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일을 바라보는 시각은 참 다양하다. 같은 일이 일어나도 많이 절망하는 사람도 있고, 화가 나는 사람도 있는 반면, 그냥 좀 더 편한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파도를 타듯이 파도에 몸을 싣고 따라가는 사람도 있다.
오래전이라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성악가 조수미 씨가 처음 유학길에 올랐을 때, 로마에 도착한 시간이 새벽 3시였다고 했다. 어둡고, 비는 내리고, 숙소는 정해지지 않았고... 그때 한 생각이 바로 이거였다고 했다.
일이 재미있어지겠구나
어린 나이에 막막하던 유학길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정말 강철 멘탈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이러니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자신에 대한 신뢰, 미래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게 바로 진정한 자존감의 발현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이런 자존감을 처음부터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배울 수는 있지 않을까? 조수미 씨의 일화는 딸이 듣고 내게 전해준 것인데, 그 이후로, 우리는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이 말을 한다.
최근에 딸이 픽사 인턴쉽을 하러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지낼 곳을 찾아야 하는데 단기로 묵을 곳을 찾으니 더욱 비싸서 참으로 난감하였다. 대부분 월 300만 원은 기본으로 넘었는데, 그나마도 안전한 동네에 구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러다가 그보다 좀 저렴한 곳을 극적으로 구하게 되었다. 한국인 유학생 부부가 사는 원룸 아파트인데, 방학 동안 한국에 가니 그 기간 동안 세를 준다고 한 것이다.
아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선금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선한 사람들 같아서 잘 되었다고 좋아했는데, 막상 비행기에 내려서 도착한 후에 사단이 생기고 말았다. 그 사람의 친구에게서 열쇠를 전해 받았는데, 그 열쇠가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번호키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한국의 집주인(사실 주인은 아니고 이 아파트를 원래 렌트한 사람이지만, 편의상 주인이라고 부름)은 주말 이른 새벽이라 전화를 안 받고, 그렇게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아파트 직원에게 들통이 나게 되었다.
이렇게 방학 동안 서브 렌트를 하는 것이 미국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이다. 원래 규정상 안 되는 것을 많은 곳에서 대충 눈 감아주는 편인데, 이 아파트의 매니저는 엄청 깐깐한 사람이었고, 딸아이는 갑자기 갈 곳이 없어져버렸다.
이미 방값은 지불한 상태였고, 아파트에서는 넣어주지 않는다고 하고! 정말 일이 재미(!)있어 지게 된 것이었다.
그러다가 사무실에서 제시한 방법은, 이 아파트가 원래 3인까지 같이 살 수 있는 공간이므로, 딸아이를 3번째 세입자로 등록을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무척 간단한 일처럼 보였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딸의 신원조회 및 모든 정식 절차를 다 거쳐야 했다. 그리고 이미 금요일이었고, 사무실은 일/월이 휴무였다.
당장 묵을 곳이 없는 막막한 상황이었다. 돈을 돌려달라고 한들 돌려받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해도 석 달 묵을 다른 숙소를 당장 찾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집주인 입장에서도, 돈을 돌려주고 내보낸다면, 그다음에 새로 다른 사람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아파트 사무실에 소문이 다 났으니, 석 달간 집을 비워두면서 월세를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행이었던 것은, 집주인도, 그리고 우리 딸도 안달을 하지 않고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었다. 서로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었고, 차분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일단 집주인이 사태를 파악하고, 딸아이에게 가까운 호텔에서 묵으면서 기다려달라고 말하며 정중히 사과를 했다. 호텔비는 다음 달 방값에서 제하고 넣어주면 된다고 했다.
전산오류로 신원조회가 늦어져서 결국은 토요일에도 해결을 못했고, 다음 근무일인 화요일까지 기다려야 하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가기 직전까지 밤샘 일을 하여 기진맥진했던 딸은 피곤이 쌓이긴 했지만, 호텔 기간이 길어지게 되고, 주중 가격이 올라가자 자진해서 호텔을 좀 저렴한 곳으로 옮겼다. 아무리 집주인이 내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게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첫 출근은 그 호텔에서 하였고, 결국 화요일에 되어서야 서류가 풀려서, 회사에서 근무하다 말고 아파트 계약하러 달려갔다 와야 했고, 일들이 중간에 많이 꼬였지만 그래도 결국 무사히 입주하게 되었으니 이 정도면 해피엔딩 사건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을 편히 먹고 기다리는 동안 딸은 자전거도 사고, 온라인으로 다른 일처리도 하고, 회사 갈 준비도 부지런히 했다. 집에서처럼 마음 편히 쉬지는 못했지만, 마음을 바꿔먹고 안달을 하지 않는 쪽으로 정하고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왜 이렇게 일이 꼬이느냐고 해봐야 달라질 것은 없다. 신경질만 늘겠지. 결국은 어딘가에 들어가서 자리 잡고 회사를 다니게 되겠거니 생각하면서 마음이 편안하게 갖는 것이 최선책인 것이다.
아파트에 들어간 딸아이는, 집주인이 라면과 김치 등과 함께, 뭐든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다 드시라는 쪽지를 남겨두었다고 했다. 심지어 코스트코 카드까지 남겨두었다며 웃었다. 모든 힘든 일에도 긍정적인 부분이 있게 마련이며, 또 그걸 믿고 멀리 보고 기다리기,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 표지는 자전거 구매 기념으로 픽사 앞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 열흘 전에 쓰다 만 글을 간신히 마무리했습니다. 글이 무척 안 써지네요. 어떻게든 다시 돌아오려고 애쓰는 중입니다. 기다리시는 독자분들께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