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는 안 그래도 먹을 일이 많은데, 거기에 결혼기념일과 생일까지 끼어 있으니 정말 반 달 만에 베둘레헴 장착은 물론이고, 굴러갈 지경이 되는 것은 피할 길이 없었다. 게다가 딸이 와서 지내는 기간이니 더욱 그러했다. 오죽하면 매일 뭘 먹을지 캘린더를 만들어서 관리했겠는가! 안 그러면 다 먹여 보내지 못할 거 같다는 부모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딸 인스타그램에도 이렇게 고민하는 부모의 모습이 올라왔다! 이대로 가다간 1월에 문을 통과하지 못할 것 같다는 푸념 아닌 푸념과 함께 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번 생일 만찬은 건너뛰자고 말해봤다. 그러나 결혼 기념 만찬도 건너뛴 마당에 생일까지 그렇게 해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러면 집밥 그만 먹고 한번 외식을 할까 하는 제안도 해봤다. (우린 원래 외식이 연례행사 수준이다) 내 생일엔 거의 프렌치 스타일로 했으니, 시내의 좀 가벼운 프렌치 식당을 가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지만, 막상 예약을 하려고 보니, 역시 프랑스 사람들답게 연말연시 동안 통으로 한 달간 문을 닫았다는 사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집에서 '간단하게' 프랑스 스타일로 차리자고 합의를 보았다. 이 사람들 성격상 간단하게 할 리가 없지만, 이번엔 메뉴판도 안 만들고, 치즈 코스도 빼고, 나름 대폭 줄였다고 했다. 남편이 필레미뇽으로 메인을 만들고, 딸이 케이크를 만들기로 결정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니 미역국을 빼먹으면 안 되지 않겠는가? 결국 남편과 딸이 점심으로 미역국 밥상을 먼저 차렸다. 있는 반찬 털어서 먹기로 했는데, 서운하니 두부나 하나 부치고, 불린 미역이 많으니 초무침 하나 얹고, 새해에 먹었던 남은 반찬 꺼내서 차려졌다.
작년엔 딸이 아파서 남편이 미역국을 끓여줬는데, 올해는 딸이 미역국을 끓이고 남편은 두부를 부쳤다. 서로 도와가며, 참견해 가며 준비한 식사는 딱 먹기 좋은 생일점심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각자 바쁘게 준비에 돌입해서, 여전히 든든하게 먹는 저녁 만찬이 완성되었다. 전식은 집에서 훈제한 연어였고, 그 이후에 버섯 수프가 따라왔다. 버섯수프에는 이번에 생표고를 좀 넣었다는데, 풍미가 아주 좋았다. 메인인 필레미뇽은 베이컨으로 감싸서 그릴에 구웠고, 내가 늘 낭만적이라 생각하는 채소인 아스파라거스가 따라왔다. 그렇게 배불리 먹고 난 후에는 입가심을 위한 샐러드가 등장했다. 샐러드는 메인 전에 먹기도 하지만, 이렇게 식사와 디저트 사이에 입을 씻는 역할로 사용되기도 한다.
딸이 만든 시바의 여왕 케이크를 자르기 전에 선물을 먼저 열어보자고 했다. 사실 이번엔 아무도 내게 생일 선물 뭐 필요하냐고 묻지 않았기 때문에, 뭘 받을까에 대한 고민도 해본 적이 없었다. 딱히 필요한 것도 없었기에 남편과 딸이 뭘 준비했을지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제일 먼저 노바스코샤의 시누이에게서 날아온 선물을 열었는데, 수선화와 래넌큘러스 뿌리였다. 실내에서 키워서 꽃을 볼 수 있는 작은 화분과 함께 왔다. 꽃 선물은 언제나 즐겁다.
남편은 거대한 박스를 내밀었는데, 그 안에서 재봉틀 책상용 받침이 나왔다. 내가 한국에 있는 내 재봉틀을 가져오면서, 어쩔 수 없이 재봉틀 전용 책상을 포기했는데, 남편이 그걸 만들어주려고 그것에 필요한 투명 아크릴 받침을 주문한 것이다. 내 재봉틀 모델에 딱 맞는 받침, 즉, 생일 선물의 선언인 셈이었다.
마지막으로 딸이 내민 박스를 열자 그 안에서 손으로 뜬 수세미가 나왔다. 리넨실이어서 아크릴수세미보다 친환경적이고 좋다고 말하며 뜨던 것을 기억하였기에 그런가 보다 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이미 돈을 많이 썼는데 또 돈을 쓰기를 원하지 않았기에 고맙다고 말하며 즐겁게 펼쳤더니, 진짜 선물은 그 밑에 있다고 하였다. 뭐지? 그 아래에는 카드가 들어있었고, 그 카드에 인터넷 주소가 쓰여있었다.
내가 오랫동안 내 개인 홈페이지로 사용했고, 이제는 닫아둔 바로 그 도메인이었다.
예전에 남들이 노션 같은 앱을 이용해서 프로필 페이지를 만든다는 것을 보면서, 나도 이런 거 하나 만들어볼까 했었다. 그랬더니 딸내미가 보면서, "엄마는 딸이 있는데 그런 프로그램을 뭐 하러 써요?" 이랬었다. 뭘 넣고 싶으냐 물어봐서 대충 말해줬었다. 그게 지난여름의 이야기였는데, 그러고 나서 딸은 정신없이 바쁜 한 학기를 보냈고 사실 전혀 중요한 것도 아니었기에 나도 그저 잊고 지냈다. 그러더니 최근 들어서 이 사진을 내놔라, 저 사진을 내놔라 하길래, 뭔가 나오긴 하려나보다 싶었는데, 그간 나에게 보여주지 않으면서 내 페이지를 근사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아빠는 미리 보여줬단다)
나는 얼른 어수선한 컴퓨터 앞으로 달려가서 주소를 타이핑했다. 링크가 열리고, 내가 좋아하는 정원의 사진과 더불어 제목이 떴다. 가슴이 설레었다. 아래쪽으로 스크롤을 내리니, 내가 전에 적었던 내 소개를 담은 글이 나오고, 다시 이어서 내가 브런치에 쓴 매거진과 브런치북이 예쁘게 정리되어 이어졌다. 내가 찍은 사진들로 배경을 삼아서 나에겐 더할 나위 없이 친숙한 공간이 되었다.
클릭하면 간단한 소개가 나오고, 다시 브런치로 직접 와서 읽을 수 있는 링크까지, 딱 내 취향의 프로필 페이지였다. 옆에서 멋쩍게 웃으며, 아직 완결이라 하기엔 부족하니 평생 A/S 해주겠다는 딸아이를 나는 와락 껴안았다.
나는 딸아이를 통해 사랑을 배웠다. 딸아이는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랐다. 아낌없이 주는 사랑. 무뚝뚝한 거 같은 순간들 속에서 끊임없이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들어있다. 그래서 늘 나를 감동시키고 활짝 웃게 만든다.
엄마가 좋아할 만한 것이 무얼지 생각하고 고민한 흔적이 사방에서 보였다.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만들어진 나의 프로필 페이지, 정말 멋진 생일 선물이었다.
이로서 올해 받은 생일 선물들은, 모두 뒤에 애프터서비스가 따라오는 것이 되었다. 재봉틀 책상이 완성되면 또 얼마나 근사할지! 사랑은 아름답다!
요새 맨날 닭살글만 올려서 죄송합니다. 어서 정신을 수습해야 할 거 같습니다. ㅎㅎ 제 웹페이지는 브런치 작가소개 페이지 맨 밑에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글의 업데이트 상황을 알리는 사이트는 아니고, 어디엔가 저를 소개할 때 사용할 페이지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