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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Sep 13. 2022

그래도 송편은 빚고 싶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추석이지만...

추석이 다가오는데, 이것 저것 할 일이 많아서 마음이 바빴다. 남편은 며칠 전부터 추석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데 나는 이렇다 대답을 못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캐나다인인 그에게는 아무 날도 아닌 추석 이다. 하지만 아내가 고향의 명절을 챙기지 못해서 서운할까 봐 챙기는 마음이었다.


사실 한국의 명절은 참으로 복잡한 날이 아니던가? 물론 최대의 명절이니 좋아야 하는 날이지만, 그냥 가족끼리 모여서 즐기는 날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의무가 함께 존재하는 날이기도 하다. 며느리들의 입장에서는 일복이 터지는 날이고, 젊은이들에게는 친인척들의 질문 공세를 감당해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만리타국에서 휴일도 아닌 추석은 이제 내게 더 이상 부담스러운 날이 아니다. 뭔가 즐기고 싶으면 음식이라도 해서 기분을 내면 되고, 아니면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보통날이기 때문이다. 첫 추석에는 상당한 해방감과 더불어 어쩐지 뭔가 해야 하는 불안감이 동시에 있었는데, 이제는 그냥 편안하다.


공식 쉬는 날은 아니어도 아시아인이 많이 사는 비씨 주 우리 동네는 추석을 앞두고 다문화 페스티벌이 열렸다. 친구가 행사 때 난타공연을 한다고 알려줘서 구경을 다녀왔다. 내가 한국인이어서 그렇겠지만, 역시 우리네 공연이 제일 멋졌다. 장구춤도 멋졌고, 난타공연은 정말 어깨가 들썩들썩했다. 이 박자에 가슴이 뛰는 것은 아마 우리의 피에 흐르고 있는 한과 흥이리라.



날짜가 점점 다가오면서, 추석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잠시 고민을 했다. 마침 남편의 막내아들이 아버지와 의논할 것이 있다기에 저녁 먹으러 오라 하고, 은근 그날이기를 바라기도 했지만, 그 일정은 며칠 후로 미뤄졌다. 그러면 간단하게 차려서라도 누구든 친한 이를 불러서 추석 당일 저녁을 같이 먹을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내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며칠 전 허리가 삐끗한 탓도 있으리라.


그래서 추석 저녁 음식은 미뤘다가 아들 커플 올 때 차리자고 하고, 추석 때는 송편만 빚기로 했다. 작년엔 친한 이들을 불러서 집에서 함께 송편을 빚기도 했는데, 올해는 정말 정신이 없었나 보다. 


사실 송편도 안 빚어도 되지만, 그마저 안 하면 내가 섭섭할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50년 이상을 추석 때마다 빚던 송편에는 여러 가지 추억이 어려있기 때문이다. 어머니 옆에 삼 남매가 옹기종기 둘러앉아서 장난치며 빚던 송편은 정말 맛있었다. 쌀 반죽으로 강아지를 빚기도 하던 장난은 나의 딸에게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송편에는 딸과의 추억도 한 가득이다.


딸이 만들었던 토끼 송편, 고양이 송편, 운동화 송편, 돼지머리 송편


그래서 결국 쌀가루 한 봉지를 사 와서는, 남편과 둘이서 떡을 만들었다. 집에서 뜯어 말린 쑥가루, 울금가루, 자색 고구마 가루 등을 이용해서 4색으로 연하게 준비했다. 마당에서 기른 강낭콩과 흰콩도 불리고, 깨도 볶아서 빻아 준비했다.


내가 뜨거운 물을 부어주면, 남편이 익반죽을 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 개 크기로 작게 잘라서 내게 건네주었고, 나는 속을 넣어서 부지런히 송편을 빚었다. 


물을 연하게 들여야 쪘을 때 색이 너무 진하지 않게 잘 나온다.


한참 빚고 있는데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 주려고 송편 빚고 있다는 말을 듣더니 침을 꼴깍 삼킨다. 안 그래도 한인마트 갔었는데, 냉동 송편을 보고 망설이다가 안 샀다고 했다. 사 먹는 것이 그 맛이 아닐 것 같아서 실망할까 봐 안 샀단다. 얼른 쪄서 미국까지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부지런히 손을 놀려 찜기 3판을 먼저 채웠다.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보니 솔잎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결국 솔잎도 집 마당의 나무에서 해결했다. 손이 닿지 않아 조금만 넣어 향만 살짝 얹었다. 



어차피 우리 둘이 몇 개 먹지도 못하니, 딱 한 접시만 덜어서 먹고, 나머지는 널찍한 쿠키 팬에 얹어서 얼렸다. 이렇게 개별로 얼린 후에, 한번 먹을 만큼 봉지에 담아서 진공포장으로 보관하면, 냉동실 냄새도 배지 않고 좋다. 겨울 방학이 되어 딸이 오면 꺼내서 다시 살짝 쪄서 먹이면서 아이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게 되겠지.

 


그렇게 낮 시간을 보내고 나니, 곧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버렸다. 음, 뭐 해 먹을까 했더니, 남편이 냉동실에 있던 소 혀를 내려놓았다고 그걸 해주겠단다. 남편 밥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 그래서 나는 서울에 있는 가족들과 통화를 하면서 빈둥거렸다.


간단한 저녁식사라고 했지만, 입에서 살살 녹는 고급스러운 소 혀 요리에, 집에서 기른 채소들로 구성된 한 접시는, 추석 때 누릴 수 있는 아주 멋진 호사였다.


부드러운 소 혀에, 집에서 기른 야채볶음과 오늘 딴 껍질콩, 어제 캔 감자를 곁들였다.


저녁을 다 먹고 앉아서 글을 쓰고 있는데, 데크에 나갔던 남편이 손짓을 하며 부른다. 달 보고 소원 빌라는 것이다. 요새 캐나다 서부는 산불로 인해 공기가 상당히 안 좋아서, 달도 보기 어려울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선명한 노란 달이 아니고, 아픈 뜻 빨간 달이 떠서 순간 깜짝 놀랐다. 그래도 아름다웠다. 


소원을 빌었다. 내게 주어진 것들에게 감사하고, 또 이렇게 고마운 사람들이 늘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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