 비교해 결코 비유적 성격이 덜하지 않다. 원형을 설명하는 다른 비유들도 많다. 용액 속 보이지 않는 결정이나 특정 조건에서 식물의 형태가 돌연 드러나는 것과 같은 비물질적 구조의 잠재성, 동물의 일정한 방향으로 행동을 이끄는 본능적 행동 패턴, 문학의 장르와 토포스topoi, 역사에서 반복되는 전형성, 정신의학에서 기본적 증후군syndromes, 과학에서 패러다임적 사고 모형, 그리고 인류학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세계 형상·의례·관계망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원형이라는 개념에서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감정적 소유 효과 emotional possessive effect, 즉 의식을 압도적 힘으로 매혹하여bedazzlement 자기 입장stance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다. 원형은 우리가 행하고 보고 말하는 모든 것을 자기 우주의 힘 안에 붙들어 두는 경향을 지닌 세계를 구성함으로써, 신God에 비견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그리고 종교가 때때로 말하듯, 신들은 감각이나 지성보다 오히려 영혼의 상상적 비전과 영혼의 정동emotion of the soul을 통해 더 접근 가능하다.
원형적 관점은 삶의 서로 다른 영역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사건들을 하나의 군집 혹은 별자리constellations 로 조직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갖는다. 예컨대 ‘영웅’의 원형은 첫째, 행동 속에서 나타난다. 즉 활동에의 충동, 외부 탐색, 도전에 대한 반응, 붙잡고 움켜쥐며 확장하려는 성향이 그것이다. 둘째, 헤라클레스Hercules·아킬레스Achilles·삼손 Samson(혹은 그들의 영화적 대응물)과 같은 구체적 과업을 수행하는 이미지 속에서 나타난다. 셋째, 의식의 한 양식으로서—독립성·강인함·성취의 감정, 결단적 행동·대처 coping·계획·덕성·정복(동물성에 대한)을 중심으로 한 사고, 그리고 전투의 병리psychopathologies, 과도한 남성성, 한 가지에 몰두하느 집착single-mindedness과 같은 병리적 양태 속에서—나타난다.
이 예시는 물론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영웅의 원형은 내용 목록으로 나타나기보다는 모든 사건에 대해 영웅적 태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태도는 이제 너무나 관성화되어 우리는 그것을 ‘자아ego’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그것이 또 하나의 원형적 양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게 되었다. 다음 장들에서 우리는 이 '영웅적 자아 heroic ego'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반대하는 논점에 대해 상당히 더 많은 말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 전체에서 우리의 목표는 영웅적 자아와 그 자아 심리학을 전면적으로 우회하는 데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의욕적 추동conative striving, 동기나 학습, 자유 의지나 선택에 관한 논의를 포함하지 않는 심리학서이다.
그러나 영웅의 예시는 원형의 집합적 측면을 보여주는 데에는 충분히 유효하다. 첫째, 이를 통해 서로 동떨어진 개인적 사건들을 모아낼 수 있으며, 개별적 습관이나 기벽을 넘어서는 의미와 깊이를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둘째, 원형적 관점은 어떤 개인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과 모든 시대·모든 장소·모든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을 하나로 이어주는 공통의 연결 고리common connection를 제공한다. 이는 심리적 이해가 집단적 수준에서도 가능하게 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원형적archetypal’이라는 것은 곧 근본적으로 인간적이라는 뜻이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우리는 원형을 복수형으로 말해 왔다. 이는 어떤 심리적 사건에 대해서도 유효한 관점들이 다수 존재하며, 이러한 관점들 자체가 원형적 기반을 갖는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리학은 우선 다신론적polytheistic이다. 이는 종교적 고백 confession의 차원에서라기보다 심리적 필연성 때문이다. 인간 본성의 다면성과 단일한 개인 내부에서조차 나타나는 관점들의 다양성은 가능한 한 가장 넓은 기본 구조의 스펙트럼을 요구한다. 만약 심리학이 영혼의 실제적 다양성을 충실하게 대변하고자 한다면, 처음부터 일신론적 편향monotheistic prejudgment으로 인격의 통일성을 강요함으로써 논점을 미리 전제해서는 안 된다. 결국 통일성unity 이라는 관념 자체도 수많은 원형적 관점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 책은 우리 심리적 사고를 오랫동안 지배해 온 일신론적 편향에서 벗어나 더 많은 구조와 더 넓은 신화들을 탐색하고자 한다. 우리 내면의 혼돈 internal confusions 은 잠재적으로 풍요 상태latent richness이며, 그것이 제대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배경의 구분/차이 differentiated background이 필요하다. 우리는 종종 이미지와 경험을 그 원형적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르다거나, 나약하다거나, 병들었다거나, 광적이라고 단정한다. 우리의 마음이 일신론적으로 편향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태를 다원적 스펙트럼의 다른 색조들을 통해 바라보는 일을 잊어버린다. 많은 이들이 이단 heresy이라고 부르는 다신론은 급진적 상대주의radical relativism를 함축하며, 이 또한 두 갈래의 뿔을 지닌 주제로서 이 책 전체에서 우리 목덜미를 바짝 따라붙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책의 구조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네 편의 장(章)은 원래 네 개의 강의를 반영한 것으로, 각각의 제목·주제·핵심 전개를 그대로 유지한다. 각 장은 신화학, 정신의학, 철학, 인문학이라는 전통적 영역 안에서 진행된다. (종교와 심리학은 ‘영혼’에 관한 책에서 필연적으로 그러하듯, 전체를 관통하며 관여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엄밀하게 유지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심리학적 접근은 이러한 영역들 사이의 오래된 경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신의학사·사상사·특정 문화 시기들에 관한 역사적 언급이 책 전반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역사는 우리의 삶 전체를 관통하듯,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우리는 역사학자들의 작업을 존중하지만, 그들의 보고서를 그들 방식 그대로 읽지는 않는다. 역사에는 일종의 ‘계보 신화genealogy myth’를 제공하는 심리적 기능이 있다. 즉, 모든 것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역사적 인물들을 심리적으로 읽는다면, 그들은 우리 정신 속에 존재하는 사상의 선조이자 문화적 조상들이 된다. 우리가 역사—이 문화적 기억의 저장소—로 향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치료적 실천 therapeutic exercise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들 속의 신화, 그리고 우리 안의 연결을 넓히고 깊게 만들어 주어 고통스럽고 생채기 난 경험들에painfully raw experiences 문화라는 침대를 제공하는 원형적 패턴들을 찾는다. 역사학자들과 달리 우리는 책을 사용하고 각주를 만들되, ‘1차 사료’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3장에서 제시된 심리학적 방법은 모든 자료를 1차 사료로 다룰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전통적 경계를 넘어서는 두 번째 예는 정신의학이다. 정신병리학은 특정 전문가들의 분야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다psychopathology does not belong to a field of specialists. 그것은 우리가 경험 속에서 겪는 것이며, 특정한 유형의 경험들에 대해 우리가 취하는 하나의 관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신병리 역시 새로운 심리학적 통찰을 위해 열려 있을 수 있다. 이것이 2장의 주요 작업이다.
이 책의 전개는 단편적이며 순환적이다. 명확한 시작도 끝도 없다. 처음에서 끝까지 직선적으로 나아가지 않는데, 그것이 어떤 결론을 향해 논증하는 방식으로 쓰인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신론적 심리학은 말해야 할 것이 하나가 아니며, 그것을 말하는 방식도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그 다양한 관점들은 서로를 엄격하게 짜맞추려 하지 않을 때 더욱 잘 드러난다.
이 장들의 목적은 영혼의 문제들을 새롭게 열어젖히고, 동시에 영혼을 새로운 질문들 앞에 다시 열어 놓는 데 있다. 나는 난해한 사안들에 빛을 비추고자 하지만, 그 빛은 탐구를 종결시키는 종류의 빛이 아니다. 이 장들이 원형 심리학의 기초를 마련하는 동시에, 이 새로운 분야가 어떻게 작업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가 이 책이 단일한 주제를 일관된 방식으로 전개하여 최종 결론에 이르는 구조가 아니라고 강조하는 것은, 기본적인 심리적 경험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다—영혼은 음악처럼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되풀이되는 모티프 속에서 언제나 새로운 변주new variations를 산출한다는 점, 그리고 이 영혼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어서, 거대한 이해 불가능의 동굴 속에서 vast cavern of incomprehension 오직 통찰의 섬광들로만 illumined by insights 비출 수 있다는 점, 더불어 영혼의 영역에서 자아ego는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점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넓게 탐색할 것이며, 논쟁적 대립도 불사할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듯, ‘투쟁/갈등polemos’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다. 물론 나는 이 페이지들이 영혼이 갈망하는 심층 심리학적 이해를 불러일으키기를 바라지만, 그런 빛을 얻기 위해서는 강철을 부싯돌에 부딪쳐 성가신 불꽃을 튀겨야 한다고 믿는다 we must strike steel on flint and provoke irritating sparks..
왜 이토록 멀리까지 나아가 많은 대상들과 맞서야 하는지가 독서의 과정 속에서 분명해지기를 바란다. 심리학은, 헤라클레이토스가 그려 보인 무한한 영혼 limitless soul 에 충실할 때, 한계가 없다. 그러나 심리학을 다시-보기(re-vision)한다는 것이 광범위한 사유를 요구한다 하더라도, 나는 동양으로 향하거나, 원시로 돌아가거나, 동물로 환원되거나, 미래로 도약하거나, 나만의 내면 여행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이 책은 서구 전통이 지닌 지리적·역사적·종교적 한계를 갖고 있으며, 그 전통은 지금 여기에서 오늘의 놀라운 영혼의 물음들로 흘러나오고 있다. 나는 이러한 동시대 서구의 영혼의 물음들에 soul questions 대해, 다이몬들이daimōn 내게 허락하는 만큼의 열정과 상상력을 가지고 응답하고자 한다. 그것은 진지함속의 유희(遊戲)Serio ludere이다.
J. H.
Casa Gabriella
Moscia, Switzerland
1974년 5월 29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