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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May 24. 2022

세상은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그래도 세상은 마음먹은 대로 살아야 한다

지난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잤다. 전날 세시까지 뭐 한다고 컴퓨터 앞에서 낑낑 매느라 아침에 너무 고단했다. 정신없이 자면서 꿈도 힘든 꿈을 꿨다. 딸 사는 곳에를 찾아갔더니, 학교가 멀어 다니기 힘들다면서, 근처의 열악한 판잣집 같은 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씩씩하게 웃으면서 괜찮다고 하는데, 눈이 엄청 와서 춥고 속상했다. 네가 이러고 있는지 몰랐다며, 차를 사든 지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한탄하며, 같이 길을 헤매다 깼다.


남편이 내가 깬 것을 보고는 와서는 이메일을 확인해보라고 했다. 딸이 보낸 이메일이 있었다. 아니, 딸이 쓴 이메일이 아니고, 전달만 한 이메일이었다. 빠르게 내용을 읽어보니, 학교에서 온 이메일이었다. 일 년간 학생들이 만든 작품들을 닷새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교 극장에서 매일 상영 중이었는데, 350편이 넘는 작품들 중 열세 편을 골라 그 도시의 박물관 극장에서 입장료를 받고 공식 상영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딸아이의 작품이었다.


딸이 몇 날 며칠을 밤을 새우며 애썼던 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순간들이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벌여서 왜 사서 고생이냐고 하면서도, 사실은 자신이 선택해서, 좋아서 하는 일이라며 웃고 있었던 아이. 이제는 자신을 얽어매고 있던 트라우마에서 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5월 3일 화요일 일정에 들어있는 아이 학교 영상회



 

우리 딸은 별나다. 너무 야무지고, 재능이 많아서 부럽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지만, 그런 모든 것들은 사실 단순히 재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늘 열정에서 왔다. 뭔가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깊이 빠져들고, 그러면 열과 성을 다해서 정열을 바치는 성격이다.


그것이 홈스쿨링의 영향인 것인지, 아니면 그런 성향의 아이어서 홈스쿨링이 잘 맞았는지... 아마 둘 다 맞는 것 같다. 어릴 때부터도 몰두하는 성격의 아이였는데, 홈스쿨링 하면서 더욱 마음껏 그렇게 할 수 있어서 점점 더 자유롭게 사고하고, 도전하고, 파고드는 아이가 되었다. 원하는 한 가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몇 시간씩 씨름하던 아이는 여전히 그렇게 산다.


독학으로 포토샵을 익히고, 인디자인을 익히더니,  열다섯 나이에 자신만의 잡지를 만들었다. 그 이후에도 아이는 정말 많은 것을 독학으로 익혔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프로그래밍을 하고... 그냥 자꾸자꾸 많이 해서 내 것이 될 때까지 손 안의 것을 달달 볶는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본인이 즐거워서 하는 것이다.


16살 때부터 3년간 발행한 격월간 영어 잡지, 150여 명의 유료 구독자가 있었다


한때는, 어떤 것은 좀 그냥 대충 해도 된다고 말해주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열심히 살지 말라 하는 것은 달궈진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번 영상도 그랬다. 원래는 30초짜리 짧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이 이번 학기의 과제였다. 한 학기 동안 짧은 영상을 완전히 완성한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다. 평소에 늘 하던 스토리보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영해도 될만한 영상을 만드는 것은 완전 다른 얘기였다. 시중에 나오는 영상들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많은 컷을 그려야 하고, 그것에 맞는 소리와, 속도와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보는 사람이 즐길 수 있는 뭔가가 나와야 하는 과제였다.


아이는 처음에 구상을 할 때, 두 가지 스토리를 머릿속에 떠올려버렸다. 하나는 30초에 걸맞은 영상이었는데, 또 하나는 다듬다 보니 2분짜리가 되어버렸다. 아이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영상을 두 개 만들기로 결심을 해버렸다. 원래 4과목 들어도 되는 수업을 5과목을 들으며, 조교를 하고, 부업을 여러 개 하는 아이가 시간이 남을 리는 없지만, 사실 이 모든 것들은 전부, 아이가 스스로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꿈을 위해서 아이는 또 이런 선택을 한 것이다. 


물론, 죽도록 힘들었고, 약간의 후회도 있었으리라. 자신의 과제를 허술하게 하면 면목이 서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30초짜리 영상도 흠잡을 데 없이 제대로 만들어야 했고, 그 이후, 남들은 과제가 끝났다고 여유를 부리는 타이밍에 아이는 나머지 주말을 꼬박 바쳐서 2분짜리 영상 마감을 했다. 


그렇게 해서, 어느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에 영혼을 갈아 넣었고, 그저 영상 목록에 자신의 추가 작품을 넣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너무 기분이 좋았던 딸내미는, 바쁜 와중에 이 소식을 전해주려고 급히 이메일을 전달한 것이다. 


박물관 극장 상영 후, 작가들이 앞에 나가 한 명씩 인사를 했단다



작품 크레딧에 우리 부부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아이가 밤샘할 때 에너지를 충전하게 도와주기 위해서 전화 통화를 계속해주었기 때문이고, 또 중간중간, 작품이 괜찮아 보이냐고 물어오는 것에 우리가 대답을 해줬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결국 며칠 후에는, 아이가 냈던 작품 두 개가 모두 영예의 작품 32점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이렇게 선정되면, 추후 몇 차례 더 상영이 되며, 학교에서도 그 작업을 인정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진짜 가슴이 찡한 것은, 단순히 아이가 상을 탔다는 것이 아니다. 이 일을 통해, 아이가 얻을 자신감 때문에 기뻤다. 


사실 아이는 상을 받게 되리라는 기대를 일찌감치 저버렸다. 지난번 학부 때 마음고생을 너무 했기 때문이다. 미국 대학이라고 해서 모두 아이의 창의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은 우리의 착각이었다. 모든 학교의 모든 학과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튀는 아이를 찍어 누르고, 재능이 있으니 더 몇 배로 노력하지 않으면 인정해주지 않겠다는 일부 교수의 이상한 공평심으로 가슴앓이를 많이 했다. 졸업할 때에도 꼭 가기로 되어있던 조교자리가 엉뚱한 아이에게 넘어갔다. 성적도 많이 떨어지고, 대마초 피며 수업도 땡땡이치던 그 아이에게 간 것은 어떤 로비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교수의 답변은, "너는 뛰어난 아이니까 어디서든 잘할 거야. 더 어려운 아이에게 기회를 주었어."라는 어이없는 말이었다. 더 어려운 아이의 기준은 무엇일까? 학비가 없어서 반액은 지원금, 반액은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닌 아이보다 더 어려운 상황은 무엇이었을까? 당장 직장을 구하지 않으면 미국 밖으로 나가야 하는 아이보다 과연 그 아이가 더 절박했을까?


아이는 이번에 상당히 놀라워했다. 이렇게 상을 두 개나 받으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하나도 못 받은 아이들도 많은데, 이러면 불공평한 것 아니냐고 걱정을 했다. 예전에 겪었던 트라우마 때문에 행여나 이 일로 아이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나는 아이에게, 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생각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드디어 제대로 된 곳에 네가 있게 된 것을 축하한다고 말해줬다. 네가 빛을 낼 때, 그 빛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드디어 만났다고 말이다. 


자신감을 잃고 힘들어할 때 아이에게 보내줬던 문구


공평하다는 것은 모두에게 다 똑같은 것을 쥐어주는 것이 아니다. 올림픽 대회를 했는데, 공평하게 하기 위해서 제일 잘한 선수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골고루 상을 나눠주는 것은 공평한 것이 아니다. 양궁 선수가 종목별로 3관왕을 받는 것은, 그의 실력을 인정해서 올바른 상을 주는 것인 것처럼 말이다.


아이는 예전 학교에서 뛰어나 보임으로써 겪는 부당함이 싫어서, 되도록이면 튀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자신을 100% 발휘하지도 못했으며, 겸손 또 겸손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잘나서 재수 없는 아이가 된 것이었다. 로마로 교환학생 가 있으면서도 본교에서 하는 장학금 프로젝트에 선정되는 아이에겐 질투만 쏟아졌다.


그런 생활이 지긋지긋했던 아이는, 이번에 대학원에 와서 마음을 완전히 바꿨다. 더 이상 자신을 숨기고 겸손하려고 애를 쓰지 않았다. 그냥 자기 자신이 되고자 했다. 좋아하는 것은 마음껏 좋아했고, 일거리가 눈에 보이면 나서서 했다. 


잘난 척하는 것으로 보일까 봐, 할 일을 눈앞에 두고도 양보하느라 그저 모르는 척하던 것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래 봐야 어차피 아무도 안 하니까. 그래서 과대표라는 것이 없는 대학원 생활에서, 남들이 귀찮아하는 학과의 온갖 잔일을 다 맡아 처리하는 아이는 과대표처럼 되어버렸고, 교수회의에도 대표로 참가하여 학교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학우들에게는 친절했고, 교수들에게는 유용하였다.




아이의 2분짜리 영상이 발표되었을 때, 우레와 같은 박수가 나와서 깜짝 놀랐단다. 교수들이 평을 한 마디씩 하는 자리에서 아이의 지도교수는 이렇게 말했단다.


"이 영상이 더욱 뜻깊은 이유는, 네가 자신의 모든 일과 학업을 전혀 소홀히 하지 않고 제대로 시간관리를 하면서도 이런 훌륭한 영상을 만들었다는 것이야. 애니메이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라는 것이지"


그렇다.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  자신의 일을 뜨겁게 사랑하고 흠뻑 빠져서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정말 멋지고 신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아이가 상을 받아서가 아니라,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어서 정말 기쁘다.




* 이 글을 써놓고 몇 주간 고민을 했습니다. 자식 자랑을 하려는 것 같이 보일 것 같아서요. 하지만, 사실은 여러 트라우마나 힘든 상황에서 아이가 거의 벗어났다는 사실에 벅차 올라서 쓰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자기 일을 사랑하며,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거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 꿈을 향해 도전하는 분들을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몇 살이든 간에 말이죠.


* 아이의 홈페이지에서 여러 가지 모습을 구경하실 분들은 링크를 클릭해보세요. 참고로, 이번에 언급된 영상은 아직 온라인에 공개할 수 없다 합니다. 다른 공모전 같은 곳에 제출하려면 온라인 미공개 라야 한다더라고요. 나중에 가능해질 때 보여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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