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는다고 모든 것이 해결될까?
캐나다 살이가 벌써 만 4년을 채워가고 있는데, 외국 살이를 하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한국의 장벽이 참으로 높다는 것이다. 나는 프랑스에서도 살아보았고, 미국에서도 살아보았고, 지금은 캐나다에 살고 있다.
외국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차별을 확연히 느끼며 산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 나라에서는 저절로 알던 것을, 외국에서는 모두 따로 습득해야 한다는 것도 그렇다.
한국에 있으면 발생해도 괜찮을만한 일들이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접촉 사고가 살짝만 나도 막막하다 싶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엄마들은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칫밥으로 알지 못하기에 긴장한다. 그래서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렇게 말했다.
"외국에 사는 사람은 구명줄 없이 허공을 걷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가족과 직장 동료와 친구, 어릴 적부터 알아서 어렵지 않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지닌 나라, 즉 조국이 모든 인간에게 제공하는 구명줄이 없다."
이렇게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꼭 어느 나라, 어느 국민에게만 특별히 해당되는 일은 아닐 것이리라. 하지만 나라마다 더 편하고, 더 고맙고, 더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것들은 각각 다르다.
이번에 외국인 남편과 함께 한국을 방문하면서,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많은 점들을 발견했다. 외국인으로서 한국 체험하기를 나도 남편과 함께 하게 된 셈이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외국인에게 친절했다. 요청하지 않아도 도우려고 했고, 외국인이니 어눌해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생각해서 잘 기다려주기도 했다. 배려하는 문화가 깊게 밴 한국인들의 습관이어서 그럴 것이다.
그런 반면, 막상 돈을 써야 하는 부분에서는 어이없이 불편했다.
일반적으로 식당에서는 외국의 카드 사용에 별 어려움이 없었는데,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통용되는 비자카드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상점에서 사용이 불가능했다. 특히 관광객이 많이 오는 박물관 기념품 가게 같은 곳도 안 된다는 것이 황당했다.
그리고 온라인 쇼핑은 거의 불가능했다. 여행을 하려면 숙소도 예약해야 하고, 차 렌트도 해야 하는데, 앱으로 하는 일에는 외국인 카드는 무용지물이었다. 복잡한 인증을 통과하기 어려웠고, 대부분 전화로 인증을 해야 하는데, 일단 외국인 명의로는 핸드폰 개통도 거의 안 되는 것 같았다.
사실 이런 서비스들은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에게 돈을 못 쓰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물론 신원확인을 해야 하는 절차가 필요하지만, 외국에서 신원이 확실한 신분증으로도 가능하지 않았다. 우버가 없는 한국에서 카카오 택시를 탈 수 없다는 것은 그중에서도 큰 불편함이라고 볼 수 있다.
차를 렌트해서 지도 앱을 사용했는데, 설정을 영어로 하면, 내용이 부실해졌으며, 심지어 지도의 지명은 모두 한글로 떴다. 그냥 말만 영어로 나올 뿐이었고, 때로는 길을 찾지 못해서 같은 곳을 계속 뱅뱅 돌리기도 했다.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구글 앱이 한국에서는 무용지물인데, 그렇다면 이런 기회에 한국의 지도 앱을 잘 홍보할 수 있게 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그밖에 느낀 불친절함이라면, 고궁이나 사찰 등의 입장료에서 외국인은 경로우대가 적용되지 않아 실소가 나왔다. 뭐 입장료가 그리 비싼 편은 아니지만, 참 인심이 야박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경로할인과 청소년, 학생 할인은 국적을 막론하고 적용되는데,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미덕인 한국에서 이런 일이 있다니!
그래도 남편은 나와 함께 다녔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골치 아픈 일은 캐나다에 돌아와서 생겼다.
내가 한국에 갔던 목적이, 그간 내 짐을 보관하고 있던 집을 정리하고, 보다 작은 곳으로 짐을 옮기는 것이었다.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사용하려고 뒀던 공간이었지만, 그리 자주 방문하지 못하다 보니 관리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전세로 얻은 집이어서 가지고 있는다고 해서 가치가 오르는 것도 아니고, 주변에 민폐만 되는 것 같아서 정리를 하려고 하였지만, 요새 부동산 대란으로 인해 전세가 빠지지 않아서, 집주인에게 제때 돈을 못 받고, 그나마 여러 가지로 애를 써서 한 달 후에 받고 집을 빼기로 한 상황이었다.
이사는 동생이 가서 관리해주기로 했지만, 그래도 꼭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특히, 인터넷을 해지해야 하는 것이 제일 큰 난관이었다.
반드시 본인이 세 자리 번호인 고객센터로 전화를 해서 직접 해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전화가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예전엔 분명히 국가 번호와 지역번호 누른 후에 세 자리 번호를 넣으면 연결이 되었는데 계속 에러라는 안내가 나왔다.
처음에는 내가 사용하는 캐나다 전화 회사에서 세 자리 번호를 막은 줄 알고 그곳에 항의를 했는데, 한국에서 모든 세 자리 번호를 외국에서 걸지 못하게 막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나 인터넷에는 아무 곳에도 그런 안내가 나와있지 않았고, 나는 전화를 걸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해서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상관없는 부서를 찾아서 전화를 걸었고, 거기서 외국에서 연결이 가능한 번호를 부여받아서 해결되었다. 이렇게 외국에서도 전화가 가능하게 해 줄 일이라면 그 번호는 왜 굳이 해외 연결 금지를 해야 했을까? 아무런 안내도 없이 슬그머니 변경된 사항이었다.
연달아 전기와 수도도 해지를 해야 했는데, 일요일에도 서비스가 되는지 알기 위해서 시도했으나 그것들도 역시 세 자리 번호였다. 각각 사이트를 뒤져서 일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고, 다시 새 번호를 부여받아 전화를 하는 방식으로 모두 해결하고 나니 두 시간 반이 지나갔다. 그야말로 기진맥진 상태가 되었다.
생각해보니 가기 전에도 렌터카 예약했을 때에도 문제가 있었다. 050으로 시작되는 안심번호를 사용하는 업체와 연결이 되지 않아서, 공항 도착시간 변경을 하느라 몹시 애를 먹었었다. 안심번호라는 것이 연결되어도 번호 노출이 되지 않아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전화 연결이 안 되게 하는 것이 목표일까? 이런 회사들은 심지어 이메일 서비스도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국제화 시대에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나가서 외국 살이를 하고, 또 한류를 타고 수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을 방문하는데, 우리나라는 폐쇄적으로 국가 문을 꽁꽁 닫고 있다는 인상이 들었다.
물론, 해킹이나 여러 가지 문제가 세계적으로 만연해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그런 문제를 보다 합리적으로 풀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무조건 차단해서 해결하자고 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해킹이나 스캠을 막는 것을, 기관에서 하지 않고 그 책임을 전부 소비자에게 전가하느라 발생하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해킹과 스캠의 피해는 계속 발생하고 있다.
우리 속담에,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다 태운다"라는 말이 있다. 외국의 해킹을 막기 위해서 외국인들은 아예 쇼핑을 하지 못하게 하는 서비스는 정말 초가삼간을 태우며 시원해하는 것과 뭐가 다를지 모르겠다. 통제는 점점 더 심해지고 우리는 그 통제에 그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