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슈에뜨 La Chouette Sep 15. 2020

버려지는 것들을 구제해주고파!

아름답지 않아도 의미가 있음을...

엊그제 프란체스코에게서 연락이 왔다, 사과 딸 때가 되었으니 오라고. 그래서 어제 일요일, 만사 제쳐놓고 멀리 랭리까지 가기로 했고, 아침부터 기대에 차 올랐다. 안 그래도 핸드폰에서 작년의 추억이라고 사과 따기 사진이 떠올라서 가고 싶어 하고 있던 참이었다.


작년에 브런치에다가 야채 사러 간다며 글을 썼는데, 그때에도, 두 주후에 사과 따러 갈 거라고, 가서 따오면 애플 사이다와 애플 사이다 식초 만들 거라고 자랑했건만, 너무 정신없이 바빠져서 그만 그 이후 글을 하나도 못 올렸었다. 그래서 도대체 당시에는 뭘 적었었나 잠시 소환해보았다. 이 링크의 스토리 맨 끝에 신이 나서 다음을 기약했는데, 그러고 벌써 일 년이 지났구나.


작년에 포스팅하지 못하고 핸드폰에 남아있던 사진들이 아쉬워서 모아보았다. (어쩌면 작년과 올해 사진이 이리도 비슷한지! )




프란체스코는 우리가 가끔 야채를 사 먹는 농장 주인이다. 올해에는 주먹만 한 마늘을 거기서 사 왔다. 우리가 키운 마늘의 세배 정도 크기는 되는 것 같다. 우리 집 마늘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아무튼, 마늘도 사고, 남편이 좋아하는 블루 포테이토도 사는 곳인데, 올해는 이 파랑 감자는 없다고 해서 남편이 아쉬워했다. 남편의 특별한 추억이 있는 감자이다.


인심 좋은 프란체스코는 작년에도 사과를 나눔 해줬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과가 속에서부터 벌레가 먹어서 판매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할 텐데, 유기농으로 농약 하나도 안 치고 키우는 프란체스코는 전업 농부도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그렇게 깊게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작년에 이어서 올해에도 사과는 판매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누군가 따서 활용하지 않으면 버려지게 될 사과들. 그것은 농부에게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리라. 나무에 가득 열렸는데, 하나같이 안 좋은 흔적이 있다. 일명 못난이들이다. 베물어 먹기에도 불안하긴 하다. 안에 벌레 알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속이 멍든 가여운 사과


프란체스코는 식초를 만들고 있는데, 너무 많아서 식초에 치일 지경이라고... 그래서 우리도 식초 만들려면 가져가라고 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저장식품 만들기 좋아하는 남편은, 식초는 만들어 본 적이 없었지만, 애플사이더와 와인, 맥주 등을 직접 만든다. 워낙 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와인도 직접 만들지 않으면 와인 값이 진짜 많이 들 거다. 하하! 그리고 모든 음료를 다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전에도 애플사이더를 만들었던 적이 있었고, 사실상 만들다가 공기가 들어가서 실패하면 그게 식초가 된다고 했다. 게다가 작년에 신혼여행 다녀온 직후였기 때문에,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애플사이더를 맛보고 와서 우리는 더욱 고무된 상태였다.


그래서 작년에 가서 사과를 잔뜩 따 와서 식초와 애플사이더를 만들었는데, 그 글을 포스팅하기도 전에 일 년이 지나버리고, 또 사과를 따러 가게 된 것이다. 이 만드는 과정은 몇 달이 걸리기 때문에, 이번에는 더 기다리지 말고, 작년에 만들었던 사진들로 식초 만들기 소개 글도 조만간 적어야겠다.


그렇게 만든 사과식초는 식구들도 나눠주고도, 우리도 일 년간 잘 먹었으며, 애플 사이다는 그리 양이 많지 않아서 진작 다 먹었지만 진짜 맛있게 잘 되었다. 몇 병 남겨서 지난번에 프란체스코에게 가져다주었는데, 정말 맛있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판매되는 애플 사이다나 식초에는 이스트라든지 설탕이라든지 기타 첨가물이 흔히 들어가는데, 우리는 정말 다른 것 아무것도 안 넣고 사과만 가지고 만들어서 진짜 맛이 깔끔하다. 





45분 정도 걸리는 도로를 달리며 창밖을 내다보니 정말 상황이 좋지 않구나. 국경 바로 넘어 미국 워싱턴주에 산불이 나서 그 연기가 여기까지 번졌는데, 정말 공기가 나빴다. 100미터 거리도 선명하게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폐에 안 좋다고 하고, 실제로 재가 물건에 쌓이는 지경에 이르렀건만, 그렇게 흔하디 흔한 밴쿠버 비는 어디로 갔는지 도통 나타날 기색이 없었다. 


언제나 정겨운 그의 집 그네, 저 뒤쪽으로 다친 사과나무가 보인다.


도착하니 프란체스코가 나와서 반겨주었다. 남편은 감사의 뜻으로 집에서 만든 와인을 몇 병 챙겨가서 건네주었다. 한 병이면 되는데 왜 이렇게 많이 주냐며 사양하는 프란체스코. 우리는 이 사과가 정말 고마워. 


사과나무는 여러 그루가 있었지만 그중 두 개를 지정해주었다. 나머지는 아직 안 익었다고 했다. 사과가 가득 달려있는 나무를 보니, 두 그루로 이미 충분해 보였다. 이렇게 많고 탐스러운 사과들이 다 판매할 수 없는 것들이라니 보기만 해도 안타까웠다.


왼쪽사진: 가지마다 빽뺵한 사과들. 오른쪽 사진:사과 아래에 매달린 달팽이!


우리는 준비해온 박스를 옆에 두고 사과를 열심히 따기 시작했다. 빨갛게 익은 사과들이 너무나 탐스러웠다.


그리고 사과나무를 달팽이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사과 잎이나 사과에 의외로 달팽이가 많았다. 남편은 주로 높은 가지 쪽을 땄고, 나는 오히려 아래쪽에서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땄다. 사과나무 하나를 땄는데 이미 박스 5개와 종이봉지 2개가 가득 찼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의 나무에서 종이봉지 3개를 채웠다. 우리가 원해서 사과를 가져가는 것도 이유지만, 이왕 따는 것, 나무를 깨끗하게 정리해주고 싶어서 꼼꼼히 땄다. 


그 많던 사과는 어디에?


두 번째 나무는 일부가 손상되어있었는데, 그 부분에도 사과가 익은 채 여전히 매달려있었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들도 대부분 갓 떨어져서인지, 나무에 달려있는 것이나 별반 품질이 다르지 않았다. 



30분 정도 소요된 거 같았다.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하니 우리는 다시 내년에 만나게 될 것이다. 프란체스코는 곧 마늘을 심을 거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다음 달에는 마늘을 심어야지.


차에 한가득 사과를 싣고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집으로 출발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는 사과 향기가 가득해서, 먹지 않아도 이미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는 길에는 잠시 화원에 들렀다. 최근에 창문을 바꾸면서, 침실 창밖에 꽃박스를 놓기로 했는데, 그 박스를 받칠 지지대가 필요했다. 마침 아트냅스 화원에서 지지대를 50% 세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구매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사실 화원은 우리 부부에게 아주 위험(!)한 곳이다. 한 가지 필요한 게 있어서 가더라도, 꼭 바리바리 잔뜩 사들고 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화원은 겨울에 완전히 문을 닫게 되어서 상시 세일 품목이 있기 때문에 더욱 주의해야 한다. 그래도 다행(?)히 별로 쓸만한 세일 품목이 없어서 가게를 무사히 빠져나왔다. 이 화원은 값이 비싼 편이어서 세일을 많이 하지 않으면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곳이긴 하다. 


계산을 하고 나와서 차에 막 올랐는데, 주차장 한쪽 구석에 있는 커다란 쓰레기통에 한 점원이 뭔가를 버리고 간다. 선명한 노란색이, 살아있는 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가? 화병에 꽂혔던 꽃일지도 모른다며 그 앞에 다가가 차를 세우고 봤더니, 방금 화분에서 뽑아낸 국화와 팬지꽃이었다. 세상에! 불쌍하기도 하지! 아직도 꽃이 많이 피어있던데!


체면이고 뭐고 없이 집어 들어 차에 실었다. 마침 차에 사과를 담고 남은 봉지가 있어서 두 군데에 나눠서 담았다. 국화 4개와 팬지 한 큰 덩어리였다.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서 장을 약간 봤는데, 내 마음은 온통 쟤네들을 살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아직 한참 멀쩡해 보였는데, 이왕이면 $1 파격 세일... 이런 식으로라도 팔지 왜 저렇게 버렸을까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까웠다.  


집에 오자 남편은 사과를 정원의 연장 창고에  넣기 시작했다. 당장 작업에 들어갈 것도 아니니 서늘한 곳에 보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차곡차곡 쌓아 놓고 나니 너무나 뿌듯하다. 넣자마자 벌써 창고 안이 향긋해졌다.



나는 봉지를 열어 화초들을 꺼냈다. 먼 길을 다녀왔더니 피곤하기도 하고 출출하기도 해서 당장 뭔가 하기는 힘드니, 일단 물에 담가 두고 생각하기로 했다.  국화 꽃대가 많이 부러진 것도 있었지만, 내 목표는 당장 꽃을 보기보다는 어떻게든 살리는 것이니, 어쩌면 꽃이 좀 없는 게 생존전략에는 더 좋을지도 모른다. 팬지는 하나의 화분에서 나왔지만, 생각보다 많았다. 





간식을 먹으며 고민한 결과, 국화는 뒷마당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심어줬다. 최근 들어 이쪽에 지저분한 것들을 정리하고 예쁜 꽃을 심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마침 이 국화를 만나니 여기가 딱 제자리인 듯싶었다. 흙이 대부분 모래같이 별로 좋지 않은 곳인데, 이 환경에서 잘 자랄지, 이 국화는 다년생인지 일년생인지 아무 정보가 없지만, 그래도 쓰레기장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것보다는 이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



팬지는 앞마당에 심어줬다. 앞쪽 다년생 화단에 있던 보라 꼬마 팬지들이 콩벌레의 공격을 받아서 너무나 초라해졌는데, 그 사이사이에 심어주면 서로 의지가 될 거 같았다. 심어놓고 나니 화단이 훨씬 화사해졌다.



이 날은 뭔가 구제하는 날이었나 보다. 사과는 비록 많이 멍든 모양새이지만, 공들여 식초와 사이다를 만들면 어차피 건더기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 데다가 발효시켜 나쁜 균을 다 죽이기 때문에 아무 상관이 없다.  그리고 이 꽃들은 앞으로 어떻게 자리를 잡을지 모르지만, 그냥 소박하게 우리와 함께 가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어 보인다. 



마트에서 파는 물건들 중에서  NNNI라는 표시가 적혀있는 상품들이 있다. 발음도 안 되는 이 이상한 표기가 처음에는 뭔지 몰랐는데, NO  NAME® NATURALLY IMPERFECT의 약자란다. No Name은 저가 브랜드 상표이고, 그 뒤의 설명, 자연 그대로 불완전하다는 이야기다. 즉,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고, 못난 것도 있고, 그런 것들이 섞여있어서 가격이 저렴하다는 얘기다. 못 생겨도 먹는 데 전혀 지장 없는 과일들. 버려지지 않고 소비자를 찾아와주니 고맙다.




모두가 다 아름다울 수는 없다. 하지만 화려하지 않아도 좋다. 모두 공평하게 무시받지 않고 기회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과일이나 꽃뿐만 아니라 사람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