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LUCY, 2014) - 리뷰 2편

존재성에 대한 성찰

by 오로

<스포일 주의> 이 글은 영화 루시의 스포일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원치 않는 분은 되돌아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루시 리뷰 1편에 이은 2편입니다.



3. 존재의 가능성 - 뇌의 작용


하지만 뤽 베송은 존재에, 특히 인간이라는 존재에 관심을 가진다.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여기서 '어떤'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영화에서의 답은 인간의 존재는 무한하며 인간은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 SF적인 측면이 가미된다.


인간의 뇌 사용량이 10% 미만이라는 설정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이고 뇌 사용량이 증가할수록 초인적인 능력을 얻는다는 것도 그저 영화 내의 가설에 불과하다(하지만 그런 가능성은 있다). 영화에서는 뇌 사용량이 증가할수록 언어를 자동으로 습득하고 다른 기기들이나 인간의 의식을 조종하며 인간의 몸을 중력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하는 등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미스터 장과 그 부하들이 루시의 뒤를 쫓지만 결말은 너무나도 뻔해 보인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일부 관객들의 볼멘소리를 들으면서까지 루시에게 허무맹랑해 보이는 능력을 부여한 것일까. 그것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정말 그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의 능력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미지 매체이므로 자신의 의도를 문자로 설명하거나 보여줄 수가 없다. 또한 어느 정도 제한을 둔 이미지로는 애매함만 가중시켜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감독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장면들을 배치함으로써 오히려 그 가능성의 수준을 무한대로 끌어올렸다. 뇌 사용량이라는 수치는 무한한 능력을 열게 되는 상징적 도구로 해석될 수 있다.


깊은 깨달음에 도달한 루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린 스스로 이해할 만한 수준으로 자신의 존재를 축소했어요. 우리 존재의 무한함을 외면코자 인위적 잣대를 만든 거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언어와 숫자와 같은 것은 일종의 사회적 약속이다. 보편성의 획득을 위해 우리는 그 약속을 지켜야 하고 그 안에 구속된다. 인간의 의사와 감정 표현은 공통의 체계를 거쳐야만 유의미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 존재는 근본적으로는 '인위적 잣대'에 구애받지 않는, 그저 시간의 축에 서 있을 뿐이고 다른 제재는 받지 않는, 그렇기에 무한한 존재이다(하지만 존재의 전제 조건은 기억해야 한다). 존재 자체는 시간만으로도 정의될 수 있다. 법이나 언어, 도덕 등은 편의와 공동의 삶을 위해 만들어지고 받아들여진 것이다. 우리가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관념적으로 우리에게 한계를 덮어씌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우리를 규정짓는 것은 오로지 시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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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존재의 무한함을 가능성의 측면에서 해석해보자. 언어와 수학은 인간 사이의 약속이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창조된 것이다. 현실의 많은 것이 이 체계 안에서 설명된다. 인간과 그들의 사회가 변화해 온 역사를 살펴보면 그 또한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앞으로의 인류는 어떠한 모습으로 변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영화에서 나오는 루시의 능력이 보여주는 것은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이를 초월하는 가능성이다. 루시가 보여주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설정이 '가설'이라는 점에서, 이 능력을 상회하는 무언가 또한 발휘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현재의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변화할 모습이 어떨 것인지 누구도 확답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지속적으로 알아갈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가 변화함을 목격한다. 우리가 믿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이다. 무한한 가능성이 인간을 ‘존재로서의 목적’으로 이끄는 원동력이다. 이 가능성이 인간 의식의 한계에 닿아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노먼 교수는 "우린 자신이 가진 거대한 정보의 네트워크에 거의 접근을 못 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접근을 하고 못하고의 문제는 온전히 시간과 태도의 문제이다. 인간의 가능성은 여전히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라는 문을 여는 열쇠는 지식이다.



4. 존재로서의 목적


감독은 이제 인간의 존재로서의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내리고자 한다.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근거가 필요하다. 노먼 교수는 말한다. "최초의 세포가 점점 자라나서 두 개의 세포로 나누어졌죠. ……그 후 생명의 유일한 목표는 자신이 배운 걸 전하는 거였소." 무한한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근거이자 존재의 목적은 바로 지식이다. 아무리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할지라도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이다.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그대로 있으면 가능성은 쇠퇴하고 만다. 인간은 가능성을 현실화하기 위해 지식을 이용한다. 축적된 지식은 우리의 가능성에 힘을 실어준다. 인간은 일생동안 많은 지식을 쌓고 공유하며 후대를 위해 그 지식을 남긴다. 이러한 행위가 축적되어 우리는 상상해왔던 것을 실현하고 불가능해 보였던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왔다. 세대를 거치며 이루어지는 지식의 전수는 인간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은 종을 유지하기 위해 번식을 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정보와 지식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다음 세대로 전해져 왔다. "우리 같은 원시적인 존재에게 삶의 목적은 단 하나일지 모르죠. 시간을 얻는 것."이라는 노먼교수의 말처럼 인간에게 시간은 절대적이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늙음이라는 변화의 과정을 거치고 언젠가는 수명이 다한다. 즉, 인간이라는 개체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고, 이 제한적 존재가 시간을 얻기 위해서는 현 세대의 시간을 후세 세대에 넘겨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간을 직접적으로 넘겨줄 수는 없으므로 '지식'이라는 추상적 도구를 통해 다음 세대가 누릴 수 있는 시간을 간접적으로나마 늘려주게 된다. 따라서 ‘시간을 얻는 것’이라는 우리의 목적은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라는 목적으로 귀결된다. 루시가 갑작스레 다량의 지식을 얻게 되고 어쩔 줄 몰라 하자 노먼 교수는 '전하라'고 조언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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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는 인류를 대표하여 인류가 존재함으로써 해야 할 일을 간략하게 나타내고 있다. 지식을 쌓고 그 지식을 전하는 것.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광범위한 개념이기에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구성 및 변화에 따른 현상들과 그 기저를 대부분 포괄하는 표현이다. 일상의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비롯된 지식에서 학습과 사고 작용과 연구를 거쳐 얻게 되는 지식까지, 인간의 삶은 지식의 집합체다.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지식은 계속 쌓이고 있다. 우리가 인간과 그 외 다른 모든 것들의 존재를 깨닫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는 것은 인류라는 종이 지식의 전달이라는 행위를 계속해 왔기 때문이다.


루시의 뇌 사용량이 100%에 근접하고 있는 순간에 루시는 모든 것을 본다. 시간의 흐름을 몸으로 느끼고, 인간이 만든 사회가 다채롭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지구 생성의 모습과 태초, 그러니까 세포가 나눠지기 전 하나였을 때까지 모두 경험한다. 이 일련의 장면들은 인류가 알고 있는 지식, 인류의 의식을 넘어서는 지식, 생명이 존재하고 시간이 시작되는 그 시기부터의 지식을 나타낸다. 이 규정하기 힘든 모든 지식과 앞으로 이어질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비롯될 지식들이 지식의 무한성과 그에 상응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혼돈을 불러오는 건 지식이 아닌 무지예요." 라는 루시의 깨달음은 우리가 선대로부터 지식을 물려받아 온 것처럼, 지식을 전달하는 행위가 우리의 의무임을 나타내고 동시에 우리의 태만에 대한 지적이다. ('인간은 존재보단 소유에 관심이 많다.')



5. 존재로서의 질문


미스터 장은 루시에게 총알을 퍼붓지만 이미 뇌 사용량이 100%에 도달한 루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그 현상에 경악하고 있을 때, 델 리오 반장의 휴대폰에 문자가 온다. “모든 곳에 있다.”(I am everywhere). 그녀는 시간을 거슬러 모든 지식을 경험하고 태초에 세포가 하나로 역결합되던 순간도 넘어선다. 그 순간 이전에는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개념이 규정되지 않았고 따라서 루시의 존재를 증명할 수가 없으며 그녀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모든 지식을 대변한다. 우리는 지식을 통해 지구의 움직임, 그곳에 사는 동물들, 우리가 속한 사회, 그 안의 구성원들을 규정한다. 인간의 세계는 지식의 세계가, 인간의 역사는 지식의 역사가 된다. 그리하여 루시는 모든 곳에 있다. 이러한 지식의 총체는 우주의 모습을 띤 USB로 형상화된다.


그녀는 지식을 전달한다는, 존재의 목적에는 매우 충실했지만 인간으로서의 삶은 결코 누리지 못한다. "당신의 희생만큼 우리가 가치 있는 존재이길 바라겠소." 라는 노먼 교수의 말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지식을 전달해 온 많은 사람들의 덕을 보는 우리가, 현재 존재로서의 의무에 충실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인간은 권력과 이익에 눈 먼 존재"라는 노먼 교수의 말처럼 인간의 삶은 소유의 욕망으로 점철되어 있다. 소유의 대상은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죽음과 함께 사그라진다. 그 시간은 남는 것 없이 끝나 버린다. 노먼 교수가 검은색 물체로부터 USB를 건네받는 장면은 인류가 운 좋게 지식을 선물 받은 사실을 나타낸다. 뤽 베송 감독은 존재에 관한 몇 가지 의문들에 대한 답을 영화를 통해 제시하며 이제는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린 10억 년 전에 생명을 선물 받았다. 그것으로 우린 무엇을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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