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일지 & 사워도우

통제권에 대한 조율

by 라담

십년 집필한 장편소설 시리즈의 1권 3교가 진행 중이다. 매번이 고질적인 완벽주의와의 싸움이다. 자녀를 타인에게 선보일 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라고 해두자. 어떤 면에선 통제다. 문제는, 정도다.

자녀는 사람이라 부모가 어느 정도 자율성을 인정해줘야한다. 스스로 성장할 기회를 줘야 한다. 통제가 극심한 부모의 자녀가 좋은 퍼포먼스를 보인다면 아직 터지지 않은 폭탄이다. 자율성의 박탈이 자기 삶에 주도권을 갖게 됐을 때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는 모르는 것이다.

소설 원고는 반대로 자율성을 줄수록 잠재적 폭탄이 된다는 게 내가 생각하는 자녀와의 차이다. 가능한 최고 수준으로 통제해도 퇴고할 때 손이 많이 가고 교정교열에서 다시 퇴고하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낀다. 실제로 손 볼수록 좋아진다. 그렇다고 평생 퇴고만 할 수 없다. 자녀를 평생 끼고 살 수 없듯이.

완벽주의가 도질 때마다 나만의 대처 매뉴얼이 없진 않다. 첫째, 혁신에 집착한 결과 탄생한 매너리즘(혹은 마니에리즘)의 화풍을 떠올린다. 더 나은 미적추구의 열망이 낳은 당시 초상화의 인물들은 얼핏 보면 아름답지만, 정형학적으로 불가능하게 목이 굽는 등 병적인 디테일을 보인다. 둘째, 마티스의 후기 작품들과 샤갈의 허공에 부유하는 인물들을 본다.

구성에 있어 어느 정도 통제되었기에 전체적으로 미감이 느껴지면서도 하나하나 뜯어보면 전형적이지 않은, 어딘지 모르게 아이 같기도 한 분위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 원고를 보는 것이 세 번째 단계다. 이쯤에서 '이 지경을 출간하겠다는, 미친 생각을 한 거야?'라며 혹독하게 몰아붙이던 자아는 한풀 꺾인다.

마지막으로 집필기간 나와 함께 했던 라흐마니노프를 불러내어 작품에 대한 고뇌로 심리치료까지 필요하게 됐던 그의 사정을 들어본다. 집필과는 무관한 일로 극심한 스트레스 끝에 발견한 암을 극복해가고 있는 내 사정도 그에게 들려준다. 문득 떠오르는 질문은, "'십년 집필 끝에 남은 건 집필과 무관했던 암뿐이다.'로 끝날 거야?" 정신이 번쩍 든다.

점탄성 적은 우리밀중력분, 호밀스타터 30%, 수분율 80%의 사워도우빵, 무반죽이어도 시간을 충분히 들이면 제법 먹을 만한 결과물이 나온다. 보통 넉넉히 나흘 잡는데 이번엔 모두 섞어서 밤새 실온발효 후 새벽에 수저로 폴딩한 걸 냉장했다가 저녁에 구웠다. 이틀로 단축한 비결은, 교정교열하느라 안 잤다는 것이다.


이렇게 애썼는데 안 팔리면 내가 먹으면 되는 거지, 그런 심정으로 출간에 임하려는 나, 그러니 1인 출판이 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