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슈에뜨 La Chouette Mar 05. 2022

존경을 요청하면 받을 수 있나?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들,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어른들은 흔히, 아이들은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다 보니 옆에 멀쩡히 세워놓고서도 하면 안 될 말들이나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아무 내색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 듣고 보고 있다. 그래서 "금쪽같은 내 새끼"같은 프로그램에 나오는 아이들이 이상 징후를 보이기 직전까지 어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 어른들은 모르고, 아이들은 알고 있다. 아이들은 마치 몰래카메라처럼 어른들을 관찰한다. 그들의 눈에는, 어른들은 무척 크고 대단한 존재이다. 그래서 더욱 대단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바르게 행동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여기거나, 아니면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그 이상한 행동을 모방하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어른이 바르게 행동해야 하는 이유이다.


나는 딸이 언젠가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서 한 이야기가 머리에 깊숙이 새겨져 있다. 초등학교 처음 진학해서 1학년이 되었을 때, 어른들이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당시에 아이는 그런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몰랐는데, 몇 년 후에 아이는 고백처럼 털어놓은 것이다.


아이가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은 여러 선생님과 학부모들이었다. 담임선생님들은 반끼리 경쟁하기에 바빴고, 특히나 당시 나이가 많았던 이웃반의 주임교사가 젊은 교사들에게 갑질을 하는 장면을 나도 목격한 적이 있다. 엄마들은 아이들의 성적과 경쟁에 그 관심사가 꽂혀있었다. 자리에 있지 않은 다른 아이의 흉을 보는 엄마도 있었고, 애들을 비교하며 품평하는 일도 본 적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행동을 다 보고 있다. 우리나라는 자고로 동방예의지국이고,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존경스러운 면이 전혀 없는 어른들을 보면서 아이들은 과연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까? 아주 어릴 때에는 그래도 어른의 말에 따라야 한다고 무조건적으로 따라가지만, 머리가 커가면 아이들은 반항을 시작한다. 그 반항이 단지 호르몬에 의한 무조건적인 반항일까? 




지금 갑자기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10년 전 오늘 있었던 일이 내 페이스북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에 딸과 둘이서 캐나다에서 지내고 있었고, 아이는 중3 과정의 수업을 듣고 있었다. 


캐나다에서는 모든 선생님들이 다 좋을 것 같은 착각을 주기도 하지만,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아서, 아이는 영어 선생님은 정말 좋아하고 존경하였으나, 수학 선생님은 계산만 시키며 달달 볶는 스타일이었고, 그중 미술 선생님은 정말 최악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역시 미술 시간에 벌어졌다. 아이가 만든 작품을, 선생님이 테스트한다고 하면서 완전히 망쳐버린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학생들의 작품을 마음대로 훼손하는 일이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지만, 선생님은 일말의 미안함도 없었고 물론 사과도 없었다.


아이는 정말 기분이 완전히 상해서 집에 왔는데, 그 엉망진창의 마음으로 곧이어 학원의 에세이 수업에 참여하러 가야 했다. 아이를 보내 놓고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끝나고 데리러 가 보니 아이가 기분이 많이 풀어져있었다. 언제나 유쾌하고 명쾌한 수업을 진행하시는 선생님 덕에, 즐겁게 수업을 듣고 기분이 풀린 것이다. 


게다가 속도 털어놓고, 지지도 받았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일기장에 적어놓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생님은 늘 그렇듯이 "How was your week?"라고 질문하셨고, 아이는 의례적으로 "Fine, thanks"라고 대답했는데, 아이의 표정을 보신 선생님은 "정말?" 하고 되물으셨단다. 그래서, 사실은 이러저러해서 너무 속상하다고 털어놓았더니, 같이 수업 듣는 오빠들이랑 선생님이랑 다들, 무슨 그런 선생님이 다 있느냐며, 어떻게 학생 작품을 마음대로 손대서 망쳐놓을 수 있느냐고 어이없어하셨단다.


아이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선생님께서 첫 시간에 "너희들은 선생님을 respect 해야 한다."라고 하셨는데, 어째서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을 respect 해주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그러자 선생님이 껄껄 웃으면서,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respect는 그럴 때 쓸 수 있는 표현이 아니라고 하셨단다. 우리가 아는 respect는 "존경, 존중"의 뜻이 있으니, 뭐가 틀렸을까 아리송할 수밖에... 학생들이 모두 어리둥절해서 선생님을 쳐다보았더니,


"You can't demand respect from others, you have to earn it yourself."


존경은 타인에게 요청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스로 삶을 통해서 얻어내야 하는 것이지, 아무도 "나를 존경해라"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 와닿는 말씀이었다. 존경은, 하라고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하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이가 존경하는 선생님들을 가만히 보면, 마냥 너그럽기만 한 분들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굉장히 엄격하고, 아이들에게 규율을 제대로 가르치시고, 숙제가 적은 편도 아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항상 아이들에게 공평하시고, 모범이 되시고, 결정적으로, 아이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집에서 직접 쿠키를 구워다가 나눠주시기도 하고, 엄격한 수업 중에도 아이들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농담을 풀어주시기도 하며,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유용할까를 고심하시고 노력하시는 분들이다.


아이들의 노력을 인정해주시고, 사소한 과자 하나라도 선생님을 생각해서 들고 가면, 감동해서 포근하게 안아주시는 분들이었다. 그런 분들은 존경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학생들이 바르게 되고, 성실하고, 노력하기를 요구하실 뿐이며, 학생들은 그 선생님들을 저절로 존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단어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는 잠시 갈등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고 배운 우리들은, 선생님을 존경하는 게 아니라면, 아이에게 선생님들을 어떻게 대하라고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런데 아이는, 에세이 선생님이 주신 단어가 따로 있다고 했다.


선생님은 courteous 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 즉,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선생님도 학생들의 작업에 대해 respect 하는 것이 아니라, give it the care that it deserves 해야 한다고 하셨단다.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확실한 교통정리다. 

...



막연히 부모님을 존경해야 하고, 선생님을 존경해야 한다는 통념에 반기를 들은 셈인데, 세상 그 어느 것도 저절로 되는 것은 없다. 더구나 감정이 들어가는 부분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처음에는 첫눈에 반해서 사랑에 빠져도, 처음에는 아름다운 미모에 이끌려도, 처음에는 너무 훌륭하다 싶어서 감탄하는 마음이 들어도, 만남을 거듭할수록 그 관계의 모습은 결국 본인 스스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볼 수록 아름다운 사람, 볼 수록 존경스러운 사람, 볼 수록 더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결국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 사족


당시에 아이를 통해서 이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그분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아이가 너무나 좋아했던 이 선생님은 지금 나의 남편이다. 지금의 남편이 당시에는 딸아이의 멘토이자 학원의 에세이 선생님이었다. 이 상상도 못 한 인연이라니! 그때는 내가 이 사람과 연관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 했었다. 인생은 역시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