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맨체스터 바이 더 씨(2017)
기쁨, 슬픔, 성취감, 행복, 우울, 설렘, 분노...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은, 형형색색의 점이 되어 ‘인생’이라는 그림을 그려낸다. 그랑자트 섬의 한가한 오후를 그려낸 쇠라의 작품처럼, 우리 모두의 삶은 감정의 점묘법으로 빚어낸 한 편의 걸작인 것이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다보면 때때로 쓰고 싶지 않은 색으로 인생을 덧칠해야만 할 때도 있다.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상실’이라는 너무도 힘겨운 점을 한없이 캔버스에 찍어대고 있는 한 이방인의 감정을 고요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주인공 리의 삶은 아름다웠다. 우애 깊은 형, 귀여운 조카, 사랑스러운 아내, 그리고 자신의 삶의 전부였던 3명의 아이들까지. 소중한 사람들과 소소한 행복들을 공유할 수 있었던 맨체스터라는 작은 항구 도시는, 그의 인생을 아름답게 채색할 수 있는 훌륭한 작업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술에 취해 피운 벽난로의 불꽃은 그의 모든 것들을 앗아간다. 화마는 그의 두 딸과 아들, 그의 집, 그리고 그의 ‘작업실’마저 송두리째 불태워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리는 이방인이 된다. 그의 아내로부터, 이미 사라져버린 아이들로부터, 맨체스터라는 도시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원망과 오해, 그리고 죄책감 때문에 그는 타의적으로, 그리고 자의적으로 이방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그가 인생을 채색하는 작업실은 빈 방에 놓여 있는 고흐의 의자처럼 고독하고 협소해진다.
그렇게 맨체스터를 떠나 ‘상실감’에 한없이 침잠하여 살아가던 리에게, 갑자기 ‘상실의 공간’인 맨체스터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생긴다. 리의 하나 뿐인 가족인 형 조지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조지는 자신의 죽음으로 리를 맨체스터에 불러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를 맨체스터에 붙들어 두려고까지 한다. 조지가 그의 아들인 패트릭의 후견인으로 리를 지목했기 때문이다. 그는 동생의 마음 속 상실의 공간인 맨체스터가 다시 행복의 공간으로 변화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형의 장례식을 준비하면서 패트릭과 함께 맨체스터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 리는, 언제나처럼 무덤덤하고 고요하게 일을 처리해 나간다. 형의 시신을 보며 요란스럽지 않게 슬퍼하고, 패트릭이 갑작스러운 아빠의 죽음으로 혼란스러워 할 때에도 무던히 옆을 지켜준다. 하지만 잔잔한 그의 겉모습과는 달리, 그의 내면은 계속되는 투쟁 때문에 소란스럽고, 동시에 고통스럽다.
이 작은 마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공기 한 줌, 흙 한 톨마저도 그 날의 사건을 상기시키기에, 그는 끊임없이 떠오르는 기억과 결투를 벌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맨체스터에 머물고 싶어하는 패트릭을 위해,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이방인으로 살아가지 않기 위해,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겨운 노력을 이어나간다. 그러나 그 사건을 함께 겪고도 아직 맨체스터에서 살아가고 있던 랜디가 그의 앞에서 눈물을 쏟아낸 순간, 리는 허물어진다. 아니,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I can’t beat it.” 리는 이 말을 끝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의 상처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은 누구나 상실의 아픔을 떠안고 산다. 회복이 잘 되든 안 되든, 모든 상실은 그들의 마음에 점으로 칠해져 지워지지 않는다. 인생이라는 그림에 상실의 점이 항상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리와 같은 이방인이 아닐까. 이방인들이 매일 그려나가는 그림으로 채워져가는 이 세상은, 매일 새로운 걸작이 전시되는 거대한 미술관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