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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Sep 21. 2022

심플 코리안 디너

화려하지 않지만, 각각의 맛을 즐기는 음식들

"밥은?"


유명한 대사다. 아내가 어디를 간다면 늘 등장하는 대사로 알려져 있다. 남편만이 이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심지어 친정 엄마도 "그러면 ○서방 밥은 어쩌고?"라는 말을 해서 딸을 속상하게 한다는 이야기도 아주 흔하다.


하지만 우리 집은 아내가 늘 밥 당번이지 않다. 아니 오히려 남편이 더 자주 저녁을 차린다. 나는 사실 대충 끼니를 때워도 되는 종류의 사람이지만, 남편은 나보다 훨씬 음식을 즐기는 사람이다. 무슨 음식을 먹든 깊이 음미하고, 각각의 재료 맛을 즐기며, 그 자체를 삶의 아주 중요한 한 부분으로 여긴다.


나를 만나기 전의 남편은, 아침 출근길에 미리 그날 저녁거리를 냉동실에서 꺼내서 찬장 안에 두고 나갔다. 그러면 퇴근해서 왔을 때 딱 적당히 녹은 고기로 요리를 할 수 있으니까. 혼자 상을 차려도 포크 나이프를 제대로 놓는 것을 좋아하고, 딱 따끈한 순간의 음식을 즐기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거기에 어울리는 와인까지 모두 한 세트다.


결혼 4년 차인 지금, 여전히 우리의 저녁 메뉴는 오전 중에 결정이 된다. 오늘 뭘 먹을지 미리 생각하고, 필요한 것들을 냉동실에서 꺼내 두곤 하는데, 뭔가 분주하다 보면 물론 그러지 못하는 날도 생기기 마련이다. 


오늘 뭐 먹지? 꺼내 둔 것이 없네!


이런 일이 발생하면 내가 이렇게 응수한다.


"Are you okay with a simple Korean dinner?"

"간단하게 한식으로 할까?"


그러면 남편은 껄껄 웃는다. 내가 주장하는 '심플 코리안 디너'는 그가 보기에 전혀 심플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식이라는 것이 그렇듯, 간단히 먹자고 해도 밑반찬 몇 가지에 메인 반찬이 놓이는 것이 정석이다. 저렴한 백반집에만 가도 반찬의 가짓수는 늘 넉넉하기 때문에, 내가 서너 가지의 반찬을 차린다면, 내가 그걸 정식 저녁식사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아니겠는가!


한정식은 이 정도는 되어 줘야... (2015년 제천 원뜰)
내가 생각하는 심플 코리안 디너, 반찬 몇 개 안 되고 차림만 그럴 듯.
전날 먹고 남은 로스트를 얇게 썰어서 미나리와 더덕꽃 넣고 휘리릭 쇠고기 샐러드 완성!


하지만, 간단하게 차린다고 해도, 점심도 아니고 저녁이라면 비빔밥 같이 일품으로 해결하는 것을 준비하기는 좀 그렇다. 그냥 가정식 백반 같은 것을 약식으로 차리는 것이 보통이다. 된장찌개나 청국장을 끓일 때도 있지만, 캐나다인 남편에게 국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냥 많은 반찬 중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나는 더욱 부담이 없다.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오전엔 곰과 지인이 다녀갔고, 남편은 병원 검진이 있어서 정신이 없었다. 다녀와서는 마당에서 호박도 따고, 이것저것 일을 하느라 시간이 후딱 갔다. 그래서 내가 '심플 코리안 디너'를 제안했다. 


그리고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냉동실에 고기는 늘 쟁여있지만, 그건 해동에 시간이 걸리니, 오징어 볶음을 하면 메인이 쉽게 해결되겠다 싶었다. 얼른 오징어를 냉동실에서 꺼내 두고 쌀을 씻었다. 그리고 오징어를 손질하여 일단 냉장고에 넣었다. 


마당에서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이 후딱 갔고, 7시에 저녁을 먹자고 했는데 벌써 6시 반이었다. 이런! 늦겠다 싶어서 후다닥 밥을 안치면서, 밥솥 위에 찜기를 얹어 가지를 함께 쪘다. 그리고는 오징어 볶음용 야채를 썰었다. 남편이 뭘 도울까 묻길래, 조선호박을 뚝 잘라 주면서 강판에 채를 쳐달라고 해서, 거기에 방아잎을 좀 따 넣고 작은 부침개를 부쳤다. 그리고 일부는 뭉텅뭉텅 썰어서 새우젓을 넣고 볶았다. 


조선호박에 달걀 하나, 그리고 방아잎 넣고 섞어서 부치면 간단한 반찬 하나 완성
기름 살짝 두르고, 호박과 양파 넣고 볶다가 마늘과 새우젓 넣어서 마무리
먹기 편한 모양으로 가지 썰어서 살짝 찐 후, 조선간장과 마늘, 참기름, 깨 넣어서 무친 가지나물


가지나물은 조선간장을 살짝 끼얹어주고, 마늘 다진 것을 넣은 후, 남편더러 참기름, 깨를 넣어 섞으라고 말했다. 급하다 보면 여러 가지를 동시에 조리하다 보면 꼭 실수가 나온다. 호박 부침은 좀 탔고, 오징어 볶음은 집에서 딴 할라피뇨 고추가 너무 매워서 고춧가루도 못 넣었다. 다른 거 하느라 불 잡느라고 낮췄다가 물 나오고...


그렇게 완성된 저녁식사 반찬들. (냉장고의 오이소박이와 숙주나물은 왜 안 나온 거니?)

부침은 좀 눌었고, 오징어는 물 나오고 ㅠㅠ


그렇게 엉성하게 허둥지둥 저녁을 차렸는데, 남편은 한 상 가득이라며 무척 즐거워했다. 너무나 조촐했지만 사실 두 사람이 먹기엔 이것도 충분한 양이긴 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거의 모든 재료가 밭에서 나왔다 보니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맛있었다. 가지는 그 자체로 달았고, 호박도 달았다. 나는 원래 설탕을 전혀 안 쓰고 양념도 최소화하기 때문에 이 반찬들은 정말 고유의 맛이었는데도 깜짝 놀랄 만큼 달았다. 그러면서 풍미가 있고 촉촉한 맛이었다.


남편은 진수성찬을 받은 듯 너무나 맛있게 먹어줬다. 남편이 먹는 모습은 너무나 예쁘다. 한 입, 한 입을 다 음미하며 먹는다. "음~"이라는 느긋한 탄성을 내뱉으며 음식 그 자체를 즐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정말 흐뭇하다. 


때로 보면, 무엇을 차리느냐보다, 어떤 마음으로 차리느냐, 어떤 재료로 차리느냐, 누가 차리느냐에 따라서 맛이 달라지는 것 같다. 그리고 반찬이 이게 다인가 하는 서운한 마음으로 먹는다면 시시하고 맛없는 상이 될 것이고, 이 하나하나를 각각의 별개 요리라고 생각하고 먹는다면 일개 밑반찬도 진수성찬이 될 수도 있듯이 말이다. 


그게 또 한식의 매력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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