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에 대하여

by 오로

인간의 수명은 한정적이고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제한적이라는 것,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일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현재의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게다가 필수적으로 써야만 하는 시간, 즉 자고, 씻고, 먹고, 일하는 시간을 빼면 그 문제는 더욱 중대해진다. 시간을 어떻게 쓰는가는 어떤 인생을 사느냐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자투리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할 텐데, 자투리 시간 중에서도 ‘기다리는 시간’은 생활 곳곳에 숨어 있어 알아차리기 힘들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무언가를 기다리는 경우, 예를 들어 지하철을 기다리거나 밥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등, 기다림은 하루에도 몇 번씩 있고 그 시간을 모두 합치면 상당한 양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기다리는 시간을 대하고 있을까.


먼저 ‘기다리는 시간’의 의미를 명확히 해보자. 기다리는 행위는 면접 결과나 방학을 기다리는 가슴 설레는(울렁이는) 것부터 버스나 메신저의 메시지를 기다리는 일상적인 것 등 시간적 길이도 다양하고 그 의미도 상당히 다르다. ‘기다리다’의 사전적 의미(네이버 국어사전 참고)가 ‘어떤 사람이나 때가 오기를 바라다’ 임을 보면 각각의 성질이 모두 다르긴 하나,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인지한 순간부터 그 바라는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의 시간은 무엇이든 ‘기다리는 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컴퓨터 포맷 후 윈도 설치의 백분율이 차오르는 시간조차도, 빨리 설치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기다리는 시간이다. 따라서 온갖 하찮게 여겨지는 짧은 시간도 기다리는 시간에 들어가며 그 행위 전체는 ‘기다림’이라고 생각하자.


‘기다리는 시간’이 생활 곳곳에 있는 것은 인간이 미래의 일을 계속 염두에 두고 계획을 잡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 간의 복잡한 관계를 고려하면, 끝없이 생겨나는 일들로 인해 ‘기다림’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 과정에서 짧은 시간이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속출하게 되며, 그 시간을 모으면 긴 시간이 될 테지만, 오히려 그 하나하나는 짧기 때문에 중요하게 인식되지 못하고 그냥 흘려 넘기는 경우가 많다. 내 경우에 하루에 1-2시간 정도는 기다리는 시간으로 넣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루 1-2시간이라면 그냥 휴식을 한다 해도 심신의 회복을 위해 그리 아깝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까워할 수 있는 이유도 있는데, 그 시간들은 다른 행위를 하는 데에도 충분히 쓸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적이 있다. PC에 문제가 생겨 포맷을 해야 했고, 귀가할 시간을 늦춰가며 컴퓨터를 붙잡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다음날을 위해 꼭 해결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전에 아무 문제없이 설치 가능했던 시스템이 이날만큼은 계속 설치 도중 90% 구간에서 오류 메시지를 보였다. 이 문제가 서너 번 반복되자 나는 다른 조치를 취한 후, 노려보기를 포기한 채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도무지 책에 집중할 수 없었다. 90%까지는 적어도 몇 분은 아무 문제없이 지나갈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손에는 책을 쥐고 곁눈으로 계속해서 10%, 20%, …, 숫자의 진행 상황을 쫓고 있었다. 눈으로 그 수치의 증가를 보고 있음으로 해서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미 경험적으로 확인한 것을 재차 확인함으로써 생기는 당연한 안도감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그 시간 동안 눈으로 활자를 좇았다면 책을 몇 페이지는 읽었을 것이다. 나는 없어도 무방한 안도감을 구하기 위해 책 몇 페이지와 맞바꾼 것이고 그만큼을 읽는 데 필요한 시간은 미래에 충당해야 할 시간이었다.


문제는 이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는 것이다.


왜 나는 그토록 책에 집중하지 못했을까. 불안감이 옥죄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경험으로부터 발생한 불안감은 매 설치 시도마다 신경을 자극하고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모니터를 보는 것과 책을 읽는 것, 두 경우에 대해 0%에서 90%까지의 시간의 양은 ‘시간’의 측면에서는 동일한 성질의 것이었다. 그 시간의 흐름이 다를 리 없고 기다림의 끝도 90%라는 한 시점으로 같기 때문이다. 그 객관적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나의 해석이었고, 시간 절약의 관점에서 보면 모니터에 시선을 빼앗기는 행위는 아쉬운 판단이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림’에 대해 살펴보자. 기다림은 시간 순서대로 ‘기다리는 대상의 인식’, ‘기다리는 시간’, ‘기다리는 대상의 도래’로 나눌 수 있다. ‘기다리는 대상의 인식’과 ‘기다리는 대상의 도래’는 각각 시간 축에서의 한 점에 해당하고 ‘기다리는 시간’은 두 점 사이를 잇는 시간의 길이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이지, 해당되는 시간의 길이는 대상의 인식과 도래가 있든 없든 두 시점 사이의 시간의 길이와 동일하다(이름이 붙는다고 시간이 길어지거나 짧아지는 것은 아니다).


기다림은 기다리는 대상이 인식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데 이때 ‘기다리는 시간’은 대상이 없을 때(즉 기다림이 아닐 때의 시간의 흐름)와 비교해서 그 흐름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위의 경험에서 설치 시의 숫자가 차오르는 것이 더디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이 원인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기다리는 대상의 도래’와 ‘기다리는 시간’이 불러일으키는 기분이나 감정이라 할 수 있다.


‘기다리는 대상의 인식’의 순간, 대상의 도래에 대한 생각과 감정이 생긴다. 위의 경험에서는 ‘또 오류가 생기면 어쩌지’하는 불안감이고, 썸을 타는 상대방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상황이라면 호기심을 동반한 기쁨일 것이고, 면접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면 기대와 초조 사이에서의 배회일 것이다. ‘기다리는 시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대상의 도래가 확실한 상황에서 그 중간 과정에 해당하는 시간은 나에게 어떤 기분이나 감정을 불러오곤 한다.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리는 경우 남은 시간을 보고 또 기다려야 한다는 귀찮음 같은 것이다. 이러한 감정이나 기분이 ‘기다리는 시간’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짓는다. 대부분의 경우, 기다리는 대상의 도래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사람을 계속 신경 쓰이게 하므로 의식적으로 그 시간을 흘려보내려고 하게 된다. 다른 행위를 통해 기다리는 시간을 단축시키는 효과를 얻고자 한다. 메시지가 도착하길 기다리는 동안, 상대방이 언제 보낼지 확실하지 않음에도 불필요하게 모바일 게임을 하면서 계속 확인하거나, 버스가 올 때까지의 남는 시간에 평소에는 보지도 않던 웹사이트를 뒤적인다든가 하는 것이다. 모니터 화면을 계속해서 지켜보던 내 행동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의식한 행동이다.


특히 ‘기다리는 대상의 도래’에 의한 감정의 동요는, 확실히 일어나긴 하지만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더욱 커진다. 면접 결과가 ‘7월 중순 발표’라면, 7월 10일이 지나면 슬슬 중압감을 느끼기 시작하고 14일쯤 되면 친구들과 떠들며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머릿속에선 결과에 대한 불안이 소용돌이친다. 답변을 기다리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형태로 올지, 언제 올지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되기 쉽다. 이러한 ‘기다리는 시간’에는 다른 때보다 자신의 일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기다리는 일이 없다면 잔잔한 수면 같아야 할 마음의 상태에 기다림이 개입되자 파문이 일기 시작하는 것인데, 이는 감정으로 인해 시간을 주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을 주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시간을 ‘이미 지나가버린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과 같다. 기다리는 대상에 대해 바라는 마음이 그 대면이 빨리(또는 천천히) 이루어지기를 원하게 만들고,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의식적인 행동으로 그 과정을 넘기고 싶어 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다리는 시간’의 실제 시간적 길이를 원래대로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수많은 ‘기다리는 시간’들이 좀 더 유용한 시간이 되지 못하고 산화하고 만다.


감정의 동요에서 벗어나 ‘기다리는 시간’을 아껴 쓰는 것은, 시간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때 가능하다. 시간은 무자비할 정도로 정확하다. (찰나에 가까운 시간이라 할지라도) 시간은 우리가 무릎을 꿇고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져도 멈추는 법이 없다. 반면에 빨리 좀 흘러가라고 등을 떠밀어도 발걸음을 재촉하는 법 또한 없다. 아무 약속 없이 책을 읽을 때의 삼십 분과 멍 때릴 때의 삼십 분과 그토록 고대하던 친구와의 만남 전 삼십 분은 모두 동일한 시간의 길이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날 화나게 하는 메시지도, 심장 떨리게 하는 결과 발표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그 대면이 기대 또는 긴장되어 시간을 의식적으로 무의미하게 보내버린다면 그 대가는 나중에 치러야 한다. 감정을 투영함으로써 시간을 내 것이 아닌 ‘기다리는 대상의 도래’에 귀속시키는 것은 내가 온전히 보내야 할 시간을 버리는 행위이다. 시간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되 ‘주체적’으로 사용하는 것, 시간을 쓰는 가장 유용한 방법을 항상 견지하고 ‘기다리는 시간’에 할당하는 것, ‘기다리는 대상의 도래’에 매달린 감정에서 벗어나 시간의 길이를 똑바로 직시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에서 시간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