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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Dec 02. 2022

내가 전세금 반환 소송을?

나답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이었을까?

지난 늦 봄, 남편이 아팠다. 이유를 모르게 계속 아프던 와중에, 서울 집주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세 계약을 연장하겠느냐고.


내가 그 집을 계약했던 이유는, 친구가 지은 건물이었고, 한 건물에서 믿고 의지하며 지내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내가 캐나다로 떠나게 된 상황에서 그 친구가 내 집을 관리해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친구는 사정이 생겨 집을 팔았고, 어느 순간 주인이 바뀌었다.


나는 주인이 바뀌면 연락이 올 거라 생각했는데, 몇 달이 흐르고 해가 바뀌어도 아무 소식도 못 듣는 상황이었다. 물론 내가 적극적으로 알아내려고 하면 집주인 연락처를 알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쪽은 이미 인수인계받으면서 내 정보를 다 받았을 테니 연락이 오겠거니 했는데 소식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뭐 나도 딱히 아쉬운 것은 없다 보니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며 날짜가 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연락이 와서는 집주인이라며, 별다른 인사말도 없이, 계약을 연장하겠느냐고 물은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 집에 지금 사람 살고 있는 것은 아시죠?"라고 덧붙였다. 빈 집에 갑자기 사람이 살게 되어도 누군지 묻지도 않았고, 인사도 나누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에 사는 남동생 내외가 갑자기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서 그 집에 지내고 있었다. 나는 동생이 집주인과 마주치지 않아서 모르나 보다 했었는데, 알면서도 그냥 모르쇠 한 것이었다. 나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집주인은 4층에 살고, 우리 집이 3층이었으니 모르기 쉽지 않았을 터였다. 내가 집주인이었다면, 자기 소유의 비어있던 집에 누군가가 갑자기 들어와서 산다면, 와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을 것 같다.


나는 사실 집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니긴 하지만, 거기에 손을 대는 일은 엄두가 나지 않으니, 한편으로는 집세를 올리지 않으면 그냥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살짝 기울고 있던 참이었는데, 새 집주인과의 첫 대면이 상당히 껄끄럽게 시작된 셈이었다.


집세 문제를 물었더니 첫회에는 법적으로 5% 밖에 못 올리니 그렇게 하고, 그 이후에는 더 올리겠다는 말을 했다. 친구 집이긴 했어도 이미 싸게 들어간 집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알아본 시세로는 올릴만한 금액이 아니었다. 다시 살짝 마음이 상했다. 하지만 뭐 집주인이 집을 사며 돈이 모자랐던 모양이구나 싶었다.


나는 생각해보겠다고 답했는데, 그러고는 남편이 바로 입원을 했다. 그냥 아픈 게 아니고, 음식도 못 삼키고, 숨도 못 쉬어서 응급실에 갔고, 기약 없는 입원을 했었다. 집주인에게 다시 연락이 왔지만, 그걸 결정할 정신은 없었다. 우리에겐 생사가 달린 문제였으니까.


나는 사정을 이야기하고 좀 기다려달라고 말을 했다. 그랬더니, 이런 것은 6개월 전에 해야 하는데, 이미 5개월 정도 남았으니 늦었고, 빨리 결정을 하라는 반응이 나왔다. 그 순간 나는 확 감정이 상해버렸다.


아무리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라지만, 나는 언제나 사람이 우선이라는 주의이고, 기간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이렇게 대응하는 모습에 내 속이 밴댕이처럼 작아졌다. 법을 따지는 것을 좋아하면 나도 법적으로 챙겨주리라.


나는 규정을 바로 알아봤다. 집주인은 집을 비우라고 할 때 6개월 전에 세입자에게 통보해야 하지만, 세입자의 경우는 집주인에게 2달 전에만 통보하면 된다고 되어있었다. 나는 집주인에게 그대로 전하면서, 일단 사람을 살리고 다시 연락을 하겠다고 말했다.




처음에 차도가 없던 남편이 점차 회복이 되고, 여전히 조마조마 하지만 그래도 일상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나는 집주인에게 선뜻 연락을 하게 못했다. 이미 감정이 상해서 연락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예정되었던 동부 시누이 댁 방문을 가서 곰곰이 생각을 했다. 이 집주인은 계속 집세를 올릴 것이다. 나는 그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그 집을 계속 유지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지, 아니면 물건을 정리할지는 여전히 갈팡질팡 하고 있었지만,  결국 집을 비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시누이 댁은 인터넷이 안 되는 곳이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서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다녀오자마자 집주인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역시나, "남편은 좀 어떠세요?" 하는 흔한 인사말도 없이, 또다시 "집주인입니다"라는 말로 카톡 메시지가 왔다. 아픈 것은 알지만 자신들도 준비를 해야 하니 조만간 답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말투도 꼭 갑이 을을 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관계는 그렇게 어그러져갔다. 결국 나는, 계약 만료되기 20일 전에 한국에 갈 것이며, 날짜 맞춰 이사를 가겠다고 통보를 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 발생했다. 한국의 부동산 시장이 급변하면서 동결된 것이었다. 그곳에서 지내던 남동생의 말로,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집주인은 집세를 20%나 올려서 내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좁고 가파른 계단으로 3층을 올라가야 하고, 주차장도 없는 그 집에 그 가격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짜는 계속 갔다. 동생이 지내면서 접한 집주인은 그리 인상이 좋지 못했다. 마주쳐도 인사를 할 새 없이 돌아섰다 했고, 인성이 나쁜 것 같다는 평을 전했다. 결정적인 이유로는, 아랫집 사시는 할머니가 휠체어를 타시는데, 계단 밑에 두는 휠체어를 밀어내고 자기네 자전거들을 보관하는 바람에 할머니의 휠체어가 비를 맞는다는 것이었다. 정의감에 불을 붙이기 좋은 사례였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집세를 돌려받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멀리 강릉쯤에다가 작은 아파트를 하나 사두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기에 집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만일 돈을 못 받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래서 집주인에게 연락을 했다. 마음에 드는 집이 나와서 구매를 하려고 하는데, 계약금을 미리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직 집이 나가지 않았고, 여윳돈이 없기에 줄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면서, 아직 계약을 안 했으면, 집세를 올리지 않을 테니 그냥 연장을 하지 않겠냐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나는 이미 그 집에서 마음이 떠났고, 이 사람들과 더이상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미 비행기표를 구입했으며, 지금 집세를 안 올려도 나중에 올리실 테니 그냥 나가겠다고, 날짜 맞춰서 돈을 준비해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집주인은 말이 없었다. 날짜는 그렇게 흘러갔고, 집 보러 오는 사람은 여전히 거의 없었다. 남동생이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집주인에게 현관 비번을 알려줘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에, 다시금 제 날짜에 돈을 달라는 말을 했는데, 확답을 듣지 못했다.


나가겠다는 고지를 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말하면서, 돈을 줄지 확답을 달라고 했지만 마치, 답을 하지 않으면 돈을 주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대답을 피했다. 변호사 친구를 통해서 내용증명을 보내기까지 하였으나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안타깝지만 이사를 해놓고 캐나다로 돌아가야 하는 입장이라 어쩔 수가 없으니 확답을 달라고 다시 연락을 했다. 답변 회피는 이어졌고, 결국 나는 제날짜에 지급이 되지 않으면 지급명령을 넣을 수밖에 없다는 카톡까지 보내게 되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집주인 남편이라며 연락이 와서는 내가 협박과 명령을 한다는 식으로 몰고 갔다.




사실 나는 참 무른 사람이다. 만일 처음부터 관계가 편안했다면, 그리고, 집이 구해지지 않으니 미안하지만 좀 기다려줄 수 있겠냐고 말했다면 나는 냉정하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지금 돈을 구하고 있는데, 대출이 나오지 않아서 사방으로 알아보고 있다고 허심탄회하게 말을 했다면 내 태도는 분명히 변했을 것이다. 사람 사는 일이 다 힘든데, 서로 이해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은 늘 갑이었고, 말투도 형식상으로는 존댓말이지만 엄연한 하대였다. 그래서 나는 호구가 되지 않기로 결정을 했다.


싫은 소리 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내 성격 상, 누군가를 법적으로 고소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어서 내게 돌아왔다. 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가진 전재산이었고, 나는 그 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한국 가기 전부터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했고, 도착하자마자 변호사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결국 법원에 지급명령서를 넣었다. 살다 이런 것을 다 해보다니! 그런데 이미 한국에서는 전세보증금 반환 대란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었고, 보통 두 주일부터 통보가 가고 시작이 되는 지급 명령서가 몇 달이 걸릴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이미 마음이 서로 상한 세입자와 집주인은 한 건물에 살면서 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초반 며칠을 그렇게 보냈다. 나는 마음이 너무나 불편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이건 내가 일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느 날 보니, 그 집 현관 앞에 아이스박스 택배가 와 있었는데 들여 가지를 않고 계속 그렇게 방치되어있었다. 이웃집과 서로 택배를 챙겨주는 것이 익숙한 나는 그 물건이 상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까지 그렇게 놓여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나는 급기야 문자를 넣었다. 지금까지의 관계와 전혀 상반되는 행동이었다.


"문 앞에 택배가 있어요. 어제 늦게 오시나 했는데 아직도 있어서 혹시 상하는 물건인가 싶어서 걱정되어 연락드려요."


그리고 얼마 후에 답이 왔다.


"네, 제가 깜빡했어요.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평화로운 문자를 주고받고 나니, 내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사람이 사는 것은 사실 다 비슷한데, 각자 다 사정이 있는 것이어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른 것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원래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는데, 내 마음이 그런 상황에서 아랫집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더 편견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무슨 일이든 양쪽 사정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더구나 어투를 알 수 없는 카톡으로 계속 연락을 주고받다 보니 서로 오해가 발생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고나니, 내가 좀 더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 더 평화롭게 해결할 수도 있는 일일 수도 있으리라는 마음도 들었다. 나의 일은 나답게 해결을 해야 하는데, 전세금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되면서,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그들의 반응을 접하면서 나는 점점 나 자신의 모습과 동떨어진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이제 이걸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정신을 가다듬고 그 집 벨을 눌렀다. 한참 만에 답을 하더니, 문이 열렸다. 긴장한 표정의 얼굴을 보며, 잠깐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 하겠냐고 했더니, 지금 출근해야 하는데 늦었다고 해서 그냥 문 앞에 서서 이야기를 꺼냈다.


일단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내가 와서 연락도 안 하고 이렇게 아래 위로 살고 있으니 마음이 좋지 않다며 대화를 시작했다. 처음에 카톡 하면서 내가 너무 마음이 상해서 이렇게까지 왔는데, 사실 얼굴 안 보고 문자로만 대화를 하다 보면 서로의 뜻이 잘못 전해져서 더 마음이 상하는 것 같다고 말했더니,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빨리 이 일을 처리하고 캐나다로 돌아가야 하는데, 계속 이렇다 할 답을 주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지급 명령서를 넣었다, 이게 시작되면, 이율도 높고, 계속 지급이 안 되면 가압류까지 들어간다고 하더라고 전하면서, 나는 원래 이런 거 진짜 안 좋아하는 사람인데, 내가 돌아간 이후에는 변호사 친구가 일처리를 할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법원에서 통보가 나올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미리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알려드린다며, 방법을 좀 알아보라고 부드럽게 말을 했다.


상대방의 반응은 상당히 누그러졌고,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전세 사기를 할만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이런 일이 처음이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방어적으로 된 것 같았다. 집은 안 나가고, 대출도 나오지 않아서 자기들도 난처한 상황이라며, 알려줘서 고맙고, 남편과 의논하고 나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고 나니 나도 마음이 확 가벼워졌다. 돈을 주겠다고 한 것도 아니었지만, 카톡 속의 인물이 아닌, 사람을 직접 만난 기분이 훨씬 나았다. 그 이후로도 돈이 준비된다는 소식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갔다. 나는 짐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어느덧 계약 만료까지는 일주일이 채 안 남은 상황이 되었고, 나는 여전히 다른 소식을 듣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사짐 센터도 계약하지 못했다. 이사를 할 수 없다면 위약금을 물어야 할 것이 뻔하니 아무 행동도 취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위층에 인기척이 있는 것 같아 벨을 눌렀으나 답도 없고, 나는 다시 마음이 답답해졌다. 그러나 화를 내지 말고 다시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도하기로 하고 카톡을 넣었다.


"안녕하세요? 댁에 계신 것 같아서 잠깐 뵐까 했는데, 바쁘신지 답이 없으시네요. 계약 만기일이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세입자가 아직 안 구해져서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다음 주 월요일이 17일인데, 어떻게 하실지 답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내용증명과 카톡이 도착했다. 몸이 좋지 않아 답장이 늦었으며, 본인들이 보증금 지급에 차질이 없게 하기 위해, 다음 세입자 구하기 및 돈 구하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용이하지 않아, 약간의 날짜 배려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즉, 노력하는 것을 입증하겠다는 뜻이었으리라. 하지만 이 내용증명을 통해서 그쪽에서 법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긴 나도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니, 돈을 줘야 하는 입장에서도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몸이 아픈 것도 놀랄 일이 아니리라.


문제는 나 역시 마냥 기다려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도 짐을 빼기로 했고, 짐을 전세로 보관할 곳에 돈을 넘겨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돈을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도 또 넘겨야 할 곳이 있는 곳이고... 원래 이런 일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이 아니겠는가. 도미노처럼 돈이 필요한 상황...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카톡으로 하는 것보다 만나서 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보자는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기 전 아침 일찍부터 호오포노포노 기도를 했다. 상대를 향해 "사랑해, 미안해, 고마워"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이 기도는 하와이의 정신병원 의사가 시작한 것으로, 내가 그를 하나의 완전한 인간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함으로써 마음을 열게 해주는 희망의 기도이다.


방문한 그녀와 우리 거실에서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자기가 비록 집주인이지만 집 내부는 처음 본다고 해서 구경도 살짝 시켜주었다. 긴장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시간이었다. 요새 한국이 워낙 대출이 안 되다 보니, 이렇게 세입자가 들어있는 집으로는 담보대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돈이 나올 구멍이 없다는 말이 딱 맞았다.


그래도 양가 부모님이 이 난처한 처지를 아시고 알음알음 돈을 빌리고 있으시다며, 아직 액수가 모자라기는 하지만 일부는 마련이 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마, 지급명령이 들어갔다고 하자 온 식구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것이다.


가압류가 들어가면, 이런 다가구 집의 경우, 집주인은 건질 것이 없다. 경매로 저렴하게 판매되면, 세입자들의 권리를 우선 보장해줘야 하고, 그러면 오히려 돈이 모자랄 지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 그런 상황이 되면 돈을 다 받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거기까지 상황을 끌고 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게다가 남을 망하게 하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내가 원하던 것은, 이 지급명령을 통해서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어떻게든 움직여주기를 바랐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 희망대로 성의를 보이기 시작했다.


계약이 종료되는 날, 보증금의 2/3를 줄 수 있고, 나머지도 한 달 내로 구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지급 명령을 취하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나도 다음 장소에 돈을 줘야 하는 급한 금액이 해결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럼 그렇게 하자고 했다. 지급명령에 들어간 비용을 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머지 돈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말은 그 기간동안 이자를 빼달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이자를 받지 않되, 만일 날짜를 어기면 그다음 날부터 10% 이자를 받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새로 썼다. 그 과정에서 집주인 남편이 각서의 내용 일부를 살짝 누락시킨 것을 알았지만 그것으로 다시 문제 삼기는 너무 피곤했다. 그냥 주리라 믿기로 했다. 각서에 인감증명을 붙이고, 법무사 등을 통한 제삼자를 개입시켜야 한다고도 조언을 들었지만, 그냥 함께 인감도장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처음에는 돈을 주겠다는 소리를 안 해서 내 속을 태웠지만, 지금 주겠다고 하는 마당에 그들을 믿고 싶었다. 믿지 않으면 내가 더 힘들 것 같았다. 각서에 도장을 찍는 순간에는 마음속이 간질간질했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우리 부부는 그 도장을 찍고, 그날 비로소 남해안으로 여행을 떠났다.




살면서 늘 느꼈던 것은, 살다 보면 때론 예기지 않게 일이 꼬일 때도 있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결국은 다 잘 되는 쪽으로 풀린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내 인생 철학이기도 하다. 이번 사건처럼 갑작스레 일이 닥치면 평정심을 잃고 힘들어하기도 하지만, 다시 나는 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정신을 차린다. 결국은 다 잘 되려고 그러는 것이다...라고 주문을 외면서 말이다.


실제로, 짐을 넣기로 했던 곳이 공사가 미뤄지면서 계획처럼 준비가 되지 않아서 짐이 당장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서 만일 일이 순조롭게 풀려서 당일 이사를 해야 했으면 짐을 보관소에 넣고 다시 이사를 해야 할뻔 했다. 그러면 비용이 이중으로 들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일이 꼬임으로써 그 비용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으니 더 잘 되었다고 해석을 할 수도 있으리라.


나는 이사 준비를 마친 채 한국을 떠나왔다. 짐은 모두 쌌고, 버릴 가구들에는 스티커를 사서 붙였다. 집 안에는 CCTV를 계속 유지해뒀다. 그래야 부동산에서 집을 보러 올 때 서로 마음이 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되도록 모든 일처리를 미리 다 해서, 동생이 고생을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 일요일, 이 모든 일을 마무리 지었다. 이사는 동생의 관리하에 진행되었다. 꼼꼼한 동생은 고맙게도 바쁜 시간을 쪼개서 한 시간 거리의 언니 집에 와서 미리 모든 것들을 차근차근 챙겼다. 나는 CCTV로 보면서 이사에 참여했다.


동생의 꼼꼼한 관리 덕분에 이사가 잘 마무리되었다.


집주인은 지방에 가 있다고 했다. 이사 과정을 지켜보고 나서 돈을 주려나 했는데, 일이 끝나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끝까지 마음이 조마조마 했는데, 마지막 전기검침 인수인계까지 끝나고 나니 돈이 들어왔다.


드디어 끝났구나. 이 집과의 복잡했던 인연이 이렇게 끝났다. 이혼 후에 짐을 정리해서 들어오면서 마음이 복잡했고, 지금의 남편과 사귀게 되면서 그가 방문하기도 했던 곳이었다. 딸아이가 코비드로 갑자기 귀국하면서 나와 이산가족이 되었을 때 머물면서 아픔을 극복하려 애쓰던 곳이기도 하다. 내가 없는 동안 관리가 안 되어서 곰팡이가 슬고 엉망이 되었을 때 친구들이 와서 정리를 해주기도 했으며, 가장 마지막에는 남동생네 내외가 와서 지내면서 깔끔하게 관리를 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평생 처음으로 지급명령서를 써보게 만들었던 집이었다. 몇 달간을 애태우게 만들었던 그곳과의 인연이 결국은 잘 마무리된 것에 감사한다. 그리고 나는 또 인생을 한 뼘 배운 것 같다. 내가 모르던 세계를 접하고, 내가 사람들을 대하는 법을 다시 돌아보았다.


내 눈으로 보는 세상도, 내 눈으로 보는 사람도 내가 어디에 서있느냐에 따라서, 어느 각도로 쳐다보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같은 사물도 카메라로 찍을 때 앵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모양처럼 전해지듯이, 렌즈에 따라서 직각도 둔각으로 변하듯이 말이다.


내가 만났던 집주인이 정말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나는 그녀의 마스크 쓴 모습만 보았고, 집에 관한 대화만 나눴으니까.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실제로 상대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머리로 알고 있던 것을 실제로 다시 경험하였으니 다음번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으리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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