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성에 대한 성찰
"살아가는 동안 적어도 한 번은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르네 데카르트
인간의 역사는 의심과 질문의 역사다. 그 대상이 유형의 것이든 무형의 것이든 인간은 의심과 질문을 끝없이 반복해왔고 그에 대한 대답들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 현재 사회의 모습이다. 여건이 허락되는 한, 질문을 하는 행위에는 한계선이 그어져 있지 않다. 궁금하거나 의심되는 문제라면 무엇이든 의문을 품어보고 답을 찾아본다. 이것이, 사고하는 능력을 지닌 존재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 덕분에 우리 자신은 언제나 궁금증을 유발하는 대상이었다. 영화 감독 뤽 베송은 개인에 대한 궁금증을 넘어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고, 영화 '루시'는 이 질문에 대한 그 나름의 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진행은 누아르를 방불케 할 만큼 어둡고 폭력적이지만, 그와 반대로 환상적인 장면이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거친 폭력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주인공인 루시의 행보와 입을 통해, 노먼 교수의 강의와 주장을 통해 감독의 의도가 펼쳐진다.
인간이 존재로서 내포하고 있는 목적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뤽 베송 감독은 선행하는 질문으로 과연 존재란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특정 시간에, 자리하고 있는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데카르트가 'Cogito ergo sum'이라는 제1명제를 들어 관념적으로 자신이 존재함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뤽 베송 감독은 시간을 존재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한다. "질주하는 차를 상상해 봐요. 무한대로 속도를 올리면 차는 결국 사라지죠."라며 루시는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시간이라고 말한다. 무한대의 속도를 가진다는 것은 물체가 시간이라는 계측 단위의 한계를 넘어 더 이상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는 상태임을 의미한다. 즉, 인지 가능한 존재는 시간 축 위에 자리해야 하며, 이것이 존재의 전제다.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어떤 축(또는 방향성을 가진 양)이 실재한다는 것은 관측 사실로부터 추론할 수 있다. 태양계를 보면 여러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데, 이 공간적·물리적 움직임으로부터 어떤 규칙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규칙성을 1차원적으로 늘어놓으면 하나의 축이 된다. 이것만으로는 축의 방향성을 설정하기 힘드니(영원히 반복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제 지구 안을 관찰한다. 온갖 현상의 물리·화학적 변화를 관찰하면 이러한 현상들이 돌이킬 수 없는 한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백한 증거는 인간의 변화다. 인간은 조금씩 자라고 늙어간다. 따라서 행성의 움직임으로부터 상정한 하나의 축에 방향을 설정할 수 있게 되고, 이것을 시간이라 부른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다르게 느낄 수는 있으나(운동하는 속도에 따라) 시간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실재하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어떤 축이 있음은 확실해 보인다. 감독은 이 개념의 축이 흐르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무언가를 관찰함으로써 그것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일종의 정의를 내린다. 즉, 시간의 축에 대해 정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은 '존재'한다. "시간이야말로 유일한 계측의 단위로 물질의 존재를 증명하죠."라는 루시의 말에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왜 시간만이 증명자로서의 유일한 계측 단위인가. 루시는 부연 설명한다. "하지만 1+1은 2였던 적이 없어요. 사실 숫자나 글자는 존재하지 않아요."
A, B, C라는 세 계를 생각해보자. A의 수학과 언어는 우리와 동일하며, B는 1+1은 3이라는 수학을, B의 '나'는 A의 '너'와 같고, C는 1+1은 5라는 수학을, C의 '우리'는 A의 '나'와 같다고 가정하자. 이 모든 차이는 A, B, C의 존재를 증명한다기보다는 존재의 성질을 규정하는 것이다. 수 체계, 물리·화학 이론, 사회과학 이론 등도 마찬가지다. 과거로부터 만들고 약속하고 쌓아온 지식이자 일종의 관습일 뿐이다. 즉,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이들은 변화할 수 있고, 변화한다고 해서 존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개념은 더 일반적이고 이러한 인위적 체계보다 더 상위 개념이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에게는 초월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거대한 축 위에서 존재가 정의되며, 그 개념 자체는 우리의 의식이 발현된 세계에서 변하지 않는 기준이 된다. 이 불변성이 시간의 증명자로서의 역할을 확보한다. 이러한 형태로 존재의 전제조건을 정해 놓는다면 인간이라는 종이 역사 이전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존재해 왔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 존재 자체는 하나의 역사가 되고 기나긴 시간의 흐름 또한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감독의 두 번째 문제 제기가 시작된다.
인간의 존재가 규정된 상황에서 이제 감독은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미스터 장은 다수의 부하들을 거느린 보스이다. 그는 무고한 일반인을 잡아다가 배를 째고 그 안에 C.P.H.4라는 약물 봉투를 넣어 운반책으로 이용할 만큼 잔악하다. 첫 장면부터 피범벅이 된 손으로 등장하는 그는 인정사정없고 상당한 힘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미스터 장과 그의 부하들, 그와 동업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고통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 오직 이익과 권력만을 탐하는 인간의 무리를 암시한다. 반대로 미스터 장에게 잡혀 특수마약 운반책으로 뱃속에 C.P.H.4를 넣었다가, 폭행으로 약봉지가 터지게 되면서 뇌 사용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루시는 존재의 목적에 따라 행동하는 초월적 인류를 의미한다. 그 외의 인물인 사무엘 노먼 교수는 루시의 능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녀의 지식을 전수받으려 하며, 경찰인 델 리오 반장은 그녀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묵묵히 돕는다. 루시와 노먼교수, 델 리오 반장은 미스터 장과는 다르게 인간이라는 존재에 관한 답을 구하려는 무리이다.
자신의 소임을 다하려는 루시의 일련의 행동과 루시로부터 수모를 겪은 미스터 장이 그녀를 뒤쫓는 모습은 두 그룹의 확연히 다른 속성을 보여준다. 두 속성의 차이는 '인류는 존재(being)보단 소유(having)에 관심이 많다'는 노먼 교수의 언급으로부터 명확히 드러난다. 극단적으로 말해 감독이 문제점을 제시하는 인류의 현주소는 소유의 측면을 대변하는 미스터 장의 모습이다.
다른 대상과의 비교 없이 현 상황만으로도 문제의식이 가능하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현재 인간은 소유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있다.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현재 뿐이다. 여기서 '소유'는 '어떤 개인과 그가 속한 이익공동체가 점유하는' 것을 넘어서서 '점유할 수 있는 것에 온통 관심을 쏟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소유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소유를 무한히 추구하는 것은 가능해 보인다. 현재의 사회구조는 소유가 연쇄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자본주의 하에서 소유는 자본 또는 수단을 매개로 그 영향력을 점점 확장한다. 돈과 권력의 소유는 또 다른 소유를 낳는다. 19세기에 일어난 산업혁명으로 인해 부와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세상은 변모했다. 엄청난 부는 현실적인 유토피아의 한 장면을 엿볼 수 있게 했고 괴리감을 가중시키는 한편 동경의 세계로 이어지는 길을 제시하였다. 한편 일련의 세계적 사건들로 인해 여러 이데올로기 중 자본주의가 승자로 떠오르면서 자본은 가능성의 또 다른 이름으로 인식되었다. 사람들은 충분한 자본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소유할 수 있게 되었으며 미래의 자신을 저당 잡히면서도 현재의 자신은 소유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도 고안해냈다. 그들은 돈과 이익에 관련된 일이라면 다른 중요한 가치들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한계가 없어 보이는 과학 기술의 발전은 소유가 불가능해 보였던 것들도 점차 형상화하고 현실화함으로써 소유의 지평을 넓혔고, 나날이 더해가는 자본의 힘은 소유하는 행위의 가속화를 당연하게 여기게끔 만들었다. 재화는 이제 단순한 도구가 아닌 모든 것의 이면(裏面)으로 인식된다. 우리는 돈으로 미(美)도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소유의 범주가 넓어질수록 소유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간극은 깊어지고 소유의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진다. 그리고 소유한 것을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감과 소유를 하지 못해 생긴 불만은 사회적 불안정을 초래한다.
뤽 베송은 '인간은 존재보단 소유에 관심이 많다'는 표현을 통해 우리가 존재에 너무 관심을 잃은 것은 아닌지 역설한다. 소유는 그 뿌리를 욕망에 두고 있다. 인간은 욕망할 수 있는 존재이긴 해도 욕망해야 하는(욕망하기 위한) 존재는 아니다. 즉, 욕망의 감정과 소유의 행위보다는 우리의 존재가 선행한다. 욕망은 존재의 속성에 불과하다. 따라서 소유에 관심을 두기 전에, 소유하는 행동의 주체가 되는 '존재'란 어떤 것인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존재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진정한 소유의 대상 또한 탐색할 수 있게 된다. 소유는 양면적이다. 무언가를 가지려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어떤 것은 가지지 못하게 만든다. 어떤 물체를 쥔 손에 힘을 세게 주면 손가락 사이의 틈으로 무언가가 종종 흘러나오는 것을 볼 수 있듯이, 강렬한 소유에의 열망으로 인해 인간은 의식의 틈새로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의 존재 목적을 위해 루시가 기이한 기계장치를 만들며 고군분투하는 와중에도 미스터 장은 무장한 부하들과 건물 안으로 들이닥쳐 격렬한 총격전을 벌인다. 이미 그들은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며, 현재의 욕망의 노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