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밝은 방』)의 일부분을 옮긴다.
바르트는 엄마의 죽음이후로 하나의 공백기를 거치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글쓰기에 대한 강한 열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에게 엄마는 살려두어야 할 존재, 그녀만을 위한 기억을 창조해야 했다.
바르트에게서 사후 명성과 관련하여 기념비를 남기는 것은 감사와 인정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오래 기억되고, 지속되는 기념비인 것이다.
‘ “기념비”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그러나 마망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견딜 수가 없다(아마도 그녀가 글을 쓴 적이 없고, 그래서 내가 없으면 그녀에 대한 기억도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
그리하여『카메라 루시다』(『밝은 방)는 사진 이론의 성격을 벗어난다. 그것은 부재하는 대상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담은 "애정 어린 헌사"이다. 이 책은 1부 사진 이론과 2부에서 어머니의 사진에 이론을 적용하는 부분으로 나뉜다.
가장 추상적인 '이론'과 깊은 심연에 존재하는 '애도'가 결합된 "혼란"스러운 텍스트이다. 담론과 언어를 주관적이고 개인적 차원에서 "뒤섞는" 텍스트이다.
쇼크로스는 말한다.
"보편적인 성격을 지니는 동시에 개인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 다시 말해 사진 일반에 대한 담론인 동시에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일종의 추도곡이라는 느낌"(『문제적 텍스트 : 롤랑/바르트』에서 재인용)
이 책은 이미 번역되어 있으나, 절판과 품절 상태에 있어서 아쉽기만 하다.
원문은 『Camera Lucida : Reflections onPhotography, trans. by Richard Howard(New York: Hill and Wang, 1981)』에서 발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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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29번
나는 또 한 가지 사실을 성찰에서 생략할 수 없었다.
내가 이 사진을 발견한 방식이 시간을 거슬러 이동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이다. 그리스인들은 죽음 속으로 후퇴하며 들어간다고 여겨졌는데, 그들 앞에 놓인 것은 미래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과거였다. 나는 사랑하는 한 존재의 삶을—내 삶이 아니라—마찬가지 방식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나는 그녀의 마지막 사진, 즉 그녀가 죽기 전 여름에 찍힌 이미지에서 출발했다. 몹시 피곤하면서도 고귀한 모습으로, 우리 집 문 앞에 앉아 있고, 내 친구들로 둘러싸여 있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에서 출발해 4분의 3세기를 거슬러가며 나는 마침내 한 아이의 이미지에 도달했다. 나는 그 아이의 얼굴에서 유년의 주권적 선(善)Sovereign Good—어머니의 선, 아이였던 어머니의 선—을 강렬하게 응시했다.
물론 나는 이 두 이미지 안에서 그녀를 두 번 상실하고 있었다. 마지막 피로 속의 그녀와, 첫 번째 사진 속의 그녀(나에게는 그것이야말로 ‘최종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이 반전되었고, 나는 그녀가 그녀 자신으로 들어가는 순간을 발견했다. “(. . . 영원이 그녀를 변화시킨다 eternity changes her)”—말라르메Mallarme의 시구를 완결하자면, 바로 그런 형태였다.
나는 이러한 사진의 운동movement of the Photograph(사진들의 질서에 고유한 운동)을 현실 속에서 경험했다. 그녀의 생애 말기에—내가 그녀의 사진을 들추어보다가 윈터 가든 사진을 발견하기 직전—어머니는 매우 약해져 있었다. 나는 그녀의 약함 속에서 살았다(나는 더 이상 강함의 세계에 참여할 수 없었고, 저녁에 외출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모든 사회적 삶이 나를 질겁하게 했다).
그녀의 병중에 나는 간호했고, 컵보다 마시기 쉬워 그녀가 좋아하던 찻그릇을 받쳐주었다. 그녀는 내게 작은 소녀가 되었고, 그 모습은 그녀의 첫 사진 속에 있던 본원적 아이와 합쳐졌다.
브레히트에게서는—내가 오래도록 감탄했던 역전—아들이 어머니를 정치적으로 교육한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를 단 한 번도 교육한 적이 없었다. 어떤 것으로도 그녀를 바꾸어 놓은 적이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그녀 앞에서, 그녀를 향해 “말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서로 말하지 않고도, 언어의 경박한 무의미함, 이미지의 정지된 상태가 사랑의 공간, 그 음악이라고 여겼다.
결국 나는, 그토록 강했던 그녀를, 내면의 규범이었던 그녀를, 나의 여성적 아이feminine child로 경험했다. 이것이 내가 죽음을 해결한 방식이었다. 만약 많은 철학자들이 말하듯, 죽음이 종(種)의 엄혹한 승리이며, 개체가 보편을 만족시키기 위해 죽음으로 향하며, 타자로서 재생산된 뒤 자신의 소멸을 통해 자기 자신을 부정·초월한다면—나는 생식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러나 그녀의 병약함 속에서 어머니를 ‘낳아버린’ 사람이었다. 그녀가 죽고 난 뒤, 나는 더 이상 상위의 생명력(종, 생명종life force)의 진보에 자신을 맞출 이유가 없었다. 나의 특수성은 더 이상 보편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유토피아적으로, 글쓰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면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 순간부터, 나는 나의 전체적이며 비변증법적인 죽음undialectical death을 기다리는 것 외에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