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나다움, 나의 나다움으로

온전한 삶을 위한 나다움의 분리

by 오로

너답지 않아.

나다운 게 뭔데?


다른 사람이 ‘너답다’고 할 때 듣는 내 입장에서는 ‘나답다’가 된다. 이것은 나 자신의 ‘나답다’와 같은 표현*이고 같은 대상(나)을 지칭하지만 나타내는 바는 분명 다르다. 전자에는 다른 사람이 보는 나의 특성(모습)이 묻어나고, 후자에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 특성(모습)이 반영된다.

두 특성의 차이는 일견 명백해 보이지만 나는 그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 한때 나는 다른 사람이 보는 나의 특성만 가지고 있었다. 타인이 말하는 나의 특성과 내 모습을 동일시했고, 그들이 보는 내 모습에 나를 맞추려 했다.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타인의 시각이 더 객관적일 것이라 여겼고, 그들이, 더 나아가 사회가 나를 규정하는 대로 따르는 것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에 이질감을 느끼기 시작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며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던 때였을 것이다. 나는 삶과 주변과 사회에서 관찰할 수 있는 수많은 것에 질문을 던지고 잠정적 답을 찾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제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많은 것들은 어떤 흐름에 따라-주변에서 그렇게 하기 때문에- 으레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나는 질문에 대한 내 의견 또는 시각을 주변에 피력해 보았으나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공감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무언가 어긋난, 잘못된 것처럼 여겨졌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주변의 흐름은 한결같았다. 돈과 꿈을 바라보는 관점, 놀이와 즐거움을 대하는 시각, 흘러간 그리고 흘러갈 시간을 마주하는 태도 등, 사회라는 더 거대한 흐름을 따르는 하나의 줄기였다. 내가 가진 생각은 다수의 목소리 앞에서 연기의 끝자락처럼 흩어졌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에 내 모습이 침해받는다고 느꼈다.

내 문제였을까? 제기한 질문들은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저 가치관의 문제였다. 다른 사람의 시각과 내 시각은 전혀 다를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나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타인과 나의 시각이 이렇게 다를 수 있는데 그들이 보는 나의 특성을 정말로 나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 나와 내 삶은 나를 둘러싼 흐름보다는 내 생각과 의지로 방향을 잡는 것이고 형상화, 구체화되는 것이 아닌가? 사회가 나의 모습을 규정하도록 두어도 괜찮은가?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므로 내 생각대로 나의 모습을 규정해도 문제 될 것이 없었고 타인이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는 모습도 나의 모습이지만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 부차적인 시각일 뿐이었다.


때로는 연속을 위해 단절이 필요하다. 내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과 연결되기 위해 주변의 흐름을 끊어낼 필요가 있었다. 주변으로 열려 있는 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동질감을 부여하여 주변이 나 자신을 잠식하게 만든다. 타인과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나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타인의 시각이 무분별하게 내 모습을 침해하게 둘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네가 보는 나다움’과 ‘내가 보는 나다움’을 분리하기로 했다.

‘네가 보는 나다움’이 쓸모없다거나 불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사회생활을 위한 모습이었고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가치를 반영한 것이었다. 타인과의 대화와 공생을 위해 필요한 모습, 즉 성실히 업무를 하는 것,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화제를 즐겁게 나누는 것,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상들에 공감을 하는 것 등. 가면이라기보다는 다른 표정의 얼굴이랄까. 나 또한 이러한 것들의 필요성을 느꼈고 때때로 즐거움을 느끼며 나의 특성(모습)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다만 ‘너의 나다움’은 내가 추구해야 할 나다운 모습('나의 나다움')의 보존을 위해 내가 원하는 때에만 내면으로의 침해를 허용해야 했고 따라서 분리할 필요가 있는 특성이었다. ‘나의 나다움’에는 타인의 목소리와 무관한 모습들이 있었고, 나는 다수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가치를 기준으로 그러한 모습들을 판단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나다움’은 타인의 시각에서 벗어나 나의 목소리를 반영하도록 분리되어 더 깊은 내면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분리를 통해 나는 수많은 생각, 가치, 대답 중에서 ‘나의 나다움’을 위해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것들을 ‘너의 나다움’이라는 일종의 필터를 통해 재고할 수 있었다. ‘너의 나다움’을 나의 특성과 동일시했던 때, 즉 내가 사회적 시각이나 그 흐름 안에 포함되어 있었을 때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심지어 받아들인다는 인식도 없었던 것들을 확대경으로 정밀히 살펴보듯 하나하나 재고해 보았다.


그렇게 ‘너의 나다움’과 ‘나의 나다움’은 구체성을 띠게 되었다. 두 특성의 차이점 중 하나는 일관성의 측면이다. 전자(前者)는 껍질 같은 것이다.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모습, 의사소통과 공생을 위해 그들이 예측할 수 있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나의 모습을 만드는 것, 그것이 ‘너의 나다움’이다. 물론 이러한 나다움도 변화할 수 있지만 타인의 생각에 반응하며 예측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일관적이다. 껍질은 사회의 시각이 아무 방해 없이 나의 내면에 침해하는 것을 막는다. 타인의 판단은 껍질 안에 있는 ‘나의 나다움’에 직접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필터를 거친다. 나를 둘러싼 흐름-사회의 가치, 타인의 시각-이 껍질 바깥에, 껍질에, 껍질 내부에 필요한 대로 남게 된다.

한편 ‘나의 나다움’은 지속적으로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변화해 가야 한다는 측면에서 일관적이다. ‘너의 나다움’이 외부와의 소통을 통해 형상화하는 것이라면 ‘나의 나다움’은 나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만들어 가는 것이다. 무언가를 배우고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는 한, 자신과의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며 대화에서 얻게 되는 일시적인 답들이 그때그때 나의 특성을 규정하게 된다. 내가 바라보는 나의 특성은 이렇게 지속적으로 변화해 가며 삶의 과정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나의 형상과 결을 맞춰 가게 된다.


즉, 나다움은 ‘너의 나다움’과 ‘나의 나다움’이라는 두 형태를 통해 갖춰진다. ‘너의 나다움’은 ‘나의 나다움’을 유지하는 생활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며, 그것을 위해 내가 지녀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사회와의 소통을 통해 구체화된다. 주어진 삶을 온전히, 정말로 주도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나의 나다움’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을 통해 구체화된다. 사회의 지식과 의견, 가치관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재고하는 과정을 통해 나에게 의미 있는 방식으로 내재화하는 것, 이를 통해 거대한 흐름으로부터 분리된 모습을 나 스스로 기꺼이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 현재의 ‘나의 나다움’을 만들어 낸 결정적 전환이었다.


사회는 결코 ‘나의 나다움’을 빚어 주지 않는다. 사회는 ‘나의 나다움’을 구체화하기 위해 필요한 질문을 무한히 제공할 뿐이다. 그 질문의 풀(pool)에서 하나하나 건져 내, 내 안에서 풀어낸 답으로 삶의 과정이라는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수놓는 것은 온전히 나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이다. 언젠가 색색의 문양으로 수놓아진 상상하던 모습의 그 직물을 마주할 수 있다면 삶의 지난至難한 과정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답다'의 사전적 정의가 '일부 체언 뒤에 붙어, 그 체언이 지니는 성질이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의 형용사를 만드는 말'이므로 '나답다'는 내가 지니는 성질이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되고, 이런 측면에서 같은 표현임. (프라임 새국어사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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