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설계도 ACORN THEORY(1):제임스 힐먼

by 낭만소년





제임스 힐먼James Hillman의 주저 중 하나인 『The Soul's Code』의 1장을 두 번에 나누어 번역해 올린다.



그의 저서는 이미 여러 번 국내 독자를 만난 적이 있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주민아 역, 토네이도, 2013



그러나 위의 책을 비롯하여 그의 저서 대부분은 절판 상태이다. 재출간 되기를 고대해본다.



Acorn Theory(도토리 이론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제임스 힐먼이 『The Soul’s Code』에서 제시한 핵심 개념으로, 개인의 삶에는 이미 씨앗 형태의 잠재적 형상이 내재되어 있으며, 성장 과정은 그 내재 형상의 발현 과정이라는 관점을 취한다.


아콘은 영혼의 씨앗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이는 인간의 영혼이 타고난 잠재적 형태를 상징한다. 힐먼은 이를 성격 이미지character image라고 부르며, 이는 타고난 성향과 영혼의 설계도를 의미한다. 그의 ‘아콘 이론’에서는 개인의 영혼적 본질로 간주된다.


앞으로 그의 여러 저서들 가운데 아직 국내 독자들을 만나지 못하거나 절판된 저작들과 그의 원형 심리학을 기반으로 한 심리치료 관련 저서를 번역할 계획이다.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영성과 심리>를 향하여 묵묵히 걸어가겠습니다.


오늘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장「아콘 이론ACORN THEORY과 심리학의 회복 IN A NUTSHELL: THE ACORN THEORY AND THE REDEMPTION OF PSYCHOLOGY



인간의 삶에는 우리가 세운 이론들이 포착하지 못하는 더 많은 것이 있다. 언젠가 우리는 어떤 부름calling에 이끌려 특정한 길로 향하게 된다. 어린 시절, 이유를 알 수 없는 충동이나 강렬한 매혹, 혹은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이 마치 수태고지annunciation처럼 다가왔던 순간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는 직감한다.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곧 나다.’

이 책은 그 부름에 관한 것이다.

그 부름이 그렇게 분명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부드럽게 흐르는 운명(fate)의 강물 속에서 우리가 알지 못한 채 한쪽으로 밀려가 어느 순간 특정한 자리로 이르게 된 경험이었을 수도 있다. 돌아보면, 그 과정에는 분명 운명의 손길이 있었다는 것을 느낀다.

이 책은 그 운명감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수태고지적 순간’과 회상들은 잔혹한 학대의 기억만큼이나 개인의 삶을 결정짓는 힘을 지닌다. 그러나 이처럼 상징적 체험들은 종종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어 무시된다. 현대의 심리학 이론은 주로 트라우마에 주목하며 그것을 극복해야 할 과제로 여긴다.
그러나 초기의 상처나 불운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태초부터 이미 고유한 성격의 이미지character image를 지닌 존재로 시작한다. 그것은 변화 속에서도 지속되는 내적 형상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성격의 힘, 즉 인간 존재의 본래적 형태를 향한 영혼의 씨앗acorn에 관한 것이다.


‘트라우마적 관점’은 인격과 발달에 관한 현대 심리학 이론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의 기억 방식mode of remembering과 개인적 이야기 서술의 언어까지 이미 이러한 이론의 독소로 오염되어 있다. 우리가 어떻게 유년기를 상상해왔는가imagined childhood, 그것이 실제 유년기 그 자체보다 우리의 삶을 더 강하게 규정할 수 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친다. 우리는 유년기의 외상적 사건들 그 자체보다, 유년기를 불필요한 외부적 재난들에 의해 부당하게 왜곡된 시기로 기억하는 ‘트라우마적 기억 방식traumatic remembering'에 의해 더 깊이 손상된다.


이 책은 이러한 왜곡으로 인한 손상을 치유하려는 시도다. 그 방법은, 당신의 본성 안에 다른 무엇이 존재한다는 사실—즉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은 한때 의미 상실의 소용돌이와 얕은 물가에서 방향을 잃었던 당신의 배를 돌려세운 알 수 없는 전환의 순간들을 되살리고자 한다. 그 회복의 과정은 다시금 운명감sense of destiny을 되찾게 한다. 수많은 인간이 삶 속에서 상실해버린 것, 그리고 반드시 회복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곧 개인적 부름personal calling의 감각—‘내가 살아 있는 이유가 있다’는 자각이다.



이 책이 말하려는 것은 삶의 이유reason to live나 인생의 일반적 의미meaning of life, 혹은 종교적 신념의 철학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그런 보편적 해답을 제공한다고 가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이런 감정들에 대해 말한다. — “나라는 독특한 존재가 이곳에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바깥에서 내가 반드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어떤 과제가 있다.” — “그 과제가 오히려 일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든 나의 존재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내 고유한 내적 이미지innate image에 응답하고 있으며, 그 이미지를 내 삶의 영혼의 서사 biography 속에서 하나의 형태로 채워가고 있다.



이 책이 다루는 타고난 이미지는 인간의 본성뿐 아니라 모든 전기biography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 책 전반에 걸쳐 우리는 수많은 전기적 사례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전기적 질문’the biography question—즉 “나의 삶의 파편들을 어떻게 하나의 통일된 이미지로 엮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서구적 주체성subjectivity을 끊임없이 괴롭혀왔다. 이는 서구인이 자신을 탐구하기 위해 몰두한 다양한 치유적 실천therapies of self에 잘 드러난다. 치료를 받는 모든 사람, 혹은 TV의 눈물 어린 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치유 담론therapeutic reflection의 영향을 받은 이들 모두는, 결국 하나의 동일한 탐구 속에 있다. “나는 내 삶의 조각들을 어떻게 하나의 일관된 이미지로 구성할 것인가?” “나의 이야기는 어떤 근본적 플롯plot을 따르고 있는가?” 이 책은 그 물음, 즉 삶을 하나의 서사적 전체로 엮는 내적 이미지의 탐색을 다룬다.



타고난 이미지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사용해온 심리학적 틀psychological frames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 틀들은 이미 소진된 해석 방식이며, 인간의 삶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들은 삶을 일정한 도식에 맞춰 잘라내고 조정한다. 그 도식은 이렇다. “유아기에서 출발해, 문제 많은 청소년기를 거쳐, 중년의 위기를 맞고, 노년을 지나, 결국 죽음에 이른다.” 이러한 틀 속에서 인생은 이미 예정된 지도map 위를 따라가는 여정이 된다. 너는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이미 알고 있고,

그 인생은 보험 회사의 계리사actuary가 미리 계산해 둔 통계처럼 예견된 궤도를 따라간다. 이런 삶은 미래완료 시제 속에서 묘사된다 — “나는 이미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또 다른 유형도 있다. 예측 가능한 ‘고속도로’ 대신, 패턴 없이 사건들을 나열하기만 하는 비정형적 여정offbeat journey — 이후 이력서에 연대순으로 정리될 뿐인 사건들의 목록, “이 일 다음에 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삶은 플롯 없는 내러티브narrative without plot, 곧 점점 더 지루해지는 중심인물 “나”를 따라가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 “나”는 생기 없는 ‘경험들의 사막desert of dried-out experiences’ 속을 방황한다.



우리는 본래의 전기true biography—즉 도토리acorn 속에 이미 새겨져 있던 운명destiny—을 빼앗겨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되찾기 위해 치료therapy를 찾는다. 그러나 그 타고난 이미지는, 운명의 부름call of fate에 심리적 실재성psychological reality을 인정하는 새로운 심리학 이론 없이는 발견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정체성은 여전히 무작위 통계에 따라 규정된 사회적 소비자sociological consumer의 수준에 머무를 뿐이다. 그때 인정받지 못한 다이몬daimon의 충동은 단지 기이한 성향eccentricities으로, 또는 분노와 결핍된 욕망의 덩어리로만 나타난다. 모든 심리치료 학파가 인격 구조의 핵심으로 삼아온 억압repression은 사실 과거의 억압이 아니라, 우리가 타고난 도토리—즉 영혼의 씨앗—와 맺은 잘못된 관계의 결과로서, 그 가능성 자체를 억압한 것이다.


우리는 삶을 인식하는 방식으로 인해 스스로의 삶을 둔화시키고 있다. 더 이상 우리의 생을 낭만적 상상이나 서사적 감각fictional flair으로 그리지 않게 된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상상력의 상실에 맞서, 낭만주의적 과제를 다시 붙잡는다. 곧 인간의 전기를 아름다움, 신비, 신화 같은 거대한 관념들의 틀 속에서 다시 그려보려는 시도다. 이러한 낭만적 모험에 걸맞게, 이 책은 또한 ‘비전vision’과 ‘부름’처럼 거대한 단어들을 과감히 사용한다. 그것은 축소reduction보다 고양elevation을 선택하는 언어적 결단이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폄하belittle하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유전적 설명genetic explanations을 검토할 때조차, 그 안에서도 여전히 신비와 신화의 구조가 작동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현대의 인간 이해를 지배하는 주요 패러다임 — 곧 유전과 환경의 상호작용이라는 틀 — 은 결정적인 무언가를 누락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나’라는 존재가 느끼는 고유한 개별성particularity이다. 내가 단지 유전적 요인과 사회적 영향의 미세한 충돌로 형성된 결과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결과로 환원된다. 내 삶이 염색체에 새겨진 코드, 부모의 행위나 부재, 그리고 이미 지나가버린 유년기의 조건들로 설명될수록, 나의 전기는 점점 희생자의 이야기the story of a victim가 된다. 그리하여 나는 유전자 코드, 조상의 유전, 외상적 사건, 부모의 무의식, 사회적 우연이 미리 써둔 플롯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



이 책은 개인이 결코 벗어나지 못한 희생자 정체성victim mentality의 그늘을 걷어내고자 한다. 그러나 그러한 회복은, 그 정체성을 만들어낸 이론적 패러다임이 먼저 간파되고 폐기될 때에만 가능하다. 우리는 실천 이전에 이미 이론의 피해자다. 즉, 인간에 대한 잘못된 사유가 우리의 자기 이해를 결정짓는다. 현대 미국의 정체성에서 ‘피해자’는 화폐의 뒷면tail side에 불과하다. 그 앞면에는 반대되는 이상형 곧 영웅적 자기창조인heroic self-made man, 혼자 힘으로 운명을 개척하는 불굴의 자아가 새겨져 있다. ‘피해자’는 곧 ‘영웅’의 반대면이며, 두 형태는 동일한 논리 구조의 양극일 뿐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학문적·과학주의적·치료적 심리학의 피해자다. 이 심리학들은 인간 삶의 중심에 자리한 ‘부름’ — 곧 존재의 근원적 신비essential mystery — 를 충분히 설명하지도, 참여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요컨대, 이 책은 부름, 운명, 성격, 그리고 타고난 이미지에 관한 것이다. 이 네 가지가 합쳐져 ‘아콘 이론’acorn theory을 이룬다. 이 이론은 각 개인은 살아야 할 고유한 유일성uniqueness을 타고나며, 그 유일성은 삶으로 드러나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살아내기 이전before it can be lived”이라는 표현은 또 다른 주요 패러다임— 즉 시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시간은 “세상의 모든 것을 측량하는 자”이지만, 결국 멈춰야 한다. 이 책은 이 시간의 패러다임 역시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전’이 항상 ‘이후’를 결정하게 되고, 우리는 결코 바꿀 수 없는 과거의 원인들past causes에 사슬처럼 묶이게 된다. 따라서 이 책은 ‘무시간성the timeless’, 즉 시간의 선형적 인과를 초월한 차원을 탐구한다. 인생을 앞으로만 읽지 않고, 뒤로도 거슬러 읽으며, 삶의 패턴 속에 이미 내재한 운명의 구조를 찾아내려는 시도다.



삶을 거꾸로 읽는 것reading life backward 은, 어린 시절의 집착obsessions 들이 현재의 행동 양식을 예비적으로 형성한 원형적 스케치preformation였음을 보게 한다. 때로는 어린 시절의 절정의 순간peaks of early years이 평생 다시 넘어서지 못할 정점으로 남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성장은 전기의 핵심 개념이 아니다. 대신 형상form이 중요하며, 발달이란 오직 타고난 이미지의 한 단면을 드러낼 때만 의미를 갖는다. 물론 인간의 삶은 매일 조금씩 진보하고, 때로 퇴행하며, 다양한 능력faculties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겪는다. 그러나 그 모든 변화는, 당신의 운명의 타고난 이미지fate’s innate image 속에 이미 함께 존재한다 — 오늘, 어제, 내일이 동시적 공존copresence 속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과정process이나 발달이 아니다. 당신은 그 본질적 이미지essential image 그 자체이며, 그 이미지가 스스로 전개된다면, 그것이 곧 ‘발달’이다. 피카소의 말처럼, “나는 발전하지 않는다. 나는 존재할 뿐이다. I don’t develop; I am”



이미지의 본성은 언제나 동일하다. 이미지는 처음부터 전체로서 주어진다. 창문 밖의 풍경을 보거나,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거나, 눈앞의 얼굴face을 마주할 때 — 우리가 보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게슈탈트gestalt, 즉 전체적 형상이다. 그 부분들은 시간 순서나 인과적 관계에 따라 배열되지 않는다. 모든 요소가 동시에, 한 번에, 전체로서 드러난다. 화가가 붉은 얼룩을 먼저 그렸는지, 회색 선을 나중에 더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선들이 이전 그림의 흔적이든, 처음 구상된 구조이든 상관없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이 곧 전체이며 실재다. 얼굴 역시 그렇다 — 피부색과 윤곽, 표정이 모두 단일한 이미지를 이루며, 그 이미지는 순간적으로 전체로 주어진다. 아콘 속의 이미지image in the acorn도 이와 같다. 너는 이미 하나의 성격을 지닌 채 태어난다. 그것은 주어진 것, 곧 선물이며, 옛 이야기들이 말하듯 탄생 시 수호자guardians가 부여한 것이다.





이 책은 새로운 길을 걷지만, 그 출발점은 오래된 사유에 있다. 모든 인간은 ‘부름’을 받은 채 세상에 들어온다는 생각이다. 이 사상은 플라톤의 『국가』 마지막 부분에 실린 에르의 신화Myth of Er에서 비롯된다. 플라톤은 이 신화를 통해, 인간이 태어나기 전 이미 영혼의 선택과 소명을 부여받았다고 말한다. 요컨대, 그 생각을 간추리면in a nutshell 다음과 같다.


우리 각자의 영혼은 태어나기 전에 고유한 다이몬daimon을 부여받는다. 이 다이몬은 이미 지상에서 살아가게 될 이미지 혹은 패턴을 선택해 둔다. 이 다이몬은 인간이 세상에 도착할 때까지 영혼의 안내자soul-companion로서 우리를 인도한다. 그러나 탄생의 과정에서 우리는 그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자신이 아무런 내용 없이, 빈 상태empty로 세상에 왔다고 믿게 된다. 하지만 다이몬은 기억한다. 당신의 이미지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당신의 패턴pattern이 어떤 방향으로 펼쳐져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따라서 다이몬은 바로 당신의 운명의 운반자carrier이다.



후대의 가장 위대한 플라톤주의자 중 한 사람인 플로티누스Plotinus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의 영혼은 태어나기 전에 자신에게 알맞은 몸, 부모, 장소, 그리고 상황circumstances을 스스로 선택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신화가 말하듯, 영혼의 필연성necessity에 속한다. 이 말은 곧, 내가 저주할 수도 있는 육체와 부모조차도, 사실은 나의 영혼이 선택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잊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다. 바로 이 망각forgetting을 막기 위해 플라톤은 신화the myth를 전한다. 그리고 『국가』의 마지막 구절에서 그는 말한다 — “이 신화를 보존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잘 보존하고, 번영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신화는 구원의 심리적 기능redemptive psychological function을 지닌다. 신화에서 도출된 심리학은 신화에 기초한 삶을 고무inspire할 수 있다.



이 신화는 단지 사변적 상상에 머물지 않고, 실천적 지침practical moves을 제시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실천은, 자신의 전기biography를 바라볼 때 신화가 내포한 사상적 전제들— 즉 부름calling, 영혼soul, 다이몬daimon, 운명fate, 필연성necessity—을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이 다섯 개념은 이후의 장들에서 각각 자세히 탐구될 것이다. 또한 신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암시한다. 유년기를 주의 깊게 살피라. 그 시기에 이미 다이몬이 작동하는 초기의 흔적이 드러난다. 그 의도를 이해하고, 그 길을 가로막지 말아야 한다. 이로부터 신화의 실천적 함의들은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a) 부름을 인간 존재의 근본적 사실로 인식할 것. (b) 삶 전체를 그 부름과 정렬시킬 것. (c) 이해할 것 — 삶의 우연들accidents, 즉 마음과 육신의 아픔과 고통조차도 그 이미지의 패턴pattern of the image 속에 속하며, 그것을 완성fulfill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는 점 말이다.


부름은 미루어지거나postponed, 회피되거나, 혹은 간헐적으로 놓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그것은 결국 드러난다. 그 부름은 언제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다이몬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방식으로, 다양한 징후와 상황을 통해 당신을 향한 기억과 목적을 상기시킨다.



수세기 동안 인류는 이 ‘부름’을 가리킬 적절한 이름을 찾아왔다. 로마인들은 그것을 지니우스genius라 불렀다. 그리스인들은 다이몬daimon이라 했고, 기독교인들은 수호천사라고 불렀다. 낭만주의자들, 예를 들어 키츠Keats는 이 부름이 ‘심장으로부터 온다’고 말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하는 인물의 심장 안에 있는 이미지를 직관inspire의 눈으로 보았다고 전한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이를 상상적 몸체imaginal body, 즉 오케마ochema라 불렀다. 이는 인간의 영혼의 운반체vehicle로, 각 개인의 내적 지지자personal bearer 또는 지속적 매개체support로 이해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행운의 여신Lady Luck 또는 포르투나Fortuna라 불렀고, 다른 전통에서는 정령genie, jinn, 혹은 불운한 씨앗bad seed이나 사악한 천재evil genius로 여겼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그것이 카ka 또는 바ba로 불렸으며, 인간은 그와 대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에스키모나 샤먼 전통을 따르는 문화에서는, 그것은 영spirit, 자유로운 영혼free-soul, 동물 영혼animal-soul, 숨의 영혼breath-soul이라 불렸다.



한 세기 전, 종교와 문화 연구의 선구자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E. B. Tylor는 당시 “비산업 사회인들primitives”이라 불리던 집단이 ‘영혼soul’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보고했다. 그들에 따르면, 영혼은 “얇은 비물질적인 인간의 형상 human image”, 즉 일종의 증기vapour나 막film, 그림자shadow 같은 존재였다. 보이지 않지만, 때로는 물리적 힘 드러낼 수 있는 실재로 여겨졌다. 이후 북미 원주민을 연구한 민족학자 오케 훌트크란츠Åke Hultkrantz는 영혼이 “이미지image에서 기원하며”, 또한 “이미지의 형태로 사고한다”고 보고했다. 플라톤 역시 『국가』의 ‘에르의 신화Myth of Er’**에서 유사한 개념어를 사용했다. 그는 영혼이 선택한 삶의 기본 형상을 파라데이그마paradeigma라 부르며, 이 ‘기본 형태’가 한 인간의 운명 전체를 포괄한다. 이렇게 삶 전체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이미지accompanying image는 운명과 행운의 담지자이지만, 도덕적 교사나 양심conscience과는 구별된다.



로마의 지니우스genius는 도덕적 존재moralist가 아니었다. 그는 “개인의 미래를 모두 알고 그의 운명을 통제하는 존재”로 여겨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제재moral sanction를 행사하지 않았다. 지니우스는 단지 개인적 행운이나 운명을 관장하는 매개자agent였다. 따라서 로마인들은 비난받지 않고 자신의 이기적 혹은 사악한 욕망의 성취를 지니우스에게 기원할 수 있었다. 이와 유사하게, 서아프리카*나 아이티에서도 사람들은 각자의 다이몬daimon—그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에게 적을 해치거나, 그들의 운을 꺾거나spoil their luck, 혹은 유혹manipulation, seduction을 돕도록 기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악한 측면evil aspect’의 다이몬, 즉 인간 내면의 어둠과 연루된 ‘나쁜 씨앗the bad seed’에 대해서는, 이 책의 후반부 〈The Bad Seed〉 장에서 더 자세히 탐구된다.



이 개별화된 영혼의 이미지individualized soul-image 개념은 매우 오래되고 복잡한 역사를 지니며, 그 출현은 문화마다 다양하고 보편적이다. 그 이름들 역시 수없이 많다. 그럼에도 현대 심리학과 정신의학은 이 핵심 개념을 교과서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정신 연구와 치료는 다른 문화들이 성격의 핵심kernel of character이자 개인 운명의 저장소repository of individual fate로 여겨온 이 요소를 무시한다. 결국 심리학의 본래 대상인 프시케psyche, 곧 영혼soul 자체가 이를 연구하고 돌보겠다고 주장하는 학문인 심리학의 책들 안에서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나는 이 책에서 acorn(도토리)을 가리키기 위해 여러 용어들을 거의 서로 교환 가능하게 사용할 것이다 — 즉 이미지, 성격, 운명, 지니우스, 부름, 다이몬, 영혼, 숙명destiny 등의 말들이다.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가장 적절한 단어를 선택할 것이다. 이러한 느슨한 용법은 근대 심리학보다는 오히려 고대 및 전통 문화의 언어적 감각을 따른다. 그 문화들은 인간 삶 속의 이 수수께끼 같은 힘—즉 영혼적 동인(動因)—을 오늘날의 심리학보다 훨씬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현대 심리학은 이러한 복합적 현상을 항상 하나의 단일 의미로 축소해 정의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풍부한 심리적 실재는 개념적 빈곤 속에 갇히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대(大) 명사big nouns’—영혼, 운명, 부름, 다이몬—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 단어들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버려졌을 뿐deserted이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회복rehabilitation이다.



이 수많은 단어들과 이름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존재한다it is는 사실만은 분명히 확인해 준다. 그 다양한 명칭들은 동시에 그 존재의 신비로움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것을 정확히 정의할 수 없다. 그 본성은 여전히 그림자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 실재는 다만 암시, 직관intuitions, 속삭임whispers, 그리고 불현듯 찾아오는 충동urges이나 기이한 일탈oddities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그것들은 우리의 삶을 교란시키지만, 동시에 우리를 자기 운명의 방향으로 이끄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는 여전히 그것들을 단순히 ‘증상symptoms’이라 부르고 있을 뿐이다.



이 장면을 상상해보자. 할렘 오페라 하우스의 아마추어 나이트Amateur Night. 한 여윈 몸매에 어색함이 가득한 열여섯 살 소녀가 두려움을 안고 무대 위로 올라간다. 사회자가 관객에게 외친다. “다음 참가자는 엘라 피츠제럴드Ella Fitzgerald라는 젊은 아가씨입니다.… 피츠제럴드 양이 춤을 춰줄 겁니다.… 잠깐만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가씨?… 정정하겠습니다, 여러분. 피츠제럴드 양이 마음을 바꿨습니다. 이제 춤이 아니라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이 짧은 순간, 두려움과 주저함 속에서 이루어진 결단은 그녀의 다이몬이 드러나는 부름의 사건event of calling이었다. 그 부름은 그날 밤, 그녀의 운명을 돌려세웠고, 세계가 엘라 피츠제럴드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날 밤, 엘라 피츠제럴드는 무대에서 세 번의 앙코르를 받으며 1등을 차지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원래 춤을 추려고 했었다she had meant to dance.”


그녀의 마음을 갑자기 바꾼 것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어디선가 노래의 유전자가 갑자기 작동한 결과였을까? 아니면 그 순간이야말로, 엘라 피츠제럴드가 자신의 고유한 운명으로 부름받은 수태고지annunciation였을까?



심리학이 개인의 운명을 자신의 학문 영역에 들여놓기를 주저하고 있음에도, 심리학은 우리가 각자 고유한 기질을 지니며, 각 개인이 분명하게—나아가 도전적으로까지—독특한 존재라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 유일성의 불꽃²과 그 불꽃에 우리를 붙들어 두는 부름³을 설명해야 할 순간이 오면, 심리학 역시 난관에 봉착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심리학은 이 유일성의 불꽃spark of uniqueness, 그리고 그것을 지속시키는 부름을 설명하려 할 때 막다른 길에 부딪힌다. 그 이유는, 심리학이 개인의 신비를 요인factors과 특질traits, 유형types, 콤플렉스complexes, 기질temperaments로 분해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석적 방법들은 개체의 비밀을 해체하고, 그 비밀을 뇌의 층위나 이기적 유전자로 환원시키려 한다. 보다 엄격한 학파들은 이 주제를 아예 연구실 밖으로 내쫓아 버린다. 그들은 이를 심령학parapsychology에 넘겨, 초자연적 ‘소명callings’의 연구 주제로 보내거나, 혹은 마법·종교·광기의 변방 연구소로 추방해버린다. 가장 대담하면서도 가장 불모한 시도에서, 심리학은 개인의 고유성을 단지 통계적 우연random statistical chance의 결과로 설명하려 한다.



이 책은 심리학의 실험실에 ‘나’의 핵심에 자리한 인성individuality을 맡겨두기를 거부한다. 또한 인간의 이상하고도 소중한 삶을 단순히 통계적 우연의 산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거부가 곧 교회의 품으로 도피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 운명으로의 부름은 무신론적 과학과 비과학적 신앙 사이의 대립이 아니다. 개인성의 문제는 여전히 심리학의 몫이다— 단, 그 심리학이 자기 이름의 어원인 프시케psyche, 곧 영혼을 기억하는 한에서 말이다. 그럴 때 비로소 심리학은 제도적 종교의 교리를 빌리지 않고도 신념faith을 품을 수 있으며, 제도화된 과학의 틀에 갇히지 않고도 현상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실천할 수 있다. Acorn Theory는 과학주의와 신앙주의라는 두 낡은 교의의 한가운데를 민첩하게 통과한다. 서로를 향해 짖어대는 이 두 세계는 서구 사유가 오랫동안 귀여운 애완동물처럼 길러온, 그러나 이제는 초월되어야 할 쌍둥이 도그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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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orn Theory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제안하며, 이에 대한 증거를 제시할 것이다. 바로 당신과 나, 그리고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 이미 자신을 규정하는 형상defining image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의 개별성individuality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형상인(形象因, formal cause)에 속한다. 즉, 우리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특정한 형상의 구현체embodiment of form다. 플라톤과 플로티누스의 언어로 말하자면, 각자는 자기만의 이데아idea, 형상form, 이미지를 구현하여 살아가는 존재다. 이 형상 혹은 이미지는 지나친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를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며, 삶의 궤도를 일정 범위 내에서 조정하고 교정한다. 또한 이 이론은 이 타고난 이미지에 천사적 혹은 다이몬적 의도가 깃들어 있다고 본다. 그것은 마치 "의식의 불꽃spark of consciousness"처럼 작동하며, 무엇보다 우리의 이익을 진심으로 염두에 둔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이유로 우리를 선택chose us for its reasons했기 때문이다.



다이몬이 너의 이익을 진심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이론의 부분은, 아마도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일 것이다. “마음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the heart has its reasons”[Blaise Pascal]는 말에는 쉽게 동의할 수 있다. 또한 무의식이 고유한 의도를 가지고 작동한다는 생각, 혹은 운명이 사태의 전개에 일정한 역할을 한다는 점도 오늘날의 심리학적 상식 속에서는 충분히 수용 가능한 개념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 상상하기를 어려워할까. 내가 돌봄받고 있다는 사실, 무언가가 내 삶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어쩌면 나는 전적으로 나 자신의 의지로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왜 우리는 존재의 보이지 않는 보증invisible guarantees of existence보다 보험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더 신뢰하는가. 살아 있는 일은 사실 너무나 쉽게 끝날 수 있다. 한순간의 부주의면 가장 강한 자아의 계획조차 길가의 보도 위로 흩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무언가가 나를 구한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게, 인도 모서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보이지 않는 위험으로부터 측면에서 보호해 준다.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음악을 틀고 생각이 멀리 떠나 있어도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무엇이 나를 지켜보는가. 바이러스와 독소, 세균으로 가득한 음식을 먹어도 살아 있는 그 "면역 체계immune system"는 무엇인가. 심지어 내 눈썹조차 진드기로 가득한데, 그것은 마치 코뿔소의 등에 앉은 새들처럼 공생의 질서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지키는 그 힘을 본능, 자기보존, 육감, 잠재의식적 인식이라 부른다. 이 모든 것 역시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invisible yet present. 한때 이렇게 나를 잘 돌보는 그 힘은 수호령guardian spirit이라 불렸고, 인간은 그 존재에게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보이지 않는 돌봄invisible caring이 있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세상에 벌거벗은 채 던져진 존재thrown naked into the world로 상상하길 더 좋아한다. 스스로를 완전히 취약하고, 근본적으로 고립된 존재라 여긴다. 영웅적 자아가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이야기—“자기창조적 발전”—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실은 어떤 보호적 섭리guiding providence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세상에 무언가를 기여하기 위해 필요로 되는 존재이며, 위기의 순간에 우연처럼 도움을 받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쉽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것은 어떤 구루guru를 인용하거나, 그리스도를 증언witnessing for Christ하거나, 기적적 회복을 주장하려는 말이 아니다. 단지 하나의 친숙한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섭리providence’라고 불렀던 것—즉 보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우리를 지켜보고being watched 지켜주는watched over 존재—을, 왜 심리학의 고유한 범주 안에 그대로 둘 수 없는가?



아이들은 섭리의 심리학psychology of providence을 가장 잘 입증하는 존재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것은, 높은 난간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거나, 지진 잔해 속에 묻혀도 살아남는—그런 기적적 생존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훨씬 일상적인 기적이다. 어느 순간, 아무 예고도 없이— 그 아이의 성격의 흔적mark of character이 드러나는 바로 그때의 일이다. 그때 아이는 갑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운명적 충동은 자주 왜곡된 인식dysfunctional perceptions과 이를 수용하지 못하는 환경에 의해 억눌린다. 그 결과, 아이의 부름은 ‘문제행동’의 형태로 나타난다. 다루기 어려운, 자기파괴적인, 사고 잘 치는, 혹은 과잉행동하는 아이들—이 모든 단어들은 사실 어른들의 오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방어적 명명defensive labeling에 불과하다. Acorn Theory은 이런 아동기 장애를 완전히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본다. 그것을 원인의 문제가 아니라 부름의 문제로, 과거의 영향이 아니라 직관적 계시intuitive revelations의 차원에서 해석한다.



아이들과 그들의 심리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우리가 가진 습관의 비늘scales of habit—그리고 그 습관 안에 숨은 은폐된 증오—가 우리의 눈에서 떨어지기를 바란다. 아이들이 겪는 모든 일은 그들의 고유한 부름이 세상 속에서 자리를 찾는 과정과 관련이 있다. 아이들은 두 개의 삶을 동시에 살아가려 애쓴다. 하나는 태어날 때부터 지닌 삶이고, 다른 하나는 태어난 장소와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삶이다. 운명의 전체 이미지entire image of a destiny는 작은 어깨 위에 놓인 도토리acorn 안에 압축되어 있다 — 거대한 참나무의 씨앗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 부름의 소리는 크고 집요하며, 주변 세계의 꾸짖음만큼이나 강렬하게 아이를 부른다. 그 부름은 분노tantrums와 고집 obstinacies, 수줍음과 후퇴retreats 속에 나타난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이가 세상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들은 아이가 자신이 ‘가지고 온 세계the world it comes with’와 ‘태어나 온 세계the world it comes from’**를 보호하기 위한 내적 방어일 수 있다.



이 책은 아이들의 편에 선다. 그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시하며, 그 토대는 다시 신화, 철학, 다른 문화, 그리고 상상력에서 자신의 근거를 끌어온다. 이 책의 목적은, 아이들에게 붙여진 ‘장애’라는 문자적인 표지 literal labels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곧바로 치료로 보내기 전에, 그들의 기능장애dysfunctions가 지닌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즉, 아이의 문제를 병리로 보기보다, 그 속에서 영혼의 부름call of the soul*과 형상의 발현expression of form을 읽어내려는 시도다.



아이를 지지하는 이론이 처음부터 마련되어 있지 않고, 또 각 아이를 그 시작 이전의 어떤 근원과 연결해 주는 신화적 틀이 부재하다면, 아이는 세상에 단순한 산물로 들어오게 된다. 그 존재가 우연이든 의도적 계획이든, 그에게는 자기 고유의 진정성authenticity이 결여된 채 태어나는 셈이다. 그렇기에 그 아이의 혼란 또한 진정성을 지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이유own reasons로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고, 자신의 과업project을 가지고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자신만의 지니우스genius의 인도를 받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Acorn Theory는 아동 심리학psychology of childhood을 제시한다. 그것은 아이가 타고난 고유성uniqueness과 운명을 긍정한다. 이는 무엇보다, 아이의 임상병리적 장애 데이타clinical data of dysfunction들조차도 그 고유성과 운명에 어떤 방식으로든 속해 있음을 뜻한다. 즉, 정신병리sychopathologies는 아이의 본래적 존재만큼이나 진정성을 지닌다. 그것들은 부차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주어진given with the child 것이며, 심지어 아이에게 주어진given to the child 선물의 일부다. 따라서 모든 아이는 곧 ‘재능 있는 아이gifted child’이다. 각자는 고유한 형태의 데이터를 지니고 태어나며, 그 특이한 방식으로 그것들을 드러낸다. 그 표현은 종종 부적응적maladaptive이고, 고통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그 역시 아이의 영혼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표현expression일 수 있다. 결국 이 책은 아이들에 관한 책이다. 아이들을 다르게 바라보는 시선, 그들의 상상력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 그리고 그들의 병리 속에서 그들의 다이몬이 무엇을 가리키는지indicating, 그들의 운명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발견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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