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국에서 프렌치 풀 코스까지 섭렵한 생일
지난주 수요일이 내 생일이었다. 중요한 기념일들을 잘 챙기는 남편이 이 날을 그냥 지나갈 리 없다. 미리부터 생일에는 뭐 해주려냐고 물었다. 사실 나는 이제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었다. 이미 크리스마스와 신년에 선물 폭탄도 받았기에 새삼스럽게 뭐가 필요하겠는가! 게다가 내가 사랑하는 두 사람이 나와 함께 살고 있는데, 이미 그것이 내겐 축복이다.
하지만 남편은 생일상을 항상 의미 있게 준비하고자 하고, 그의 아이들 생일도 늘 집에서 본인들이 원하는 콘셉트로 준비를 해주는 사람이다. 이태리식 식사는 이미 지난번 캐나다 온 기념일에 먹었고, 그 이후에 크리스마스 때에는 거위와 여러 가지 만찬을 먹었고, 신년에는 한식으로 다시 잘 차려서 먹었으니 이번엔 무슨 식사를 할까? 결국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식으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거나하게 연달아 먹고 나서 다시 사흘 만에 상을 차리기보다는, 좀 미뤄서 주말에 재미나게 해 먹기로 했다. 그리고 남편은 메뉴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이번엔 내 생일상이니 딸내미까지 합세를 해서 두 사람이 내게 뭔가 비밀로 하고 쿵짝쿵짝 준비를 하는 것이 보였다. 처음엔 내가 물어도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아무 힌트도 주지 않았다. 뭐 특별하게 먹고 싶은 것이 있느냐고 묻긴 했는데, 뭐든지 준비되는 것은 다 좋아할 것이라고 답해줬다.
그리고 생일이 되었다. 자정을 치는 순간 생일 축하를 해주고, 아침에 눈 뜨자마자 생일 축하 인사를 해주는 남편. 나는 다시 늦잠을 잤고, 더 자고 나왔더니 딸아이가 축하를 해줬다.
비록 생일상은 주말에 차려도 미역국은 당일에 먹는 게 좋지 않느냐며, 점심때 끓여주려나고 묻는데, 이왕이면 저녁에 끓여서 다 같이 먹자고 했다. 그래서 딸아이는 미역을 물에 불린다고 담가놓았다.
그리고 오후 1시가 되자 꽃배달이 왔다. 남편이 미리 예약해놓았던 꽃다발이었다. 정성껏 밑에 물이 담겨서 안전하게 배달되었다. 화사한 색감이 벌써 봄을 부르는 듯 달콤했다.
저녁때가 되어 가는데 잠시 눕는다던 딸이 소식이 없었다. 방에 가보니 자고 있었다. 가다가다 한 번씩 이렇게 앓곤 하는데, 이유 없이 아프면서 특히나 위장이 탈을 부리면 정말 꼼짝없이 그렇게 앓아야 한다. 눈을 뜨더니 엄마 미역국 끓여야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울상이 되었다. 그냥 내가 끓이면 된다고 했더니, 남편이 자기가 끓이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벌써 인터넷을 검색해서 Korean Birthday Soup 레시피를 찾아놓았다!
미역 150g... 등등의 계량이 나오는 것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생전 미역국을 계량하며 끓여 본 적이 없었으니 그런 레시피는 참으로 생소해 보였다. 어차피 딸이 미역을 불려놓았고, 냉장고에는 국거리 고기도 있으니, 내가 간단하게 설명을 했고, 남편은 어렵지 않게 미역국을 뚝딱 끓여냈다. 이렇게 해서 남편은 한국 요리도 등극을 하게 되었다! 난 옆에서 호박전 고구마전을 부치고, 신년 때 부쳐놓은 녹두전도 데웠다.
남편은 딸아이 방에 다녀오더니, 저녁을 거기서 먹자고 했다.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했더니, "You know what? People love you."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잖아... 하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더니 남편은 얌전하게 쟁반에 밥과 국, 반찬을 담아서 딸아이가 누워있는 방으로 배달을 했다. 바닥에 앉는 것이 불편한 남편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곳에서 식사를 했다. 심지어 디저트까지 거기서 마무리!
딸은 비록 식사는 못 하지만, 함께 장단을 맞추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활짝 웃으며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남편과 딸이 합작으로 끓여준 미역국은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다. 이 이상 바랄게 뭐가 있겠느냐만, 더불어 선물도 열었다. 내가 방에 퀼트를 걸고 싶었는데, 핀으로 대충 꽂았더니, 남편은 그게 마음에 걸려서 퀼트를 거는 전용 봉을 장만했다. 두 가지를 구입해서 원하는 것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래서 당장 가서 퀼트를 제대로 걸었다.
딸아이는 내가 전부터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숫돌을 줬다. 나는 힘이 부실해서 칼이 무디면 억지로 힘주다가 손을 잘 베인다. 남편은 힘이 세니 별 불편을 못 느끼는 것 같지만, 나는 쨍하게 날카로운 칼이 좋다. 그런 칼날은 숫돌 아니면 사실 안 된다. 그런데 드디어 내 손에 근사한 숯돌이 들어왔구나! 이제 우리 집 칼들은 내가 접수한다!
한국에서도 페이스북에서도 여기저기 생일 축하 메시지가 들어온 왁자지껄한 생일은 그렇게 지나갔지만, 우리 집에서는 그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내 생일 파티 준비가 시작되었다. 딸과 남편이 쿵짝쿵짝해서 만들어낸 이번 메뉴판은 아주 아티스틱 했다. 딱 어울리는 이미지를 찾아서 삽입했고, 메뉴도 무척이나 화려하게 계획되어 있었다. 남편은 메뉴판을 내게 보여주며 틀린 불어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도 드디어 생일 놀이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약간의 단어 수정이 이루어졌고, 나는 기꺼이 중간 입가심인 소르베(Sorbet)를 만들기로 하였다. 소르베나 셔벗이나 샤베트나 다 같은 것인데, 어쩐지 소르베라고 하면 더 럭셔리한 느낌이 드니, 이것은 프랑스어가 주는 그 느끼함이리라.
전체 코스 중에서 딸은 전식인 달팽이 요리(Escargots à la Bourguignonne)와 마지막 디저트인 크레페 케이크(Gateau de Mille Crêpe)를 만들기로 했고, 나머지는 남편이 하기로 했다. 그중에 관자요리(Coquilles St. Jacques à la Provence)와 돼지고기 로스트(Rôti de Porc Poêlé avec Sauce Moutarde à la Normande)인 메뉴만 봐도 벌써 프랑스에 와 있는 기분이 드는 코스였다.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소고기와 거위요리를 먹었으니, 오랜만에 돼지 요리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은 딸의 제안이었다.
금요일이 되자 남편이 퇴근길에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을 장을 봐 왔고, 싱크대에 늘어놓으면서 준비를 시작했다. 딸은 후식으로 만들어질 크레페 케이크의 반죽을 미리 해서 냉장하였고, 남편은 재료를 손질한 후, 요거트 딜 크림소스를 만들어서 짤주머니에 담아두었다. 나는 레몬을 짜서 셔벗을 냉동실에 얼렸다. 딸아이는 밤 열두 시에 불현듯, "아, 달팽이 요리용 버터를 미리 만들어서 숙성해야 하는데 까먹었네요!" 라며 부엌으로 나와서 급히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이 버터는 마늘과 샬롯과 파슬리 등등을 섞은 우리 딸의 특별 레시피로 제작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하루 전에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기대에 찬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당일 아침, 들뜬 마음으로 일어나야 했지만, 남편은 새벽에 갑자기 컨디션이 떨어졌고, 우리는 그렇게 잠을 설쳤다. 그리고 남편은 오전 내내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심장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가끔 있는 일인데, 그 약을 끊고는 그런 일이 처음 있어서 걱정이 되었다. 오후가 되어도 남편은 계속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생일은 어차피 지났으니 디너는 하루 미뤄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 사이에 딸은 원래 생각했던 재료가 없는 것을 몰라서 다른 재료로 크레이프를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새로이 반죽을 만들어서 냉장실에 숙성하게 넣어두고는 쉬러 갔다. 남편은 점심도 못 먹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갑자기 저녁 식사 가능 여부가 모호해졌다. 나는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수업 때문에 오후가 될 때까지 컴퓨터 앞에서 무척 바빴다. 수업 신청한 사람들 중에서 연락이 없는 이들을 체크하고, 보내야 할 자료들을 챙기느라 시간은 정말 빨리 흘러갔다. 생일 파티를 과연 할 수 있을지...
나는 식구들을 기다리며 빵을 구울 준비를 했다. 원래 남편이 바게트를 사러 나가겠다고 했었으나, 바게트가 필요하면 내가 글루텐프리로 굽겠다고 말하고 빵 반죽에 돌입했다. 어차피 밖에서 사 온 바게트는 남편이 먹지 못하니, 이왕이면 같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사실 이 생각을 미리 했다면 하루 전에 반죽을 해놓았으면 더 잘 나왔을 텐데, 방금 발효된 이 레시피의 반죽은 그리 흡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없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식구들의 휴식이 끝나면서, 우리의 저녁 준비는 오후 4시경부터 슬슬 가동되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편은 컨디션이 괜찮다며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1차 발효가 끝난 빵 반죽을 그대로 엉성하게 성형해서 오븐에 넣었다. 원래 무반죽 빵은 이 상태로 냉장했다가 다음날 구우면, 성형도 쉽고 빵도 맛있게 되는데 아쉬웠지만, 그래도 굽고 나서 맛있는 것에 곁들여 먹으면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바게트 모양의 내 맘대로 빵을 구웠다. 내 빵이 오븐에서 나오고 남편의 돼지고기가 오븐으로 들어갔다.
딸아이도 다시 기운을 차리고 방에서 나와서 새 반죽의 크레페를 부쳐내기 시작했다. 새로 만든 반죽은 만족스러웠다. 십 년 전에 해보고 처음 하는데, 능숙한 손놀림으로 금세 뚝딱뚝딱 크레페를 제작해냈다. 크레페는 부침개처럼 반죽을 넣고 문질러 펼치면 안 된다. 오로지 팬을 돌려서 마치 팬에 반죽을 한 겹 바르듯이 해야 한다. 이 크레페 케이크의 이름이 Gateau de mille crepes 이니까, 1000장의 크레페를 쌓아 올린 케이크라는 뜻이고, 그만큼 많은 크레페를 부쳐야 한다.
두 사람은 분주히 주방 안을 날아다녔다. 우리 세 식구는 모두 딸아이가 디자인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그래서 마치 무슨 파티 전문업체에서 나와서 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준비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준비된 것들이 부엌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시작 전부터 군침이 돌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프랑스식의 코스에서 빠질 수 없는 치즈 코스를 위해서, 다양한 프랑스 치즈가 준비되었다. 우리 식구들은 모두 치즈를 좋아해서 블루치즈까지 완벽하게 준비된 상황이었다.
이제 세팅을 시작하고 본격적인 식사에 돌입할 시간이 되었다. 다이닝 테이블에 진작에 기본 애피타이저 상차림을 해놓은 것을 보았는데, 다시 나가봤더니 어느새 못 보던 꽃까지 놓여있었다! 내가 생일 때 받은 꽃을 상에 놓으려고 했더니 남편이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하길래 왜 그러나 했는데, 이런 준비를 미리 해놓았었구나!
연분홍 큼직한 장미가 연분홍 테이블보와 환상의 궁합을 보여주고 있었고, 프랑스 샹송들이 흘러나왔다. 난 참으로 무뚝뚝한 사람으로 살아왔는데, 남편은 나로 하여금 한없이 로맨틱한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첫 번째 코스는 Amuse Bouche 또는 Mise en Bouche라고 불리는 코스이다. 이름하여, 입을 즐겁게 하는 한입거리로, 식사에 대비해 입과 위를 준비시키는 과정이라 하겠다. 그래서 한입에 먹을 수 있는 작은 것이 준비되는데, 이번 디너에는 이름도 너무나 긴 연어 카나페(Bouchées de Saumon Fumé au Concombre avec Fromage à la Creme au Citron et à l'Aneth)가 마련되었다.
준비가 완료되자 남편은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고 등장했고, 나와 딸도 얼른 갈아입었다. 이 코스는 보통 그냥 서서 먹는다. 색감을 생각해서 로제 스파클링 와인이 함께 제공되었다. 오이를 얇게 슬라이스 하고, 집에서 훈제한 연어를 그 위에 얹은 후, 크림치즈와 레몬, 딜을 섞어서 만든 소스를 얹어서 상큼함을 살려줬다. 그리고 위에 신선한 딜을 꽂아서 눈도 입도 함께 즐길 수 있는 딱 한입짜리 음식이었다. 카나페는 흔히 과자나 빵을 얇게 썰은 것 위에 얹어서 나오기도 하는데, 이렇게 오이에 얹으니 느끼함 없이 상큼하게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다음 코스는 딸이 준비한 달팽이 요리(Escargots à la Bourguignonne)이다. 전용 용기에 재료를 담고, 바게트 빵도 따뜻하게 먹기 위해, 같은 버터를 발라서 함께 오븐에 넣었다. 지글지글 준비되는 동안, 다음에 함께 할 샴페인을 따는 남편...
로제는 어울리지 않으므로, 일반적인 색상의 스파클링 와인이 준비되었다.
이 달팽이 요리는 역시 메인 코스의 전 단계로, 식사로 들어감을 알리는 앙트레(Entrée) 코스이다. 앙트레는 불어로 입장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디너 테이블로 입장해볼까?
맘에 들게 구워지지 않았다고 투덜거렸던 바게트도 완전 맛있었고, 달팽이 요리는 두 말할 나위 없었다. 딱 적당히 씹히면서, 버터의 풍미가 입안 가득 퍼졌다. 딸의 버터소스는 실패없는 보장된 레시피다. 그리고 이번 바게트는 밀가루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도 함께 즐길 수 있어서 더욱 기뻤다.
벌써 살살 배가 불러오는 것 같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을 하고 우리는 분발하기로 했다! 다음 코스는 드디어 메인 코스 1차로 들어간다. 해산물(Fruit de mer) 코스이다. 불어로 해산물은, 바다의 과일이라고 부른다. 정말 낭만적인 프랑스 사람들이다! 이 코스에는 흔히 생선을 하지만, 지난 환영식 때 생선을 했으니 남편이 이번엔 관자로 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이름도 화려한 관자요리(Coquilles St. Jaqcues à la Provence)가 등장하게 되었다. 직역을 하자면 꼬끼유 생 쟈크라는 이 이상한 이름은, 관자를 일컫는 말로, 성 야곱의 조개라는 뜻이다. 성 야곱의 무덤인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불어로 생 쟈크라고 하는데, 그곳으로 향하는 순례자들이 믿음의 상징처럼 가리비 조개껍데기를 가지고 다닌 데에서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관자는 가격도 비싸고 귀한 음식이었기 때문에 보통은 전채요리로 제공되지만, 어차피 우리의 식사는 소량의 음식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본식에 넣었고, 프로방스 스타일로 조리되었다. 전분을 입혀서 살짝 익힌 후, 양파를 넣어 함께 볶고, 다시 치즈를 넣어 오븐에 굽는 다소 손이 가는 요리이다. 저 뒤로, 그다음 코스의 돼지고기도 살짝 보인다.
결론은 완전 성공적이었다. 관자는 입안에서 살살 녹았고, 그 위의 치즈와 부드러운 양파가 진짜 잘 어울렸다. 와인은 해산물에 걸맞게 화이트 와인인 피노 그리지오(Pinot Grigio)가 제공되었다.
우리는 이미 식사를 완전히 마칠 수 있을 만큼 배가 불렀다. 다음 코스를 계속 진행할 수 있을까?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프랑스 코스요리에는 중간에 소르베(Sorbet) 코스가 들어간다. 상큼한 레몬 소르베를 넣음으로써 소화를 돕고, 입가심을 해서, 1차 메인과 2차 메인의 맛이 섞이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
소르베에 들어가는 재료는 사실 별거 없다. 레몬주스와 물, 감미료가 전부다. 그러나 그 덕에 아이스크림 같은 무거운 맛이 없이 상큼하고 깔끔하게 입을 정리할 수 있다. 서빙하는 디쉬도 미리 냉장고에 넣어둬서 더욱 시원하게 즐길 수 있게 준비했다.
내가 매 코스마다 사진을 찍어댔더니, 남편도 사진을 찍겠다고 핸드폰을 들고 있는 장면이다. 딸아이는 장난스럽게 그런 그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다.
이제 입가심을 했으니 오늘의 메인 요리(Plat Principal)인 돼지고기 로스트(Rôti de Porc Poêlé avec Sauce Moutarde à la Normande)로 들어갈 차례이다.
부엌에서는 이미 고기가 다 익어서 레스팅 되어있었다. 원래 고기를 익히고 뜨거울 때 바로 자르면 육즙이 다 흘러나와버려서 퍽퍽하고 맛 없어진다. 따라서 다 익힌 후, 실온에서 잠시 기다리면서, 이글거리는 육즙이 다 고기 속으로 스밀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레스팅 시간이 필요하다.
고기를 굽 고난 냄비에는 나름의 육즙이 있는데, 거기에 발사믹 식초 및 몇 가지를 첨가하여 그레이비소스를 만들었다. 야채도 볶았는데, 카메라 스위치가 엉뚱한 곳으로 돌아가 있어서, 그 사진들은 하나도 못 건졌다.
고기는 정말 딱 맞을 정도로 익어서 부드러웠고, 그 위의 그레이비소스가 일품이었다. 함께 서빙된 꼬마 양배추와 파스닙도, 또한 옆에 놓인 비트도 색감과 맛이 다 잘 녹아들었다. 와인은 작년 가을 집에서 착즙 하여 만든 까베르네 쇼비뇽(Cabernet Sauvignon)을 3개월 만에 처음 개시하였다. 아직 상당히 젊은 맛이었지만, 포도의 풍미가 제법 들어있어서 우리의 저녁식사와 딱 어울렸다.
사실 그 전날 남편이 레드 와인 여러 가지를 늘어놓고 시음을 하면서 저녁식사용 와인을 골랐는데, 이게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선택한 것이었기에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쯤 되자 우리의 배는 더 이상 음식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어쩌지? 아직 코스가 두 개나 더 남아있는데! 사실 우리가 식당에서 메뉴 주문을 한다면, 애피타이저로 달팽이를 하나 시켜서 셋이 나눠 먹었을 것이고, 각각 하나의 메인 메뉴를 시키고, 그다음에 디저트를 시키거나 생략하거나 할 것이다. 사실 디저트도 하나 시켜서 나눠 먹는 일이 흔하고... 그런데 이렇게 풀 코스로 가자니 정말 배가 너무 부른 것이다.
기억을 돌이켜보면, 내가 처음으로 유럽식 풀코스를 먹은 것은, 자그마치 30여 년 전, 벨기에로 방학 프로그램 방문했다가 대학 은사님 댁을 찾았을 때였다. 당시에 지금 내 나이쯤이시던 교수님과 그 아버님이 함께 식사를 차리셔서 초대해 주셨는데, 주시는대로 받아먹다 보니 끝없이 음식이 나왔고, 나중엔 정말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더랬다. 우리의 이 생일 식사가 바로 그 상태가 된 것이다.
중간에 음악도 이것저것 듣고 장난하고 놀았지만, 결국 우리는 준비했던 치즈 코스를 포기하고 디저트로 곧장 넘어가기로 했다. "치즈는 어디 가지 않아. 내일 먹으면 돼."가 우리의 결론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딸이 준비한 크레페 케이크(Gateau de mille crepes)로 넘어갔다. 부드럽고 달콤한 디저트(Douceur) 코스를 건너뛸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 집에서는 원래 흔히 생일 축하 노래는 안 부르는데, 이번엔 촛불도 하나 켜고 노래도 불렀다. 남편이 케이크를 집어 들어 딸에게 건네주었고, 딸이 내게 내밀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나는 촛불도 불어서 끄고! 이례적인 행사였다. 딸이 여러 가지 디저트들을 다 놔두고 이 케이크를 만든 것에는 사연이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레시피 올리면서 새로 쓰겠지만, 십 년 전 아프던 내게 해줬던 케이크를 더 화려하게 변신시켜서 내게 돌려준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찡 하다.
마지막 케이크는 달콤한 디저트 술인 그랑 마니에르(Grand Marnier)와 함께 달콤하게 마무리하였다. 켜켜 사이마다 치즈 크림과 생크림이 번갈아 들어있었고, 얇게 썬 딸기가 청량감을 더해줘서, 아주 훌륭하고 부드러운 마무리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에 걸친 생일잔치가 끝이 난 것 같았지만, 어쩌면 생일잔치는 오늘까지도 진행 중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먹고 남은 음식들을 오늘까지도 먹었으니 말이다! 당일 디너 때에는 배가 불러서 포기해야 했던 치즈 코스 (Plateau de Fromage)는 바로 그다음 날 기어이 먹었다. 남아있던 연어로 연어 카나페도 다시 재현해서 말이다. 정말 축복 듬뿍 받은 생일이었다!
이제 당분간은 음식 파티는 좀 쉬어야 할 듯싶다. 물론, 쓰다가 만 크리스마스 포스팅과 신년맞이 포스팅이 완료되면, 그 안에도 음식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겠지만 말이다. 또한 오늘 적은 요리 중에, 쉽게 할 만한 것들은 레시피 매거진에 정리해서 올릴 것이다.
오늘의 먹방은 여기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