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동물들의 둥지에 대한 책을 읽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동물들의 둥지 중에 100여 가지를 뽑아 소개한 것인데 책을 읽는 동안 동물들의 지혜와 마음 씀씀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간략히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오목눈이의 한 종류는 둥지에 가짜 입구를 만들어 안에 아무 것도 없는 듯 보이게 해 천적의 눈을 속이기도 하고, 붉은가마새는 진입로가 있는 구조를 통해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추울 때는 햇볕을 더 받게 하고 더울 때는 덜 받게 하는 비석 구조로 된 둥지를 만드는 흰개미류도 있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바우어새들은 구애를 하기 위해 특이한 형태의 구조물을 만든 후 형형색색의 과일이나 식물, 꽃, 달팽이 껍데기 등으로 예쁘게 꾸미기도 하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미(美)는 인간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동물들이 알과 새끼를 위해 애쓰는 모습이었다. 1500kg에 달하는 돌을 쌓아 물 위에 둥지를 틀어 천적으로부터 보호하려 하고, 안전을 위해 수컷이 하루에 70번이나 둥지로 먹이를 물어다 주기도 하고, 새끼들이 춥지 않게 마른 풀이나 깃털, 이끼 등을 꼭 깔아주곤 하는 모습과 우리 사회의 수많은 자식 학대 뉴스를 비교해보면 인간은 생물의 주요 사명 중 하나인 ‘돌봄’마저 소홀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진다. 지구의 환경을 좌지우지하며 가장 능력 있는 듯이 행동하는 인간이 스스로 만든 도덕적 기준에서 다른 생물에 비해 몹쓸 모습을 보여주는 측면은 또 다른 문제겠지만 말이다.
동물들이 주어진 환경에 맞춰 지혜를 발휘해 둥지를 튼다는 사실을 접하고 보니, 새삼 인간이 아주 먼 옛날부터 동물들로부터 많은 도움과 영감을 받아왔음에도 고마움을 잊은 채 오히려 무시하고 학대한다는 사실이 달갑지 않다. 언어에도 그런 측면이 반영되어 있다. ‘개돼지’라는 말이 미련하고 못난 사람을 지칭하고, ‘개같다’는 말이 좋은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쓰이지 않고, ‘새대가리’라는 표현이 사전에서조차 ‘우둔한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되어 있다는 것(영어에도 birdbrain이라는 표현이 어리석은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을 보고 놀랐다)만 봐도 그렇다. 인간이 놀리는 용도로 쓸 만큼 새가 우둔한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주어진 환경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의 인지’를 지능의 척도로 정의한다면(어차피 IQ를 지능지수로 정한 것도 정의에 불과하므로), 새가 인간보다 지능이 떨어진다고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 삶의 터전인 지구가 계속 훼손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킨다면, 언어 또한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 (『정치와 영어』 中)”는 조지 오웰의 말을 보면 동물 비하 발언과 동물 학대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사실 동물 비하 발언만큼이나 학대 행위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일전에 인터넷 방송 BJ가 맹견을 데리고 고양이를 학대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는데, ‘동물 학대’라고 검색만 해도 수없이 많은 사례가 나온다. 프랑스에서도 새끼양과 관련된 학대 사건이 있었다. 이런 사건을 보면 동물을 무언가 인간보다 낮은 존재 또는 감정이나 지능이 떨어지는 완전히 다른 생명체로 보는 인식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팽배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생명 존중 사상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봤을 사람들이 자신의 관리 하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괴롭히는 것만 봐도, 많은 인간들이 다른 생명체의 기분과 감정에 별 관심이 없다는 건 꽤 당연하게 느껴진다. 존중의 일반적인 의미로 봤을 때, 생명 존중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도 그다지 지켜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다른 생명을 존중해야 하는 것일까. 아마도 모든 생명은 기본적으로 삶을 이어나가려는 의지를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수명을 채우려고 한다. 치열하게 노력하기까진 아니어도 삶을 시작한 이상 일단은 끌고 간다는 얘기다. 그러한 의지를 침해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개체의 생존 그 자체 외에는 없어야 한다(도덕적 기준은 제외하면). 생명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다른 개체의 의지를 침해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의 귀중함을 침범하는 것을 자연의 섭리 또는 본능이라고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돼지와 소 등을 잡아먹는 것도, 악어가 가젤을 잡아먹는 것도, 상어 새끼끼리 물어뜯는 것도 크게 잘못된 일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살고 싶어 하는 만큼 다른 생명체도 살고 싶어 한다는 것, 내가 괴롭힘 당하고 싶지 않은 만큼 다른 생명체도 고통 받기를 싫어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다른 생명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해진다.
물론 위에서 말한 ‘생존’이라는 것의 범위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따른 논의가 분분할 것 또한 분명하다. 나는 여기서 ‘생존’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신체적 에너지의 충족’과 ‘생명의 위협에 대한 저항’이라고 얘기하고 싶다(애매한 면이 없지는 않다). 이 정도까지만 타인의 삶을 침범할 수 있는 권리를 허용하고 싶다. 그리고 여기에 생명 존중의 태도를 얹고 싶다. 나머지에 대해서는,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고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살아 있는 새끼양의 도축 사건을 보면 존중의 태도에서 한참 어긋난 일이라, 사건 당사자가 져야 할 책임이 어마어마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보며 동물 학대가 너무 지나친 건 아닌지 우려하다가, 주변의 훈훈한 모습을 볼 때면 비하 및 학대 문제가 사회 일부만의 문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한 무리의 오리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차도를 건널 때 좌우로 늘어선 차들이 참을성 있게 기다려 준다거나, 물 위를 헤엄쳐 다니는 오리들을 산책 나온 가족들이 지켜보며 즐거워하는 모습 등에서 공존의 평화로움이 느껴지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학교에 사는 고양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다. 우연히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보게 되었는데, 어떤 분이 학교 정문의 하수구에 있던 아기 고양이를 구해준 후에 본인도 돌봐줄 것인데 다른 분들께서도 같이 돌봐주면 고양이가 잘 자랄 것 같다는 따뜻한 글이었다. 댓글로는 다른 분이 정문께에 있던 한 아기 고양이를 병원에 데려가 검진 결과를 기다리고 있으며, 임시 보호 중인데 생김새는 이러이러하고 가족으로 추정되는 고양이 무리가 있으면 제보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정말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들이다. 먹이와 물을 챙겨다가 교내에 거주하는 고양이들에게 나누어주는 분들도 자주 보았다. 이런 장면들은 언제 보아도 훈훈한 모습인데, 다른 생명체와 인간을 동등하게 본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직∙간접적으로 동물을 학대하지 않는 사람들이 학대하는 자들에게 날선 비난과 비판을 퍼부어 부끄러움을 깨닫게 해 준다면, 그것으로 인간은 동물 학대의 책임감에서 벗어나 두 다리를 쭉 뻗고 지낼 수 있을까. 애석하게도 현재의 상황에선 그러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학대 행위의 범위를 재고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며칠 전 한낮에 부/모 고양이(아버지인지 어머니인지 알지 못한다)와 아기 고양이가 꼭 껴안은 채 덤불 그늘에서 축 늘어져 누워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연일 지속되는 폭염이 그들을 지치게 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동물들도 더위에는 보양식을 먹는다는 뉴스를 보면 그들도 사람처럼 더위에 지치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폭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매년 달라지는 기상 이변의 원인에 대해 인간이 져야 할 책임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사계는 각각의 특색을 잃고 경계도 희미해져 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도 기상 이변이 속출하고 있다. 과학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문명권에 사는 인간이라면 발을 빼기 힘들다. 지구의 환경을 변화시켜 온 문명의 이기를 누렸으며 앞으로도 계속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져야 할 책임감은 더 적을 수 있다). 인간 사회는 이제 과거의 방식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은 택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너무 익숙해졌고 계속해서 불거지는 문제들을 뒤로 돌아가는 방식보다는 새로운 기술을 통해 해결하려고 한다.
이러한 방식이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 중심의 발전에 있다. 인간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폭염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문명 발전에 의한 혜택은 고스란히 받는다. 하지만 우리가 침해할 권리가 없는 지구 상의 다른 생명체의 삶은 아무런 혜택 없이 고통 받기만 할 뿐이다. 그들의 삶에 침범하는 인간의 선택이 생존과 얼마만큼 직결되어 있을까. 아기 북극곰들은 플라스틱을 뜯어먹고 새끼 상어는 비닐 봉지를 삼킨다. 어떤 맛인지 인간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수명이 30년가량 증가한 100년 동안 동물들의 수명은 얼마나 증가했을까. 덤불 그늘 아래 축 늘어져 있던 부/모 고양이와 아기 고양이를 떠올려 보자. 왜 그들은 다른 생명체가 불러온 기후의 변화로 인해 고통 받아야 할까. IQ가 부족하기 때문일까,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인간에게 그렇게 할 권리가 없는 이상 그러한 행동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구와 그 안의 생명체에게 미칠 인간의 선택에 대해 책임질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그들에게 ‘자연’이란 문명사회 자체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더운 날씨다. 그 부/모 고양이와 아기 고양이는 어디서 더위를 피하고 있을지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