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카메라 루시다(4) :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by 낭만소년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밝은 방』)의 일부분을 옮긴다.


바르트는 엄마의 죽음이후로 하나의 공백기를 거치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글쓰기에 대한 강한 열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에게 엄마는 살려두어야 할 존재, 그녀만을 위한 기억을 창조해야 했다.


바르트에게서 사후 명성과 관련하여 기념비를 남기는 것은 감사와 인정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오래 기억되고, 지속되는 기념비인 것이다.


‘ “기념비”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그러나 마망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견딜 수가 없다(아마도 그녀가 글을 쓴 적이 없고, 그래서 내가 없으면 그녀에 대한 기억도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


그리하여『카메라 루시다』(『밝은 방)는 사진 이론의 성격을 벗어난다. 그것은 부재하는 대상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담은 "애정 어린 헌사"이다. 이 책은 1부 사진 이론과 2부에서 어머니의 사진에 이론을 적용하는 부분으로 나뉜다.


가장 추상적인 '이론'과 깊은 심연에 존재하는 '애도'가 결합된 "혼란"스러운 텍스트이다. 담론과 언어를 주관적이고 개인적 차원에서 "뒤섞는" 텍스트이다.


쇼크로스는 말한다.


"보편적인 성격을 지니는 동시에 개인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 다시 말해 사진 일반에 대한 담론인 동시에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일종의 추도곡이라는 느낌"(『문제적 텍스트 : 롤랑/바르트』에서 재인용)


이 책은 이미 번역되어 있으나, 절판과 품절 상태에 있어서 아쉽기만 하다.


카메라 루시다.jpg


밝은 방.jpg



원문은 『Camera Lucida : Reflections onPhotography, trans. by Richard Howard(New York: Hill and Wang, 1981)』에서 발췌한다.


Camera Lucida.jpg


------------------------------------------


<2부>


31번


Henriette.JPG 롤랑 바르트의 엄마 Henriette Barthes


처음부터 나는 하나의 원칙을 세워두고 있었다. 특정한 사진들을 마주할 때, ‘주체로서의 나myself-as-subject)’를 과학이 다루는 그 탈육화되고disincarnated 무정한disaffected 사회적 인간 socius으로 환원하지 않겠다는 원칙이었다. 이 원칙은 나로 하여금 두 제도—가족Family, 어머니 Mother—를 “잊어버리도록” 요구했다.



어떤 알 수 없는 사람이 내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당신이 가족사진 앨범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소문이 퍼지는 방식은 언제나 과장된다).


아니다. 앨범도 없고, 가족도 아니다.


오랫동안, 나에게서 가족이란 어머니, 그리고 내 곁의 형(혹은 동생)이 전부였다.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조부모의 기억 정도만 있을 뿐). ‘사촌’이라는 구성원—가족 집단을 이루는 데 필수적인 단위—도 없었다.


게다가, 가족을 오로지 구속과 의례의 직물a fabric of constraints and rites로만 취급하는 과학적 접근이 나와 얼마나 모순되는가. 우리는 가족을 즉각적 충성mmediate allegiances (정서적 애착)의 집단으로 코드화하거나, 아니면 갈등과 억압conflicts and repressions의 매듭으로 이해한다.


마치 전문가들은 서로 사랑하는 가족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는 듯하다.


13권_종교의 기원_이윤기 역_열린책들_2020.jpg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가 들어있는 한국어판 전집


나는 내가 가족을 ‘제도로서의 가족’으로 환원하지 않듯, 엄마my mother를 ‘일반적 범주로서의 어머니 the Mother’로 환원하지도 않으려고 했다.


몇몇 일반 연구들을 읽으면서, 그것들이 내 상황에 상당히 설득력 있게 적용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았다. 예컨대, J.J.Goux는 프로이트(『모세와 일신교』)를 논하면서, 유대교가 어머니 숭배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이미지의 사용을 거부했으며, 기독교는 모성적 여성성의 재현을 가능케 함으로써 율법의 엄격함을 이미지-레퍼토리 Image-Repertoire의 방향으로 넘어섰다고 설명한다.



나는 이미지가 숭배되지 않는 무(無)상(像)의 종교a religion-without-images (개신교)에서 자랐지만, 동시에 가톨릭 미술에 의해 문화적으로 형성된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겨울 온실 정원 사진 Winter Garden Photograph 과 마주했을 때 나는 이미지—더 정확히는 이미지-레퍼토리—에 나 자신을 내맡겼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나의 ‘보편성generality’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한 순간, 나는 필연적으로 그 보편성에서 벗어났다.


왜냐하면 ‘어머니’라는 범주 안에는, 나의 엄마라는 발광하는(radiant 빛나는), 환원 불가능한 핵심 irreducible core: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가 평생 어머니와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더 많이 고통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 고통은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가에서 비롯되었고, 바로 그녀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와 함께 살았다.


‘선(善)으로서의 어머니the Mother-as-Good’라는 범주에, 그녀는 개별적 영혼individual soul이라는 은총을 더했다.


나는 프루스트의 화자가 할머니의 죽음 앞에서 말하듯이, “나는 단순히 고통만을 붙들려 한 것이 아니라, 내 고통의 독자성을 존중하려 했다 I did not insist only upon suffering, but upon respecting the originality of my suffering ”고 말할 수도 있다. 그 독자성이란, 그녀 안에 있었던 절대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무엇absolutely irreducible—그리고 그리하여 영원히 상실된 무엇—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듯, 애도mourning는 느린 작업gradual labor을 통해 고통을 점차 지워나간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시간은 단지 상실의 정서emotion of loss 를 제거할 뿐이었다(나는 울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정지된 채 남아 있었다.


내가 잃은 것은 하나의 형상a Figure(어머니라는 도식)이 아니라 한 존재being였고, 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성질—영혼quality (a soul)이었다. 필수적인ndispensable 존재가 아니라, 대체 불가능한irreplaceable 존재였다.


나는 ‘어머니(범주)’ 없이도 살 수 있다(우리 모두가 결국 그러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뒤에 남게 될 삶은 어떠한 성질도 부여할 수 없는 삶, 곧 특질없는 삶 life without quality 이 될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카메라 루시다(2) : 롤랑 바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