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을 뒤집어서 청소하는 초능력
딸은 학교 앞 기숙사 아파트에 산다. 사실 기숙사는 아니지만, 기숙사처럼 운영되는 아파트이다. 아파트 안에는 방에 3~4개가 있어서, 방은 각자 쓰고, 거실과 부엌은 같이 쓰는 방식이다.
어떤 친구가 룸메이트로 들어올까 내심 기대도 했던 딸은 초반부터 실망을 했다. 그냥 편하고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들어오자마자부터 깍쟁이 같이 군 것이다.
청소기를 빌려달라길래 빌려줬더니, 자기가 청소기 값을 반을 내겠다고 하는 거다. 괜찮다고 그냥 쓰라고 했더니, 그다음 날에는 거실 등을 사야 되니 돈을 반 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정수기를 사야 하니 반을 내라고 하고...
딸 반응은, 내가 자기랑 결혼을 했나,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닌데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이냐고. 나는 정수기 필요 없고, 일 년 후에 너랑 나랑 헤어지면 이거 다 반씩 갈라서 나눠 가질 거냐고... 너 필요한 거 있으면 네가 사서 쓰고, 내가 필요한 거 있으면 내가 사서 쓰고, 같이 쓸 수 있는 것은 나눠 쓰자고 했는데, 내도록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골치 아프다고 했었다.
그러더니 다시, 냉장고 이쪽 반은 내가 쓰고, 저쪽 반은 네가 쓰고, 가스레인지도 이쪽 반은 내가 쓰고 저쪽 반은 네가 쓰고... 결국, 그래 알았다 알았어, 그리 해라 했는데 막상 당사자가 못 지키는 것이다. 남의 칸에 넘어오는 것이 일수였고, 게다가 너무 지저분하게 쓰는 것이었다. 설거지를 해도 사방에 물을 줄줄 흘리고 닦지도 않는다며, 저러다가 부엌에 곰팡이 피는 거 아닌지 딸은 노심초사했다. 뭐라 했더니 처음에는 눈치를 좀 보는 거 같더니 결국은 설거지 안 하고 싱크대에 쌓아두고, 음식 흘린 거도 안 닦고...
몇 번 싫은 소리 하다가 그냥 아이가 알아서 닦고 치우며 살았는데, 그렇게 한 학기 지내고 나니 비어있던 방에 새로 두 명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깔끔한 척하더니만 곧 통제 불가로 지저분해지기 시작했다. 도저히 뭔가를 해 먹을 수 없는 부엌이 되어버리니 집밥만 먹는 우리 딸은 초난감이 되었다.
공동 구역은 각자 따로 당번을 정한 상황이었다. 우리 딸은 거실 청소기 돌리기였고, 그중 한 명은 쓰레기통 내다 버리기였는데, 2주가 넘도록 한 번도 버리지를 않더란다. 그냥 학교 가는 길에 들고나가면 되는데 왜 안 하는지 모르겠다고 구시렁거리더니 결국은 난장판이 된 부엌을 혼자 다 치웠단다.
그러나 이틀이 못 가는 공동 공간. 처음에는 좀 미안한 척하더니만 결국은 철면피가 된 그들이었다. 딸은 그냥 다 포기를 했다. 끔찍한 한 학기였단다. 냉장고 안에도 언제 샀는지 모르는 것들이 넘쳐나더니 문이 안 닫힌 채 밤새 둬서 고장이 나질 않나, 그 와중에 수시로 파티한다고 시끄럽고... 부엌의 상태는 저 사진의 상태를 넘어서서 치울 의욕을 상실했고, 그냥 더 이상 대화를 섞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빨래를 돌리고 건조기에서 자기네 빨래를 꺼내는 일도 없었는데, 한 번은 정말 꺼내도 꺼내도 한없이 나와서, 이런 식으로 건조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카툰까지 자기 인스타에 올려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룸메야, 네가 이렇게 밤새 빨래를 넣어두지 않았으면 내가 이것까지는 볼 필요가 없었는데 말이다..."
"건조기가 원래 이렇게 해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아는데 말이지... 근데 도대체 어떻게 이걸 다 넣은 거지?
그렇게 2학기가 지나고, 아이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물론 난장판의 부엌과 거실은 그대로 버려진 채였다. 나중에 온 교환학생 두 명이 먼저 갔다. 그리고 원래 처음에 같이 있던 룸메이트마저 방학 동안 집에 다녀온다고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나니 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 혼자 이걸 다 치워야 해?"
물론, 혼자 치우긴 싫었지만, 그렇다고 방학 동안 이런 돼지우리에서 계속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새로운 룸메이트가 왔다. 방학 석 달간 지내러 온 아이였는데, 너무나 수줍음을 타서 인사도 제대로 못한다고 했다. 모르는 아이들과 새로운 곳에서 만나서 새롭게 지내는 것은 정말 늘 모험이다.
결국 딸은 바쁜 날의 하루를 통으로 비워서 거실과 부엌을 뒤집어엎기로 했다. 날 잡아서 종일 혼자 치웠단다. 그리고 전화를 해서 내게 말했다.
엄마! 제가 드디어 어른이 되었나 봐요!
옛날부터 보면, 어른들은 너무나 지저분한 공간을 모두 뒤집어엎어서 깨끗하게 치워주는데 그것은 아이 눈에 무척 신기해 보였단다. 나는 아이가 어렸을 때에도 스스로 방을 치우게 했는데, 그러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다 뒤집어엎어서 치워준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이제 유지만 하면 된다고 말해주던 시절도 있었다.
너무 더러워서 어떻게 손대야 할지도 모르던 공간을 싹 뒤집어엎어서, 사람이 사는 곳처럼 바꾸는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어른이 되는 과정 중 하나일 것이다.
내가 어릴 때는 전혀 못할 것만 같았던 일을 해내시던 엄마를 보며 나도 그 생각을 했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자식들의 도시락을 싸시는 엄마를 보면서 나는 절대 그렇게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이 내겐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소풍 가는 딸에게 유부초밥을 싸주면서 입가에 미소가 가득 생긴 내 모습을 발견하고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더랬다.
살인 스케줄을 소화하며, 수많은 일들을 일사분란하게 처리해내는 딸이다. 언젠가부터 집도 혼자 구하고, 이사도 혼자 해내니 분명히 어른이 되고 있는게 맞다. 그래도 이건 아이에게 분명 또다른 특별한 경험이었던 것 같다.
나이를 먹는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대로 어른이 되고 싶다면, 차곡차곡 노력하면서 스스로를 어른으로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정녕 멋진 일인 것 같다.
* 지난여름에 써놓고는 바빠서 못 올린 글을 이제야 올립니다. 글이 완성이 안 될 때에는 창고에서 하나씩 꺼내기라도 해야겠어요~ ^^
* 딸은 가을부터 새로운 룸메들을 만나서 깨끗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