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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Feb 13. 2022

누구를 위한 학교일까?

주객이 전도되는 학교 행정

얼마 전, 예전에 내게 영어수업을 들었던 분에게 문자가 왔다. 


"잠시 통화 괜찮으세요?" 


진행 중인 수업에 관한 문의가 아니라며 멋쩍게 시작된 이야기는, 아이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캐나다에 온 지 2년, 아이는 아직 영어가 어눌한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말이 2학년이지, 한국에서는 1학년 나이이니 아직 마냥 어리다. 


영어를 대충 알아듣고 친구들과 놀기는 하지만, 제대로 읽기나 쓰기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 보니 ELL 클래스(영어가 어려운 아이들을 따로 관리하는 수업)를 듣는다고 했다. 문제는 아이가 그 수업을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데 있었다.


지난가을 어느 날, 아이가 밤에 엉엉 울면서 자기는 ELL 클래스에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이가 참여하는 ELL 수업이 둘이 있는데, 한 선생님과는 재미나게 잘 하지만, 다른 한 선생님은 무섭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틀리는 것을 무섭게 나무라고, 손으로 야단치는 제스처를 심하게 하여 아이에게 공포심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엄마는 담임선생님께 연락해서 아이의 사정을 말하고, 두 수업 중 하나만 들어도 되겠느냐고 여쭈었단다. 처음에는, 그러면 한 수업만 가고, 나머지 수업을 가는 대신 교실에서 신경을 더 써주겠다는 답변이 왔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문제의 그 선생님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는데,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다. 그 선생님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다음과 같이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두 개의 수업 중 하나만 듣는 것은 공평하지 않으며, 

그렇다면 두 개의 수업을 모두 빼야 합니다."


나는 이 말을 전해 듣는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내가 뭘 들은 거지? 공평한 것은 무엇이며, 이 수업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 걸까? 영어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 이 수업이 마련된 것인지, 아니면 직장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 이 수업이 있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되는 발언이었다.


그 선생님의 태도를 보아하니 왜 아이가 싫어했는지 알 수 있었다. 8살짜리 외국인 아이가 영어를 잘 못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원어민 아이들도 그 나이 때에 쓰기와 읽기는 못하는 일이 자주 있다) 그걸 지도하기 위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아이가 잘못할 때에도 인내심을 가지고 흥미를 갖게 유도하며 수업을 이끌어가야 한다.


자기 자식도 아닌데 그런 요구는 무리하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교사는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수업을 들었고, 그 일로 자격증을 딴 사람이며, 그것으로 월급을 받는다. 그렇다면 그 일을 잘해야 하고, 잘 안되면 잘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맞다.


이 문제를 나에게 의논한 그 지인은, 혹여 자신이 아이를 오냐오냐 받아줘서 버릇없게 만드는 것이 아닐지 고민스러웠다고 말했다. 부모라면 그 순간에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사태를 바라보는 것이 힘들 테니까.


아이가 뭘 안다고 아이 말만 믿느냐고 할 수도 있다. 아이가 거짓말을 한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가 두 선생님을 두고, 굳이 왜 한 선생님만을 모함할까? 본질이 사악해서? 그럴 리가 없다. 8살 어린 아이다. 아이가 그 선생님을 싫어하는 데에는 나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보인다. 물론 그 나이의 아이들은 거짓말을 시작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하지만 감정에 관해서는 여전히 아이들은 정직하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어른들보다 예리하기도 하다.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쉽게 느낀다. 저 사람이 나를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본능처럼 알아챌 수 있다. 


나는 교사를 폄하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니다. 나도 예전에 교사였었고, 나의 남편은 현재에도 교사이다. 남편은 수시로 분통을 터뜨린다. 바르지 못한 교사들이 아이들의 심성을 망치고 트라우마를 만들어내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남편이 있는 대안학교에까지 오게 된 아이들은, 놀랍게도 남편의 교실에서 너무나 얌전히 공부를 한다. 남편은 아이들을 통제하거나 벌을 주는 일이 없는데, 아이들은 자기가 할 공부를 알아서 찾아서 한다.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는 그 이유는, 그 아이들이 이 학교에서는 사람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리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 이 일은 그 학교 교장까지 동원이 되었는데, 교장 역시 같은 입장을 보였다고 했다. 그 선생님의 입장을 생각해서 그럴 수 없으니 그러면 두 수업을 모두 빼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이번 학기에는 빼주지만, 아이가 영어가 한 학기 동안 영어실력 향상이 안 될 경우, 새 학기에는 다시 그 두 선생님께 다서 수업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선생님의 입장은 고려가 되지만 아이의 입장은 고려가 되지 않는 처사였다. 그 아이는 영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고, 아이가 잘 따르는 선생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그 수업을 들을 선택권을 박탈당한 것이다. 왜 학교가 존재하는지에 혼란이 오는 순간이었다. 


정말 내 마음 같아서는 그 학교로 찾아가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따져 묻고 싶었다. 다만 그랬다가는 계속 그 학교를 다녀야 하는 아이가 난처해질 테고, 그 학교의 대처 방 안으로 봐서 아이에게 어떤 불이익이 가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순순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하는 수 없이 아이를 학교 ELL코스에서 꺼내고, 그 대신 집에서 영어공부를 시키기로 결정했다. 엄마표 영어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일반적으로 참 막막할 것이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어떻게 해야 집에서 영어 실력을 키울 수 있는지에 관해서 조언을 주는 것뿐이었다. 책도 추천해주고, 영상도 추천해주고... 아이가 흥미를 갖고 학습하고자 하는 의욕을 갖게 하는 방법이라든지, 아이를 어떤 식으로 유도하는 것이 좋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선생님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아이들의 학교 생활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우리는 그것을 온전히 운에 맡긴 채 끌려가야 하는 현실에 처해있다. 이것은 비단 이 학교만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아이를 학교에서 꺼내서 홈스쿨링을 했던 15년 전, 나는 한국에서 비슷한 고민을 했다. 3학년이 되어서 선생님을 극도로 무서워하던 아이는 그냥 보통 아이였다. 아이의 행동에 이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결국 그 트라우마는 나중에도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서 나를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그것 때문에 아이가 두고두고 심리적으로 많은 고생을 겪은 것을 생각하면, 한 학기나 시간을 끌면서 망설였던 것이 후회가 된다. 


물론 다행히도 모든 선생님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은 진짜 선생님들이 계시기에 세상은 돌아가는 것이리라. 그리고 운 좋은 아이들이 만나는 그런 선생님들 덕분에 아직도 학교는 버티고 있는 것이겠지.


그러나 이번 일을 접하면서, 역시 세월이 그렇게 흘렀어도, 그리고 우리나라보다 아이들을 더 존중한다고 생각하던 캐나다에서도 역시 행정 편의상 학교가 굴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학교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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