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Means to Therapeutic Ends』
오래전부터 정신분석학과 심리학, 상담 및 문학 치료와 관련하여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좋은 기회가 생겨 관련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게될 것 같다.
이번에 Michael White와 David Epston의 공저 『Narrative Means to Therapeutic Ends』중 일부를 번역해 올린다.
이야기 치료(서사 치료)의 선구적 저작에 해당하는 본서는 이미 국내에 출간되었으나, 절판 상태라서 아쉽다.
번역을 조금 망설인 이유가 있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참신성 혹은 최신성 때문이었다. 원저작이 1990년에 출간되어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편, 번역이 어려웠지만 재미가 있었던 이유도 있었는데, 1장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심리 치료의 임상적 접근 및 상담학에서 보기 힘든 다른 학문 분야의 전문가들 즉, 미셸 푸코, 그레고리 베이트슨, 어빙 고프만, 마이클 스텁스 등을 다루고 있다. 이들 저자는 내게는 익숙해서 오히려 접근이 용이했고, 또한 그들의 주요 저서가 국내에서 이미 출간되어 학문적 지평을 넓히고 있는 상태이다. 예를 들면 푸코의 경우는 지난 40여년 동안 국내에 학문적 기반이 탄탄하게 구축되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 오히려 1990년 당대 보다는 현재적 맥락에서 Michael White와 David Epston 의 저서가 수용 가능할 정도로 성숙해진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요 몇 년 간 우리 주변 및 사회적 분위기를 접해보면, 이처럼 우울하고, 암담하면서 참담한 마음까지 들었던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우울, 상실, 트라우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개인적일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모두 병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선뜻 이를 "외재화externalization" 하지 않는다. Michael White와 David Epston은 이러한 외재화의 방법을 고민하던 이야기 치료의 선구자들이다. 나는 상처난 마음의 치유가 반드시 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언어(말하기, 이야기하기)/문학을 통해서 상처의 치유가 가능하다 것을 믿는다.
인명 및 지명은 국내 출간본을 따른다. 상담 치료 분야의 번역이 처음이기 때문에 전문 학술 용어 등에 대한 미진한 이해 등 오역이 있을 것이다. 인용의 경우 국내본을 일일이 찾아 대조하지 못했다. 추후 보완하겠다.
1장 이야기, 지식, 그리고 권력
이 장에서는 내(마이클 화이트)가 데이비드와 함께 흥미를 느낀 사회 이론의 최근 발전과 이러한 아이디어가 치료에 시사하는 바에 대한 개요를 제시했다. 이론에 대한 논의에는 권력과 지식에 대한 미셸 푸코의 사상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미셸 푸코는 스스로를 “사유 체계의 역사가”라고 칭한 프랑스의 지식인으로, 우리는 그의 연구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은 최근 몇 년 동안 가족 치료 문헌에서 나타난 권력에 대한 논쟁에 익숙할 것이다.
여기서는 이 논쟁에서 제기된 입장을 단순화할 위험을 감수하겠다. 요약하자면 어떤 사람들은 권력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구성된 것이며, 그 효과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만들어내는” 데 참여했다고 주장한다. 다른 입장은 권력이 실제로 존재하며 일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기 위해 권력을 휘두른다는 것이다. 이 논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권력과 그 작동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크게 발전시키지 못한 것 같다.
우리는 푸코가 이 교착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푸코의 사상과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푸코를 읽기가 어렵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 글에서는 푸코의 사상을 합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내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독자 여러분이 판단할 문제이다.
내가 “해석적 방법”을 접하게 된 것은 베이트슨의 저서(1972, 1979)를 통해서였다. 여기서 나는 정신분석학적 의미의 해석적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 과학자들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과정을 연구할 때 해석적 방법을 언급한다. 우리는 객관적인 현실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앎에는 해석이라는 행위가 필요하다.
베이트슨은 '살아있는 조직 living systems'이라는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선형적 인과관계 개념(주로 뉴턴 물리학에서 파생된)의 적합성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우리가 객관적 실재에 대한 인식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the map is not the territory”라는 Korzybski의 격언을 언급하며 우리가 어떤 사건에 대해 갖는 이해 또는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는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맥락, 즉 우리의 세계 지도를 구성하는 전제와 전제의 네트워크에 의해 결정되고 제한된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러한 지도를 패턴에 비유하여 어떤 사건의 해석은 그것이 알려진 사건의 패턴에 어떻게 부합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했으며, 이를 '전체 코딩을 위한 부분'이라고 불렀다(Bateson, 1972). 그는 사건의 해석은 수용 맥락에 의해 결정될 뿐만 아니라 '유형화patterned'될 수 없는 사건은 생존을 위해 선택되지 않으며, 그러한 사건은 사실로서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베이트슨의 연구는 또한 일반적으로 치료에서 많이 무시되는 차원, 즉 시간적 차원의 중요성에 주목하게 했다. 모든 정보는 필연적으로 '차이에 대한 정보news of difference'이며, 살아있는 조직living systems에서 모든 새로운 반응을 촉발하는 것은 차이에 대한 지각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는 시간을 통한 사건의 지도그리기mapping가 차이를 지각하고 변화를 감지하는 데 어떻게 필수적인지 보여주었다.
인간의 감각 기관은 차이에 대한 정보들news만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차이를 지각하기 위해서는 시간 속의 사건(즉, 변화)으로 부호화code해야 합니다. (Bateson, 1979, 79쪽)
텍스트 비유를 고려하면서 나는 지도 map의 개념과 이야기narrative의 개념 사이에 아이디어가 유사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야기 개념은 시간 간 패턴으로 사건의 위치를 파악해야 한다는 점에서 지도 개념에 비해 분명 장점이 있다. 이야기는 시간적 차원을 통합한다. Edward Brun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내러티브 구조가 형식적인 의미에서 질서와 순서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은유나 패러다임과 같은 관련 개념보다 유리하며 변화, 생애 주기 또는 모든 발달 과정을 연구하는 데 더 적합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결론을 내립니다. 모델로서의 이야기는 선형적이면서도 즉각적instantaneous이라는 놀라운 이중적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1986a, 153쪽)
우리의 특별한 관심 분야였던 가족 치료와 관련하여, 해석적 방법은 가족의 어떤 근본적인 구조나 역기능이 가족 구성원의 행동과 상호작용을 결정한다고 제안하는 대신, 구성원들이 사건에 부여하는 의미가 그들의 행동을 결정한다고 제안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상당한 기간 동안 사람들이 특정 의미를 중심으로 삶을 조직하는 방식과 그렇게 함으로써 의도치 않게 문제의 '생존'과 '경력career'에 기여하는 방식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리고 일부 가족 치료 이론가들과는 달리, 우리는 문제를 개인이나 '조직/체계'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요구되는 것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문제의 요구 사항과 이러한 요구 사항이 개인의 삶과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져왔다. 우리는 문제의 요구 사항에 대한 가족 구성원의 협력적이지만 우발적인 대응을 종합하면 문제의 생명 유지 시스템problem's life support system을 구성한다고 제안했다(White, 1986a).
이전 저작에서 나는 문제가 ‘경향성trends'의 맥락에 위치하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영향력이 커지는 독자적인 삶을 갖는 것처럼 보이는 방식과 가족 구성원이 문제 정의에 대한 공동 진화의 점진적이고 방향적인 특성을 의식하지 못하는 방식에 대해 언급했고, 나아가 가족 구성원이 자신의 삶과 관계에 대한 '문제 포화problem-saturated’ 묘사로부터 분리하도록 돕는 메커니즘으로서 문제의 "외재화externalization "를 제안했다(White, 1984, 1986a, 1986b, 1986c, 1987).
이러한 텍스트 유추는 사람들이 특정 문제를 중심으로 삶을 조직하는 방식에 대한 두 번째 설명을 제공했다. 이러한 유추를 통해 이 조직은 특정 이야기stories나 내러티브를 둘러싼 '독자'와 '작가'의 상호작용을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문제의 경력career이나 라이프스타일이 문제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이 설명은 특정 텍스트를 문학적 의미에서 가치 있게 만드는 기제 mechanisms에 대한 탐구를 포함하여 새로운 탐구 영역을 열었고, "문학적 가치literary merit를 갖는 치료"(White, 1988)를 제안하도록 장려했다.
1) ANALOGY 유추
사회과학의 학문적 초기에 사회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노력을 정당화하고, 타당성을 확립하고,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사회 시스템의 사건 해석에 대한 노력의 기반이 되는 지도를 실증주의적 자연과학에 의존했다. 실증주의, 즉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효과적으로successfully 도전받았을 때, 그리고 다른 과학자들이 유추를 통해 진행했고, 그들이 사용하는 유추가 이미 다른 곳에서 자연과학에 의해 전유되었다는 사실, 즉 "증기기관이 과학에 빚진 것보다 과학이 증기기관에 빚진 것이 더 많다"(Geertz, 1983, 22쪽)는 사실을 깨달은 사회과학자들이 이론을 도출하고 정교화할 메타포를 찾기 위해 다른 곳으로 자유롭게 방향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기어츠는 이러한 변화를 "사회적 사고의 재구성"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사회과학자들은 유사 물리학자나 옷장 속 인본주의자와 같이 모방하거나 새로운 존재의 영역을 발명하여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대신 그들은 집합적 삶collective life에서 질서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면서 자신의 소명을 계속할 수 있었다....
(『Local knowledge: Further essays in interpretive anthropology』1983, 21쪽)
의미를 가정하는 모든 진술은 해석적이라는 것, 즉 이러한 진술은 우리의 지도나 유추, 고프만(1974)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해석적 틀"에 의해 결정되는 탐구 결과라는 것이 이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사용하는 유추는 우리가 사건에 대해 던지는 질문, 우리가 구성하는 현실, 그리고 탐구 당사자들이 경험하는 ‘실제’ 효과 등 세상에 대한 우리의 탐구를 결정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유추는 우리가 세계로로부터 ‘끌어내는’ 바로 그 특질 distinctions 을 결정한다.
사회과학의 발전에 대한 기어츠의 표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우리의 유추 개념의 도표는 비교적 짧은 역사에서 사회과학이 채택한 일부 유추에 수반되는 구성을 고려하려는 시도를 반영하고 있다. 첫 번째 범주에는 유추가 이끌어지는 학문적 경향이 명시되어 있고, 두 번째 범주에는 그것이 사회 조직을 구성하는 방식이, 세 번째 범주에는 문제가 되는 사건의 해석 가능성이, 네 번째 범주에는 지정된 유추에 의해 생성된 문제 사건에 대한 특징적인 해결책이 나와 있다. 이 표가 사회과학의 역사에서 사용된 모든 유추를 제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수용하는 유추를 어떻게 선택하거나 결정할것인가? 우리가 다른 유추보다 어떤 유추를 선호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요소와 지배적인 문화적 관행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유추를 다른 유추보다 우선시할 때 정확성correctness이나 정밀성accuracy과 같은 기준은 어떤 유추에 대해서도 확립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속성에 의지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어느 정도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유추를 조사할 수 있다. 이 삶은 사회 사상의 역사 속에서 우리 자신의 관행을 위치시키고 이러한 관행의 효과를 조사하고 비판는 것에 의해 형성된다.
위의 표에 나와 있는 다양한 유추를 둘러싼 구분의 중요성과 이러한 유추에 의존하여 도달한 해석의 효과는 몇 가지 예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일반적이고 가설적인 것이지만, 우리가 목격한 실제 상황과 관행에 매우 근접해 있다.
<사례 1>
어떤 형태의 격렬한 위기를 경험한 사람이 "치료실"에 등장한다고 가정했을 때, 실증주의 과학의 전통에서 가져온 유추에 의해 지향되는 치료 작업은 그 개인의 위기를 일종의 붕괴와 퇴행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높다. 개인의 경험을 특정 분류 체계에 따라 정확한 진단으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모델과 일치하는 "붕괴"의 원인을 식별하려는 질문이 도입된다. 그 다음 전문가가 정신적 피해의 개인사를 추적하고 해당 모델의 원칙에 따라 과거를 수정하는 절차 등 다양한 절차를 수행할 것이다. 이러한 진료의 목표는 그 개인을 회복하고 재구성하여 "충분히 좋은" 수준의 기능으로 되돌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통과의례"(van Gennep, 1960; Turner, 1969)라고 불리는 일종의 의식적 과정이 동일한 위기에 대한 수용 맥락을 제공한다면, 문제의 다른 구성이 도입되고 다른 질문이 제기될 것이다. 개인의 위기는 개인의 삶에서 전환기 또는 통과의례의 어떤 측면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될 것이며, 이 위기가 다음과 관련되어 있는지를 파악하는 질문이 도입된다:
1. 분리 단계 – 아마도 당사자에게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어떤 지위, 정체성의 측면 또는 역할로부터의 분리의 경험;
2. 경계 또는 그 사이 단계 – 약간의 불편함, 혼란, 무질서, 미래에 대한 높은 기대가 특징,
3. 재통합 단계 – 당사자에게 새로운 책임과 권한이 부여되는 새로운 지위에 도달하는 것이 특징.
따라서 통과의례의 유추는 (a) 위기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것, 즉 자신이나 타인이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어떤 부정적인 태도, 또는 빈곤하다고 경험하는 삶과 관계에 대한 기대와 처방, (b) 위기로부터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지위와 역할에 대한 단서, (c) 이러한 새로운 역할과 지위가 언제, 어떻게, 어떤 상황에서 실현될 수 있는지 결정하도록 유도하는 질문을 지향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통과의례 유추를 통해 수립된 수용 맥락은 위기의 고통 측면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위기를 퇴보가 아닌 진보의 관점에서 구성할 수 있다.
<사례 2>
때때로 비교적 즐거웠던 관계의 초기 단계, 즉 파트너가 서로 만족스러워했던 단계 이후에 특정 문제를 가지고 있는 부부가 치료를 받으러 오기도 한다. 생명 공학적 유추를 통해 이 표현 양상의 맥락을 이해한다면, 문제가 없던 관계의 초기 단계는 '신혼 초기'라는 외피를 씌워 관계의 부정확한 반영으로 폄하될 수 있고, 두 번째 문제 단계는 항상 존재하고 표면 아래 숨어 있던, 즉 관계의 신혼 초기에 의해 잘못 표현되고 가려진 관계의 상태를 실제로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 더 깊은 역기능 과정과 관련 정신 병리, 즉 객관적인 현실 또는 ‘진실’ 상태로 간주되는 더 깊은 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더 깊은 수준의 객관적 현실을 파악하기 위한 작업을 시행하여 역기능과 정신병리의 역사를 추적하고, 아마도 양 당사자의 출신 가족을 통해 각 부모의 관계까지 추적할 것이다. 이것은 서구 문화에 만연된 심층 심리학의 전형적인 구조이다.
그러나 텍스트적 유추가 부부의 경험에 대한 수용 맥락을 제공한다면, 생명 공학적 모델이 레벨들로 구성한 것을 그것들의 끝에 서서 90 〫로 전환하게 되면, 대안적이고 경쟁적인 이야기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런 다음 부부가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식별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것은 문제가 없는 단계의 변함없이 첫 번째 이야기로 간주된다. 그런 다음 이 첫 번째 이야기를 통해 배우자의 문제 해결 능력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살펴볼 수 있으며, 이러한 능력의 역사는 배우자의 출신 가족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런 다음 부부는 관계의 어려운 시기에 이러한 기술을 복제하고, 재수행하고, 확장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울 수 있다.
2) 텍스트 유추
우리는 표의 아래쪽에 있는 유추들, 즉 사회과학의 최근 발전과 관련이 있고 객관적인 현실을 제시하지 않는 유추들을 선호한다. 본고의 논의에서는 기어츠가 "사회 사상의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최근의 재구성"이라고 언급한 텍스트 유추에 주목할 것이다.
사회 과학자들은 어떤 행동이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발생하지만, 그 행동에 부여된 의미는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는다는 관찰을 통해 텍스트 유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 부여가 그들의 관심을 끌었고, 이를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그들은 텍스트 유추를 소환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의 상호 작용을 특정 텍스트를 둘러싼 독자들의 상호 작용으로 간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유추는 또한 텍스트를 새롭게 읽을 때마다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이루어지고 따라서 텍스트에 대한 다른 쓰기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삶의 진화와 텍스트 읽기와 쓰기의 측면에서 관계를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사회 과학자들은 우리가 세상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우리들이 아는 것은 "살아 있는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새로운 질문의 생성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생생한 경험의 축적을 어떻게 정리하는가? 사람들은 이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이 경험으로 무엇을 할까? 생생한 경험은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텍스트 유추를 수용한 사회 과학자들은 우리의 삶을 이해하고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경험을 '이야기'해야 하며, 경험에 부여된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스토리텔링이라고 주장했다.
삶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신과 주변 세계에 대한 일관된 설명에 도달할 수 있도록 사건의 경험을 시간에 따라 순차적으로 배열하는 과제에 직면한다. 이 설명을 개발하려면 과거와 현재의 사건과 미래에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사건의 구체적인 경험을 선형적으로 연결해야 한다. 이 설명은 이야기 또는 자기 서사라고 할 수 있다(Gergen & Gergen, 1984 참조). 이러한 경험의 이야기화의 성공은 사람들에게 삶의 연속성과 의미를 제공하며, 이는 일상 생활의 질서와 추가 경험의 해석에 의존한다.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또는 역사), 중간(또는 현재), 끝(또는 미래)이 있기 때문에 현재 사건에 대한 해석은 과거에 결정된 것만큼이나 미래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Edward Bruner(1986a)의 북미 원주민과의 현장 연구 중 일부를 참고해본다.
그는 북미 원주민의 민족지학적 이야기를 연구하면서 그들의 현재 생활 환경에 대한 해석이 대안적인 역사와 미래를 제안하는 새로운 이야기의 세대와 함께 어떻게 급진적으로 변화했는지 보여준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북미 원주민에 대한 지배적인 이야기는 과거를 영광스러운 것으로, 미래를 융합으로 구성했다. 이 이야기의 맥락에서 인류학자들과 북미 원주민들은 모두 북미 원주민의 일상 생활의 "사실"을 영광에서 융합으로 가는 과도기적 상태로 해석하며 의미를 부여했다. 이러한 해석은 실제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영토의 전유와 관련된 특정 개입을 포함한 지배적 문화의 개입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1950년대에 새로운 이야기가 등장했는데, 이 이야기는 과거를 착취로, 미래를 부활로 구성했다. 이 시기에는 북미 원주민의 일상적 존재에 대한 "사실"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가정할 수 있었지만, 이 새로운 이야기가 수용 맥락을 제공하면서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생겨났다. 이들은 이제 분열이 아닌 저항을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새로운 해석은 토지 권리 문제로 지배적인 문화에 맞서던 운동의 발전을 포함한 실제 영향도 미쳤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제 생각에는 우리는 이미 시작과 끝을 포함하는 서사에서 시작하여 현재를 해석할 수 있게 합니다. 처음에는 데이터의 집합, 즉 사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나 이론을 구성해야 합니다. 대신에 ... 우리가 구성하는 서사 구조는 데이터에 대한 2차 서사가 아니라 데이터로 간주할 내용을 설정하는 1차 서사입니다. 새로운 서사는 우리 민족지학적 계정에서 새로운 어휘, 구문, 의미를 제공하며, 이러한 계정의 데이터를 구성하는 요소를 정의합니다. (1986a, p. 143)
경험의 서사화를 통해 얻는 의미와 연속성의 감각은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서사는 결코 우리의 살아있는 경험의 충만한 풍요로움을 포괄할 수 없다:
. . 삶의 경험은 담론보다 더 풍부합니다. 서사 구조는 경험을 조직하고 의미를 부여하지만, 항상 지배적인 이야기에 완전히 포함되지 않는 감정과 삶의 경험이 존재합니다. (E. Bruner, 1986a, p. 143)
서사의 구조화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배적인 진화 이야기와 맞지 않는 사건들을 우리의 경험에서 잘라내는 선택적 과정에 의존해야 한다. 따라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필연적으로 우리의 살아있는 경험의 대부분은 이야기되지 않고 결코 "말해지지” 않거나 표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조직도 없고 형태도 없는 무정형 상태로 남아 있다:
일부 경험은 이야기할 수 없거나 수행 및 내러티브 자원이 부족하거나 어휘가 부족하기 때문에 단순히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E. Bruner, 1986b, pp. 6-7)
사람들이 경험의 서사화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조직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이러한 이야기의 수행에서 자신의 살아있는 경험의 선택된 측면을 표현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이야기는 삶과 관계를 형성하는 구성 요소가 된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문화를 다시 경험하고, 다시 살아가며, 다시 창조하고, 다시 말하고, 재구성하고, 재조립하는 표현의 수행에서 비롯됩니다. 그 수행은 텍스트에 잠재되어 있는 기존의 의미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수행 자체가 구성적입니다. (E. Bruner, 1986b, p. 11)
이를 통해 텍스트 유추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나 서사가 그들의 상호작용과 조직을 결정하고, 그러한 이야기나 서사의 수행을 통해 삶과 관계의 진화가 일어난다는 생각을 발전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텍스트 유추는 기존의 유추와는 구별된다. 기존의 유추는 근본적 구조를 제안하거나, 가족과 사람들의 삶과 관계를 구성하거나 형성하는 병리학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수행을 통한 삶과 관계의 진화는 모든 텍스트의 "상대적 미결정성relative indeterminancy"과 관련이 있다. 암묵적 의미의 존재, 특정 사건에 개입하는 서로 다른 "독자들"의 다양한 관점, 그리고 그러한 사건을 설명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은유의 존재는 모든 텍스트에 어느 정도의 모호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저Iser(1978)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모호성 또는 미결정성은 사람들이 "텍스트의 지침에 따라 의미의 수행"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문학적 가치가 있는 텍스트를 연구하면서 제롬 브루너 Jerome Brun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텍스트의 상대적 미결정성"이 "다양한 실현성의 스펙트럼을 가능하게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문학 텍스트는 실제로 의미를 공식화하기보다는 의미의 '수행'을 시작합니다." (J. Bruner, 1986, p. 25)
기어츠에게서 텍스트의 미결정성과 텍스트 수행의 구성적 측면은 환영할 만한 긍정적 이유를 제공한다:
리오넬 트릴링이 18세기 미학자의 말을 인용해 "우리 모두가 원본Originals으로 시작하여 결국 복사본 Copies으로 끝맺는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묻습니다. 이러한 씁쓸하고, 미망에서 깨게만드는, 비틀린 질문은 놀랍도록 위안을 주는 답을 찾아냅니다: 바로 복사본이 기원한다는 것입니다. (1986, 380쪽)
이야기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수행하기 위해 채워야 하는 빈틈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빈틈은 사람들의 생생한 경험과 상상력을 끌어모으는 것이다. 수행할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고 있다. 삶의 진화는 사람들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데리고 자신의 삶으로 만드는 과정인 재구성 과정과 유사하다.
따라서 두 가지 의미에서 텍스트 유추는 우리에게 상호 텍스트적 세계를 안내한다. 첫 번째 의미에서 텍스트는 사람들의 삶이 텍스트 내의 또 다른 텍스트에 위치한다고 제안한다. 두 번째 의미에서 이야기의 모든 이야기하기telling 또는 재구성하기retelling는 그 수행을 통해 이전 이야기를 캡슐화하고 확장하는 새로운 이야기이다.
3) 텍스트 유추와 치료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삶과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함으로써 자신의 삶과 관계를 형성하는 데 적극적이라는 제안을 고려해 보았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문제에 대한 개인의 경험과 이를 치료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가정이 가능하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경험이 그 사람에게 문제가 된다고 가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그의 관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야기 내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이야기들이 그 사람이 선호하는 이야기를 수행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는 그 사람이 도움이 되지 않거나 불만족스럽고 막다른 길이라고 생각하는 이야기의 수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야기들이 그 사람의 살아있는 경험을 충분히 요약하지 못하거나 그 사람의 살아있는 경험의 중요한 측면에 의해 매우 크게 모순된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많은 다른 가정들도 탐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정 문제의 경험과 이를 치료에서 제시하는 것이 최근 서구 사회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이야기의 수행의 일부라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본 논의의 목적을 위해, 우리는 사람들이 자주 치료를 받는 문제를 경험한다고 가정한다. 이는 그들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거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야기되고” 있는 이야기들이 자신의 살아있는 경험을 충분히 나타내지 못할 때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이러한 지배적인 이야기들과 모순되는 중요한 측면들이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가정이 우리가 치료라고 부르는 활동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위에서 언급한 가정을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사람들이 치료를 추구할 때 새로운 의미를 수행하고 원하는 가능성을 가져올 수 있는 대체 이야기를 식별하거나 생성하는 것이 수용 가능한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이는 사람들이 더 유용하고 만족스러우며 개방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의미이다.
3-1 살아있는 경험과 대안적 이야기들
사람들이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고, 이 경험의 일부만이 한 번에 이야기되고 표현될 수 있으며, 많은 살아있는 경험이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삶과 관계에 대한 지배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난다는 개념으로 형성된 사례가 있다. 지배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난 살아있는 경험의 측면은 대안 이야기의 생성, 즉 재구성을 위한 풍부하고 비옥한 원천을 제공한다.
고프먼(1961)을 따라서, 나는 지배적인 이야기 밖에 있는 살아있는 경험의 이러한 측면들을 "독특한 결과unique outcomes"라고 언급해왔다. 그는 이를 정의하면서, "어떤 사람의 삶을 통해 나아가는 모든 사회적 연결"로 경험을 구조화할 때, “독특한 결과는 비록 각각 독립적으로 발생할지라도 그것이 사회적 범주의 구성원들에게 기본적이고 공통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변화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시된다.”고 말한다.(국역『수용소』). 고프먼의 "사회적 연결social strand"과 "사회적 범주"에 대한 개념은 "지배적인 이야기"와 이 이야기에서 삶이 위치한 특정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에 비유될 수 있다.
이러한 독특한 결과의 존재는 '사회적 연결'이나 한 사람의 삶의 지배적인 이야기를 읽는다고 해서 예측할 수는 없지만, 항상 존재한다. 여기에는 역사적, 현재 또는 미래의 위치에 있고 지배적인 이야기가 수용할 수 없는 사건, 감정, 의도, 생각, 행동 등의 전 영역이 포함된다. 독특한 결과의 식별은 지배적인 "과잉-문제 problem-saturated" 적 설명이나 한 사람의 삶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극대화함으로써 촉진될 수 있다. 독특한 결과를 식별하는 것은 사람의 삶과 관계에 대한 지배적인 "문제로 가득찬problem-saturated" 묘사나 이야기를 외재화함으로써 촉진될 수 있다. 문제로 가득 찬 이야기의 외재화는 문제의 외현화를 장려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으며, 그런 다음 문제가 개인의 삶과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맵핑mapping으로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문제가 그들의 삶과 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묻는 것으로 시작된다. 문제로 가득 찬 삶의 묘사에서 벗어나, 지배적인 이야기를 습관적으로 읽는 것에서 분리함으로써, 사람들은 독특한 결과를 더 잘 식별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외재화는 이야기의 습관적인 읽기와 수행을 방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사람들은 이야기에서 분리됨에 따라 개인적인 주체성을 경험할 수 있으며, 이야기의 수행에서 벗어나면서 자신의 삶과 관계에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독특한 결과의 발견과 문제의 외부화는 사람들이 자신의 영향력과 타인과의 관계가 문제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지도그리기 하도록 장려함으로써 더욱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접근 방식은 2장과 다른 곳(White, 1986a, 1988)에서 자세히 설명된다.
독특한 결과가 확인되면, 사람들은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도록 안내받을 수 있다. 이 의미 부여에서 성공하려면 독특한 결과를 다른 이야기나 서사로 그려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빅터 터너(1986)가 인정한 바와 같이, "상상력"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새로운 의미 부여에서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다양한 질문들이 소개될 수 있으며, 이 질문들은 Myerhoff(1982)가 말한 것처럼 그들의 삶과 관계에 대한 "재-저자화re-authoring"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러한 질문들은 사람들이 독특한 결과에 대해 설명하도록 초대하는 질문들(예를 들어, "이번 사건에서 문제의 영향에 어떻게 저항했눈가?")을 포함할 수 있다. 이 질문들은 독특한 결과에 반영된 것에 따라 자기 자신, 타인, 관계에 대한 재설명을 도입하는 사람들(예를 들어, "문제에 저항하는 데 있어서 당신의 성공은 당신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과 독특한 결과에 수반될 수 있는 몇 가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추측하도록 유도하는 사람들(예를 들어, "당신에 대한 이 뉴스가 다음 단계에 어떤 차이를 가져올까?")을 포함한다. 삶과 관계의 재작성을 위한 맥락으로서 치료를 고려하면서, 나는 "문학적 가치의 치료"를 제안했다(White, 1988).
대체 이야기가 수행될 수 있게 되면서performed, 그 사람의 경험에서 "공감적"이고 이전에 간과되었던 다른 측면들이 표현되고 유통될 수 있다. 이러한 대체 이야기의 수행에 사람들을 관객으로 유도하면 이야기의 생존과 개인적인 주체성이 향상된다. 이는 사람들이 이전에는 이야기되지 않았을 살아있는 경험의 측면에 대한 표현을 식별하고 이러한 표현이 그들의 삶과 관계에서 미치는 실제 영향을 검토하도록 장려함으로써 촉진될 수 있다.
새로운 이야기의 내구성과 정교함은 '외부'에 있는 증인을 개입시킴으로써 향상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향상에는 이중적인 측면이 있다. 첫째, 새로운 이야기의 수행을 목격하는 행위에서 관객은 새로운 의미를 쓰는 데 기여하며, 이는 관객과 이야기의 주제 간의 상호작용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 둘째, 이야기의 주제가 새로운 공연에 대한 관객의 경험을 추측을 통해 또는 보다 직접적인 동일시를 통해 "읽을" 때, 그/그녀는 새로운 이야기의 수정과 확장에 참여한다.
논의한 바와 같이 구전적 전통 치료에서 삶과 관계의 재-저자화는 주로 질문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서사적 전통을 통합한 치료에서는 다양한 문서에 의존함으로써 이를 달성할 수도 있다. 이러한 문서의 다양한 형태는 이 책의 뒷부분에 제시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경험의 재-저자화는 "문화 요소를 가능한 모든 패턴으로 자유롭게 재결합하는 데 있어"(국역『인간 사회와 상징 행위 - 사회적 드라마, 구조, 커뮤니타스』 강대훈 (옮긴이) 황소걸음 2018)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필요로 한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이 자신의 공연에서 동시에 수행자가 되는 과정과 자신의 작품을 제작하는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활동에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것과 함께 반영성reflexivity의 맥락을 제공한다(Tomm, 1987 참조). 이러한 맥락은 자신, 타인, 그리고 그들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선택을 제공한다.
4) 지배적인 지식과 권력의 단위로서의 지배적 이야기
텍스트 유추의 유용한 측면 중 하나는 그 사람의 경험에 대한 더 넓은 사회정치적 맥락을 제공하는 이야기를 고려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북미 원주민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는 미국에서 당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프레임화 되었는데framed, 이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미국"이라는 용광로의 꿈을 불러일으켰다. 두 번째 이야기는 떠오르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인정과 많은 아메리카 대륙의 동일시 및 인식과 그에 대한 존중appreciation과 관련된 다양한 이상에 의해 프레임화 되었다. 물론 이 두 번째 이야기가 어느 정도까지 우세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이야기가 더 넓은 맥락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치료를 받으러 온 사람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텍스트 유추는 많은 텍스트에서 삶이 위치한 사람들의 더 넓은 사회정치적 맥락을 고려할 수 있게 해주는 틀을 제공하지만, 또한 그 운영operation과 삶과 관계에서 미치는 영향에서 권력에 대한 고려를 포함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가능성은 중요한 것으로, 치료 문헌 전반에서 권력의 관점이 많이 간과되어 왔으며, 특히 우리가 자주 자신의 관행을 따르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에서 더욱 그렇다.
치료 문헌에 등장하는 이러한 권력 관계 분석은 전통적으로 개인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생물학적 현상이나 초기 트라우마적 개인 경험의 불가피한 결과인 개인 병리학, 마르크스주의적 용어로 계급 현상과 같은 개별적인 용어로 표현되어 왔다. 최근에는 권력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분석이 이를 성별에 따른 억압적 현상으로 틀프레임화 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치료사들이 학대abuse, 착취exploitation, 억압oppression과 같은 성별 관련 경험에 민감해졌다.
권력 관계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분석이 성별에 따라 다르고 억압적인 메커니즘으로서 해방 효과를 목격했지만, 우리는 권력의 억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구성적인 측면에서도 보다 일반적인 스펙트럼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미셸 푸코의 연구가 중요하다. 권력 분석에 대한 푸코의 기여에 대한 다음 논의는 결코 철저하지 않으며, 푸코의 개념 중 일부만 제시될 것이다. 또한 독자들은 서로 다른 제목 아래에서 피할 수 없는 아이디어의 중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4-1 구성으로서의 지식과 권력
일반적으로 권력은 그 작용과 그 효과에서 억압적이며 힘과 성격에서 부정적이라고 제안된다. 권력은 결격자로서 낙인disqualify, 제한limit, 부정deny, 억제contain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푸코는 우리가 주로 권력의 긍정적 또는 구성적 효과를 경험하며, 이는 우리의 삶과 관계를 형성하는 "진리truths"를 정상화함으로써 권력의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진리"는 결국 권력의 작동에서 구성되거나 생산된다(푸코, 1979, 1980, 1984a).
따라서 푸코는 권력의 긍정적인 효과를 논의할 때 일반적인 의미의 '긍정적', 즉 바람직하거나 유익한 것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이 사람들의 삶을 구성하거나 형성한다는 의미에서 권력을 언급하고 있다. 권력 의 역할에 대한 이론에 따르면 부정적인 효과를 미치는 권력 개념은 억압 이론에 기여하는 반면,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는 권력 개념은 사람들의 삶을 '구성'하는 데 기여한다. 그리고 '진리'를 논의할 때 푸코는 사람의 본성에 대한 객관적이거나 본질적인 사실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아니라 진리의 지위에 부여된 사유를 구성하는 데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진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형성하거나 구성하도록 유도하는 규범을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정상화normalizing'하고 있다. 따라서 실제로 사람들의 삶을 구체화하는 것은 바로 '진리'이다.
그에 따르면, '진리'를 통한 이 권력과 권력을 통한 '진리'의 주요 효과는 개인성individuality의 한 형태, 즉 권력의 '수단'으로서 개인성을 명시하는 것이다. 푸코는 이러한 형태의 권력은 억압한다고 보기보다는 개인을 주체화subjugates한다고 주장한다. 권력은 사람들을 '신체를 순종화docile bodies'로 강제하고 '전지구적', '보편적unitary' 지식의 확산과 권력의 기술을 지원하는 활동에 강제한다. 그러나 푸코는 '전지구적' '보편적' 지식을 언급하면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지식이 있다고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성격을 주장 하는 지식, 즉 현대 과학 분야의 '객관적 현실objective reality' 의 지식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지식을 통한 권력의 주체화 과정은 다음과 같다:
. . 권력의 특정 효과를 지닌 진정한 담론의 기능으로 판단, 비난, 분류, 결정, 특정 삶의 방식 또는 죽음의 방식에 따라 결정됩니다.
(『Power/knowledge: Selected interviews and other writings』1980, 94쪽/국역『권력과 지식 : 미셸 푸코와의 대담』콜린 고든, 나남, 1991)
푸코는 진리의 정상화를 통한 권력의 구성적 효과를 『성의 역사』(1984a)에서 설명한다. 그는 성적 욕망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빅토리아 시대 전반에 걸쳐 성과 권력이 억압 관계를 통해 연결되었다는 대중의 통념에 도전한다. 대신 그는 이 시대에 성과 관련된 담론이 확산되고 사람들이 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선동incitement'이 증가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위대한 성 설교sermon'의 세부 사항을 추적하면서 17세기를 통한 고백의 실천confessional practices의 변화와 아동의 성을 통제하는 형태의 발전을 스케치했다.
고백의 실천의 강조는 단순한 행위뿐만 아니라 성적 욕망과 가장 빈약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모든 사유, 감정, 환상, 꿈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전환한다. 모든 가능성을 감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와 신체 움직임을 감시하는 방법이 도입되었다. 성적 욕망의 모든 발화를 듣고 이러한 활동의 다양한 관찰과 발견을 기록하고 배포하는 절차도 개발되었다. 요컨대, 이 시대에는 욕망이 담론으로 변모하는 동시에 성에 대한 규범적 '진리'가 구축되었다.
아이들의 "위험한" 성에 관해서는, 그 표현과 규제에 전념하는 전문가 의견의 전체 분야가 등장했다. 부모와 다른 보호자들 사이에서 아동의 성적 발달에 대한 집착을 부추기는 수많은 매뉴얼과 이 개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통합에 대한 집착을 부추기는 수많은 매뉴얼이 등장했다;이들은 아동기 성에 대한 올바른 감독 방법에 대한 세심한 지침을 제공했다:
그곳의 남학생과 그의 성별 주변에는 계율, 의견, 관찰, 의학적 조언, 임상 사례, 개혁 개요, 이상적인 제도에 대한 계획 등에 대한 전체 문헌이 널리 퍼졌다. (1984a, p. 28/국역『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이규현 (옮긴이), 나남출판, 1990)
따라서 푸코에 따르면, 역사적 성적 억압과 현대적 성적 해방의 개념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위장하는 "기만ruses", 즉 성적 욕망에 대한 담론의 선동, 성에 대한 지식의 구축, 그리고 이러한 "진리"에 따른 성적 형태의 상세화이다. 사람들의 삶은 이러한 상세화와 성적 욕망에 대한 "진리" 담론의 지속적인 생산 및 확산을 위한 기술을 통해 구성된다:
사실 근대 사회에 고유한 특징은 사회가 성을 어둠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누구나 다 아는” 비밀로 이용함으로써 한없이 그것에 대해 말하는 데 열중한다는 것이다.(1984a, p. 35/국역, 위의 책 p. 53)
4-2 권력/지식
푸코는 권력의 구성적 차원을 고려하면서 권력과 지식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결론짓는다. 그래서 그는 이 용어들을 권력/지식 또는 지식/권력으로 묶는 것을 선호한다. 사상 체계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17세기부터 생명, 노동, 언어의 "학문disciplines"이 등장하고 눈부신 성공을 거둔 것은 권력의 기술에 달려 있었으며, 그 결과 현대 권력의 확장주의적 특성은 "진리"를 제안하는 이러한 지식의 구축 과정의 진전에 달려 있다고 결론지었다. 따라서 지식의 영역은 권력의 영역이고, 권력의 영역은 지식의 영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연관성을 통해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특정한 진리 담론의 경제 없이는 권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권력을 통해 진리를 생산하며, 진리를 생산하는 것 외에는 권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1980, p. 93/국역 『권력과 지식 : 미셸 푸코와의 대담』 콜린 고든, 나남 1991))
이러한 방식으로 권력과 지식을 결합함으로써 푸코는 권력과 지식의 공식화 즉, 권력자들이 자신의 목적에 맞게 휘두를 때만 지식이 문제가 된다는 제안을 차단한다. 대신 그는 대부분 주어진 권력/지식 분야 내에서 그리고 그 분야를 통해 일관되게 행동하고 있으며, 이러한 행동이 매우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특별한 동기로 식별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푸코는 모든 형태의 권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특히 현대적이고 교활한 형태의 권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
따라서 푸코는 권력 작동의 설명에 대한 "내부적 관점"을 가진 우려에서 벗어나 누가 권력의 효과를 의도하고 , 그 행사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에 대한 우리의 집착을 만류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권력/지식의 그물망이나 거미줄web에 갇혀 있기 때문에 이 영역을 벗어나 행동할 수 없으며, 동시에 권력의 영향을 받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여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권력 행사에서 평등하다는 의미는 아니며,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그 지배적인 영향을 훨씬 더 많이 겪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니다.
따라서 특정 사람들이 왜 지배하고자 하는지, 무엇을 추구하는지, 그들의 전반적인 전략은 무엇인지 묻지 맙시다. 대신, 우리 몸을 지배하고, 몸짓을 지배하고, 행동을 지시하는 지속적이고 중단 없는 과정의 수준에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물어봅시다. 다시 말해 ... 우리는 주체들이 다양한 유기체, 힘, 에너지, 물질, 욕망, 생각 등을 통해 점진적으로, 점진적으로, 실제로, 물질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체의 물질적 사례를 주체의 구성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1980, p. 97)
권력/지식의 불가분성에 대한 푸코의 개념은 특정 지식이 다른 지식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의 대립안에서 반영되어 있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그들이 어떤 대안적 지식의 자격을 박탈할까disqualify? 그리고 이러한 패권적 주장의 성공으로 인해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을까?
푸코는 특정 지식을 주변에 순환하는 불연속적인 지식으로부터 격리하는 것이 그들의 담론에 권력 효과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고립은 본질적으로 지식을 과학적 지식의 계층 구조에 속하는 위치에 적합하게 만드는 "객관 현실"의 담론의 발전에 의해 달성된다. 푸코는 이러한 지위를 부여받은 지식의 역사를 추적하여 그 영향, 한계 및 위험성을 탐구했다.
18세기 이후 철학과 비판 사상의 중심 문제는 항상 . . . 우리가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 역사적 영향은 무엇인가요? 그 한계와 위험성은 무엇인가요?
(1984b, 249쪽 「Space, knowledge and power」 In P. Rabinow (Ed.), 『The Foucault reader』New York: Pantheon)
4-3 권력의 고고학적 분석 대 계보학적 분석
푸코는 권력에 대한 고고학적descending 분석이 아닌 계보학적ascending 분석을 주장한다. 그는 권력 기술이 위로부터 아래를 변화시키기 위해 작동한다고 제안하는 대신, 이러한 기술technology 의 기원이 국지적 수준에서 발생한다고 제안한다. 사실, 이러한 기술의 준비된 가용성은 17세기 이후 단일 및 전지구적 지식의 성장과 자본주의의 부상을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이러한 기술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통제, ‘정복의 기술’, 사람의 ‘대상화’ 또는 ‘사물화thingification’, 사람의 신체를 대상화하는 기술이었다. 여기에는 가장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방식으로 공간에서 사람을 조직하고 배치하는 기술, 사람을 등록하고 분류하는 기술, 집단을 배제하고 이들 집단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기술, 사람을 격리하고 관찰(감시)과 평가의 효과적인 수단을 위한 기술 등이 포함되었다.
푸코는 또한 사람들을 자신의 정복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모집하는 데 사용할 수 있게 된 기술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특정 제도화된 '규범'에 따라 지속적인 평가를 경험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고, 이러한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러한 조건의 경험 속에서 개인이 고립될 수 있을 때, 개인은 그들 자신 스스로의 수호자가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을 평가하고 스스로를 ‘순종적인 신체docile bodies’로 만들기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한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푸코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평가 또는 정상화 여부의 판단이 사법부와 고문을 대체하고 사회 통제의 주요 메커니즘으로 자리 잡은 사회에 살고 있다: 이것은 항상 존재하는 ‘감시gaze’ 사회이다.
따라서 푸코는 이데올로기보다 그 이상의 효과에 관심을 가진다. 그는 지식의 성장에 필요한 바로 그 권력의 기술에 관심이 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기도 하고 훨씬 더 적은 것이기도 합니다. 관찰 방법, 등록 기술, 조사 및 연구 절차, 통제 장치 등 지식의 형성과 축적을 위한 효과적인 도구의 생산입니다. 이 모든 것은 권력이 이러한 미묘한 메커니즘을 통해 행사 될 때 이념적 구성물이 아닌 지식 또는 오히려 지식의 장치를 진화, 조직 및 유통시킬 수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1980, p. 102)
푸코는 또한 이러한 기술이 국지적 수준에서 개발되었듯이 권력 행사가 가장 적게 은폐되고 따라서 가장 비판하기 쉬운 수준이 바로 이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병원, 지역 조직,가족 등과 같은 사회의 '말단extremities'에서 권력의 역사와 그 영향에 대한 연구를 장려한다.
4-4 종속된 지식 Subjugated Knowledges
푸코는 “전지구적 전체주의” 이론에 대한 분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다른 지식, 즉 “종속된 지식”에 대해서도 검토한다. 그는 종속된 지식의 두 부류를 제안한다. 하나는 보다 세계적이고 단일한 지식의 등장을 통해 달성된 역사의 수정에 의해 기록에서 사라진, 이전에 확립되었거나 ‘박학한erudite’ 지식으로 구성된다. 푸코에 따르면, 이러한 학적인 지식은 “갈등과 투쟁의 파열 효과를 가리기 위해” “형식적 체계화의 기능적 일관성 속에” 묻히고, 숨겨지고, 위장되어 왔다. 이러한 지식은 신중하고 세심한 학문에 의해서만 부활할 수 있으며, 이러한 부활 속에서 투쟁의 역사는 다시 가시화되고 단일 진리 주장은 도전을 받게 된다.
다른 하나는 푸코가 ‘지역 대중적local popular’ 또는 ‘자생적indigenous’ 이라고 부르는 지식으로, 현재 유통되고 있지만 적절히 수행될 수 있는 공간을 거부당하거나 박탈당한 ‘국지적regional’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은 사회의 주변부에서만 존재하며, 불충분한 것으로 간주되어 공식적 지식과 인정받는 과학의 합법적인 영역에서 추방된 낮은 수준의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은 “필요한 수준의 인식이나 과학성 아래, 계층 구조의 낮은 곳에 위치한 순진한 지식”이다(푸코, 1980).
푸코는 이러한 자율적이고 자격 미달로 판단된 지식의 세부 사항 ( "학적 지식과 국지적 기억의 결합")의 회복을 통해 우리는 투쟁과 갈등의 역사를 재발견 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이 수행될 수 있는 적절한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우리는 지배적 지식에 대한 효과적인 비판, 즉 "그 타당성이 기존 사고 체제의 승인에 의존하지 않는" 비판을 발전시킬 수 있다.
나는 또한 이러한 낮은 순위의 지식, 자격이 없고 심지어 직접적으로 실격된 지식, 그리고 내가 대중적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된 지식의 재등장을 통해, 이러한 국지적 대중적 지식, 실격된 지식의 재등장을 통해 비판이 그 일을 수행한다고 믿는다. (1980, p. 82)
따라서 푸코는 우리의 삶을 조직할 수 있는 어떤 대안적 이데올로기나 다른 이상적인 단일 지식을 제안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지식을 '부정'하는 것, 즉 지식과 담론적 실천의 매개 효과 바깥에서 세계를 분리하여 경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제안하지도 않는다. 또한 "지식의 캡슐화를 벗어난 즉각적인 경험"이라는 개념에 기반한 실천을 확립하려는 실증주의 버전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제도와 과학 담론에 투자하는 지식과 권력의 효과"에 대항하여 종속적 지식의 "반란insurrection"을 주장한다:
. . 주로 과학의 내용, 방법 또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회 내에서 조직화 된 과학 담론의 제도 및 기능과 관련된 중앙 집중화 권력의 영향에 반대합니다. (1980, p. 84)
5) 대안적 이야기와 문화적으로 이용 가능한 담론
나는 텍스트 유추가 개인의 삶과 관계의 더 넓은 사회정치적 맥락을 고려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하며, 푸코의 권력/지식 분석이 그러한 더 넓은 맥락에 대한 세부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권력과 지식에 관한 푸코의 사상 중 일부를 요약해 보았다. 이것이 치료에 주는 실질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앞서 텍스트 유추에 대한 논의에서 의미는 경험을 이야기로 구조화함으로써 도출되며, 이러한 이야기의 수행은 삶과 관계를 구성한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경험의 이야기화는 언어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 전제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언어를 통해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삶과 관계를 구성한다고 제안했다. 언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중립적인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경험의 특정 측면을 표현하거나 표현하는 데 적절하고 관련성이 있다고 간주되는 문화적으로 이용 가능한 담론이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 이해'라고 부르는 경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언어를 통해 매개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의 중재와 인격과 관계의 구성에 있어서 단일 지식과 세계 지식의 ‘진리’ 담론이 크게 기여한다고 예상할 수 있다.
이것이 문제에 대한 사람의 경험에 대한 일반적인 가정을 어떻게 수정하거나 기여하는가 ; 즉,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거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서사가 자신의 살아있는 경험을 충분히 나타내지 못할 때 치료를 위해 자주 나타나는 문제를 경험하며,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살아있는 경험의 중요한 측면들이 이 지배적인 서사와 모순될 수 있을까? 첫째, 푸코의 분석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개인의 생생한 경험을 충분히 대표하지 못하거나 그 경험의 중요한 측면과 모순되는 서사는 단일한 지식의 ‘진리’ 담론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가정할 수 있다. 둘째, 우리는 사람들이 이러한 ‘진리’ 담론에 담긴 인격과 관계에 대한 규범에 자신과 타인을 복종시키기 위해 권력의 기술을 통해 자신의 삶과 관계를 조작하도록 부추긴다고 가정할 수 있다.
아래에서 나는 푸코의 사상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치료 방향에 관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 다음에는 푸코의 권력/지식 분석에 의해 수정된 개인적 문제의 경험에 대한 위에서 언급한 가정을 기반으로 한 치료적 실천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5-1 치료의 오리엔테이션
전지구적이고 단일한 지식(즉, 세계적이고 단일적인 진리 주장을 하는 객관적 현실 과학의 지식)의 부상에 대한 푸코의 분석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전문적인 학문의 ‘진리’ 담론, 즉 인간 조건에 대한 객관적 현실에 대한 설명을 제안하고 주장하는 담론에 우리의 실천을 위치시키는 것을 경계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에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이러한 지식이 일반적 지식으로부터 분리되고 과학성scientificity의 위계질서 속에서 확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전문적 학문 지식이 불연속적 지식의 영역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또한 우리는 인간 과학의 과학주의에 도전한다.
지식의 영역이 권력의 영역이고 권력의 영역이 지식의 영역이라는 식으로 권력과 지식이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동시에 권력의 영향을 받으면서 동시에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천을 온건하게 바라볼 수 없게 된다. 또한 우리의 실천이 주로 우리의 동기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정하거나 그러한 개인적인 동기를 검토함으로써 권력/지식 영역에 대한 모든 참여를 피할 수 있다고 가정할 수도 없다.
대신, 우리는 항상 권력과 지식의 영역에 동시에 참여하고 있다고 가정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영역에서 형성된 우리 자신의 실천을 비판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실천이 자리 잡고 있는 사상적 맥락을 파악하고 이러한 사상의 역사를 탐구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러한 사고와 우리 자신의 실천의 효과, 위험성, 한계를 더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치료가 사회적 통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믿는 대신에, 우리는 이것이 항상 강력한 가능성이 있다고 가정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작업에서 사회적 통제의 기술과 관련될 수 있는 측면을 파악하고 비판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진리'를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구성하도록 '선동incite'하는 권력의 기술이 국지적 수준에서 개발되고 완성된 다음 더 넓은 수준에서 채택된다는 푸코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실천에 도전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때 우리는 불가피하게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것이다. (또한 이러한 권력의 기술에 도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도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이는 대안 이데올로기를 제안하는 정치 활동이 아니라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사람들을 예속시키는 기술에 도전하는 정치 활동인 것이다.
5-2 단일한 지식에서 분리하기
문제의 외현화는 사람들이 자신을 종속시키는 단일한 지식과 ‘진리’ 담론을 식별하고 분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문제가 개인의 삶과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지도그리기할 때, 이러한 단일한 지식은 문제의 지속적인 존재로 인해 강화되고 확인되는 자신, 타인 및 관계에 대한 신념을 식별하도록 장려함으로써 드러날 수 있다. 이러한 신념은 일반적으로 특정 기대치를 달성하지 못했거나, 특정 상세화를 모사하지 못했거나, 특정 규범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느낌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기대, 모사, 규범은 단일한 지식의 '진리'에 대한 세부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런 다음 이러한 '진리'가 개인의 삶과 관계의 구성에 미친 영향의 역사를 탐구할 수 있다.
이러한 확장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적 관점을 갖게 되고, 자신과 관계를 정의하고 규정하는 것으로 경험하는 '진리'에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선택지를 갖게 된다. 이는 그들이 지식을 통해 자신과 신체의 대상화나 "사물화"를 거부하는 데 도움이 된다.
5-3 권력의 기술에 도전하다
단일한 지식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통해 사람들의 삶을 구성하도록 '선동'하는 권력의 기술은 문제의 극단화에 의존함으로써 효과적으로 도전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기술에는 공간에서 사람을 조직하는 기술, 사람을 등록하고 분류하는 기술, 집단을 배제하고 그 집단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기술, 사람을 격리하고 감시와 평가의 효과적인 수단을 위한 기술 등이 포함된다.
우리는 문제가 사람들의 삶과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기 때문에, 문제의 생존을 위한 요건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요건에는 자신과 타인과의 특정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특정 배열이 포함되며, 문제가 자신과 타인을 대하도록 강요하는 방식을 탐색함으로써 파악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고, 자신을 지배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권력 기술의 세부 사항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이 확인되면, 당사자가 이러한 기술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거부한 경우에 대한 탐구를 통해 '독특한 결과'를 찾을 수 있다. 그런 다음 그 사람에게 이러한 독특한 결과를 중심으로 의미 있는 수행에 참여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문제의 요구 사항에 따라 그 사람이 도전하거나 수행을 거부하는 것이 문제를 약화시키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었을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으며, 문제의 생존을 위해 그것이 강화되고 의존하는 아이디어에 어떻게 도움이 되었을지에 대한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저항의 다른 사례를 찾아 서로 연결하여 저항에 대한 역사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러한 저항에 대한 설명을 확장할 수 있는 다른 기회와 이것이 성공할 경우 개인의 삶과 관계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한 추측을 유도할 수 있다. 이러한 독특한 결과를 식별할 때, 지배적인 ‘진리'에 따라 사람과 관계를 평가하고 분류하는 '정상화하는 판단normalizing judgment’ 의 기술에 대한 종속은 효과적으로 도전받을 수 있을 것이다. “순종하는 신체”는 “활기찬 영혼”이 돤다.
5-4 정복당한 지식의 부활
치료의 바람직한 결과가 삶의 경험에서 중요하고 이전에 무시되었던 측면을 통합하는 대안적 이야기를 생성하는 것이고, 이러한 이야기가 대안적 지식을 통합하는 한, 이러한 지식의 수행을 위한 공간을 식별하고 제공하는 것이 치료 노력의 중심 초점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문제의 외현화는 단일한 지식의 식별과 외연의 확장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활용될 수 있다. 이는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 '진리'에 도전하여 단일한 지식에 예속된 것에 저항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또한, 극단화는 사람들이 이러한 단일한 지식으로부터 분리되도록 도와줌으로써 대안적 지식이나 종속된 지식을 식별하고 유통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다.
앞서 텍스트 유추와 치료에 대한 논의에서 고유한 결과를 중심으로 한 의미의 수행을 통해 대안적 이야기가 생성되거나 재생산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고유한 결과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의미 수행은 종속적 지식의 식별과 이러한 지식의 순환을 위한 공간의 개방을 위한 근거를 제공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고유한 결과의 식별은 문제의 극단화를 통해 촉진될 수 있다.
단일한 지식의 극단화에 이어서, 개인의 삶의 측면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특성, 인정할 수 있지만 이러한 단일한 지식에 의해 규정된 것과는 맞지 않는, 즉 이러한 지식이 제시하는 규범과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 특성을 조사함으로써 고유한 결과를 찾을 수 있다. 그런 다음 사람들은 이러한 독특한 결과가 자신과 관계에 대해 어떤 중요한 메시지를 주는지 발견하고 이러한 새로운 깨달음을 수용할 수 있는 '독특한 지식'을 식별하도록 장려할 수 있다. 따라서 국지적 지식, 대중적 지식 또는 토착적 지식이 수행될 수 있게 된다.
'고고학적' 노력을 통해서도 고유한 지식을 파악할 수 있다. 고유한 결과물과 고유한 지식에 부합하는 이전에 확립된 지식을 찾기 위해 가족 및 커뮤니티 기록 보관소뿐만 아니라 삶의 특정 영역과 관련될 수 있는 역사적 문서를 조사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종속적 지식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 설명을 확립하고 이러한 지식의 미래 수행과 유통을 위한 공간이 어떻게 열릴 수 있는지에 대한 추측을 유도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의 독특한 투쟁의 역사를 인식하고 자신의 삶과 관계 구성에 이러한 지식을 더 명확하게 포용할 수 있다. 따라서 치료에서 사람들이 이러한 고유한 지식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푸코가 말한 것처럼 "정복된 지식의 반란"을 목격할 수 있다.
6) 구어 전통 및 문어 전통: 차이점
이 장에서는 특히 텍스트 유추와 푸코의 사유 체계의 역사,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러한 발전이 일반적으로 치료라고 불리는 활동과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사회 이론의 최근 발전에 초점을 맞추었다. 서구 문화에서 제도화된 치료의 수단은 주로 주로 구술이지만, 이 책에서는 주로 문어적 전통을 강조한다. 이를 구술적 전통과 간단히 구분해 보겠다.
분명히 말과 글은 다르다. 역사적 의미에서 구어가 문어보다 앞섰고 문어가 구어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문맹률이 높은 사회에서는 두 전통이 독립적인 형태로 발전해 왔다는 사실도 입증할 수 있다. Stubbs(1980)는 문어와 구어의 구체적인 구분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문자 언어는 음성 언어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두 시스템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자율적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사실에서 분명하다.". 문자 언어의 여러 형태와 음성 언어와의 다양한 관계를 검토한 후,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우리는 적어도 일부 사람들에게는 고도로 문맹인 공동체에서 구어와 문어 사이의 연결이 현저하게 약화되고 문어 형식이 이차적 성격을 잃고 독립적이고 일차적인 성격을 더 많이 얻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구어와 문어의 "진리" 상태와 상대적인 성공 여부는 어느 정도 해당 활동 분야에 따라 달라진다. 물론 우리 사회의 많은 공식 영역에서는 "흑백black and white"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권위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다른 환경에서는 "믿을만한 사람으로부터 직접 듣는다.I will only believe this when I hear it from the horse's mouth"는 말이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화에는 글쓰기 차원의 중요성을 강화하는 일반적인 메커니즘이 작용하고 있다. 많은 상황에서 글쓰기는 들리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라는 사실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권위를 얻는다. 서구 세계에는 다른 감각보다 시각을 우선시하는 오랜 전통, 즉 "시각 중심주의ocularcentrism"의 전통이 존재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에 대해 특별한 신뢰와 믿음을 두는 것은 문화적 관습이다. 이는 '지식 가능성knowledge-able-ness'을 사람에게, 그리고 아이디어에 대한 적절성을 부여하기 위한 형용사 목록에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부여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형용사는 주로 시각적이지만, 독점적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정당한 지식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통찰력 있다", "지각적이다", "선견지명이 있다"로 간주된다. 반대로, 이러한 자질이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눈이 멀었다" 또는 "근시안적이다"로 간주된다. 그리고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아이디어는 "깨달음 illuminating", "깨우침 enlightening", "비전적"으로 판단되는 것들이다.
6-1 문어적 전통
Stubbs (1980)는 글쓰기 시스템의 기여를 검토하면서 이러한 시스템을 가진 사회가 "생각을 크게 촉진하는 새로운 지적 자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l. 각 세대는 더 이상 처음부터 시작하거나 이전 세대가 기억하고 전달할 수 있는 것에서 시작할 필요가 없습니다.
2. 글쓰기는 "기록된 지혜의 축적"을 가능하게 합니다
3. 글쓰기는 "연구하고 비판적으로 고찰할 수 있게 하며, 이는 더 많은 발견으로 이어지게 한다"는 형태로 결과를 기록할 수 있게 해줍니다
4. 문자 언어의 정보 내용은 더 높고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5. 글쓰기는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를 극적으로 변화시키고 사고의 독립성을 촉진합니다. "아는 사람 없이도 책 속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지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제안된 장점들은 과도하게 사용되고 문화적으로 특정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독립적인 지식이 공동체 내에서 존재할 수 있으며, 스토리텔링의 전통과 노래와 춤의 매개체를 통해 다른 수단을 통해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예를 들어, 호주 원주민들의 많은 지식은 노래 가사에 존재했으며, 이를 통해 그들은 세대에 걸쳐 "그들의 세상을 노래를 통하여 존재하게" 하였다(Chatwin, 1988).
그러나 Stubbs 의 발견이 어느 정도 민족 중심주의를 반영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우리 문화에서 치료에서 쓰기 전통written tradition에 의존하는 것이 국지적 대중적 지식의 형식화, 정당화, 지속성, 개인의 독립적인 권위, 새로운 발견과 가능성의 출현을 위한 맥락의 창출을 촉진한다는 명제에 대한 지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6-2 문어적 전통과 시간
자신의 삶에서 변화를 지각하고 - 자신의 삶이 진행됨을 경험하고 -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 시간에 따른 일관된 연속적 배열coherent sequences의 맥락에서 자신의 삶의 사건을 계획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mechanisms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변화를 감지하는 것은 의미의 수행과 삶에서 개인적 대리인의 경험에 필수적이며, 이러한 변화 감지는 시간에 대한 선형 개념의 도입으로 인해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료적 세계에서는 시간적 차원이 많이 간과되고 있다.
"시간을 선형적으로 개념하려면 사건의 연속을 기록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점과 글쓰기가 이러한 기록을 제공하는 데 이상적이기 때문에, 글쓰기 전통은 시간의 선형 개념을 도입하고 따라서 우리 삶에서 의미를 생성하는 데 중요한 수단 중 하나로 보일 것이다. 치료를 원하는 사람들은 종종 변하지 않는 삶에 개입할 수 없는 무능력을 경험한다; 그들은 새로운 가능성과 대안적인 의미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따라서 경험을 시간적 차원으로 지도그리기 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 기록된 전통은 치료로 정의된 활동에 많은 것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6-3 정보의 조직
Chafe(1985)는 초점 의식focal consciousness에 의해 부과되는 한계 측면에서 구어와 문어를 구분하면서 "아이디어 단위"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아이디어 단위는 특정 시점에서 수집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을 수정하고 제한하는 개인의 단기 기억 능력의 정도를 나타낸다:
... 아이디어 단위는 특정 시간에 단기 기억에 담긴 내용을 표현하며, 단기 기억에는 약 7단어의 영어로 편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정보가 대략적으로 포함되어 있으며, 단기 기억의 내용은 약 2초마다 변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p. 106)
Chafe에 따르면, 문자 언어는 "초점 의식의 제한된 시간적 및 정보적 능력"에 의해 확립된 제약에서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의를 많은 양의 정보를 돌아다니며 언어 자원의 보다 신중한 조직에 집중할 시간"을 가지고 있다. 또한, 아이디어 단위의 정보 내용을 크게 증가시킬 수 있는 메커니즘과 이러한 아이디어 단위가 다양한 "의존 관계"에서 재구성될 수 있는 메커니즘도 제공한다.
따라서 Chafe의 노선을 따라 우리는 치료에서 쓰여진 쓰기 전통의 도입을 주장할 수 있다. 이는 언제든지 단기 기억에서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확장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보다 "언어 자원의 신중한 조직"과 "아이디어 단위"를 다양한 "의존 관계"로 재구성할 수 있다. 즉, 글쓰기는 정보와 경험의 배열을 결정하고 사건과 경험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생성하는 데 있어 사람들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하나의 메커니즘을 제공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글쓰기의 유용성에 관한 이러한 의견은 독자에게도 작가에게도, 치료사에게도 치료를 원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결론
나는 사회 이론의 최근 발전에 대한 개요를 제시하고, 텍스트 유추와 푸코의 사상에 주목하며, 이러한 아이디어에 기반한 치료법의 형태에 관한 다양한 제안을 상세히 설명하고, 치료에 문자언어 메커니즘을 통합할 것을 주장했다. 이 마지막 제안은 결코 새로운 제안이 아니다. 이 주제를 다루는 문헌은 이미 존재한다. 여기서 요약하려고 하지는 않겠다. 이 문헌을 탐구하고자 하는 독자들은 Burton의 "심리치료에서 문자언어 생산의 사용"(1965)에서 시작할 수 있다.
구어 전통 및 문자언어 전통에 관해서는, David과 나는 의식적으로 이 두가지 전통의 우열을 평가하지 않지만, 우리의 작업에서 구어적 전통을 존중한다. 우리는 도움을 요청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지만, 새로운 이야기의 문자언어 기록을 공동으로 작성하는 과정에서 모두에게 글을 쓰게 하는 데 참여시키지 않았다. 시간의 압박은 종종 문자언어 전통에 대한 의지를 제한한다. 그러나 이 책을 쓰면서 이 전통의 장점을 검토할 때, 우리는 시간이 종종 그렇게 결정적인 요소가 되는 방식으로 조직되는 것이 현명한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