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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여 Nov 13. 2020

바다를 품은 5성급 호텔, 씨마크호텔

사람들은 유독 '첫 번째'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다. 첫 번째 생일, 처음으로 함께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첫 차까지- 그래서인지 결혼 1주년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이상한 의무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나와 남편 모두 특별히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상황. 결혼기념일마다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는 커플들을 따라 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뉴욕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며 브루클린 브릿지와 센트럴 파크를 배경으로 스냅을 찍으려던 계획이 통째로 날아간 시점이라 성에 차지 않았다.


결국 1박으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숙소 선택은 어김없이 내 몫이었는데 2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곳을 찾아야 했다. 첫 번째는 편도로 3시간 내외일 것. 나는 연차 사용이 자유로운 회사에 다니는 데 반해 남편은 업무 특성상 평일 휴가를 내기가 미션 임파서블 수준이다. 맘 편하게 토요일에 떠나기로 하고 교통체증을 감안해 최대 3시간 거리로 잡았다. 두 번째 조건은 나를 혹하게 할 만한 포인트가 있을 것. 이전에 투숙한 숙소들과는 차별화되는 요소가 있으면 했다. 다만 이러한 감상 포인트는 지극히 주관적인 영역이라 미안하지만 남편에게는 숙소 결정권이 없다. 결제권만 있을 뿐.


호텔부터 에어비앤비까지 매의 눈으로 살피던 내 레이더에 잡힌 곳은 강릉의 '씨마크호텔'. 현대중공업 소유의 5성급 호텔로 현재는 라한호텔에서 위탁 운영을 맡고 있다. 전반적인 후기가 좋은 데다 거리도 적당하고, 경치가 아름다우며 주변에 맛집도 많다는 점, 더불어 수영을 좋아하는 내게 야외 온수풀이 있다는 점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사실 위에 언급한 것들은 플러스 알파일뿐,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포인트는 바로 뷰(view)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그제큐티브 스위트룸의 '욕실' 뷰. 푸른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배쓰 타임을 즐길 수 있는 순백의 욕실이라니! 사진을 본 순간 이곳에 가면 없던 피로까지 다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 마침 우리가 원하는 날짜에 객실까지 남아있다니, 더없이 완벽한 결혼기념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체크인 D-5. 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껏 부풀어 있었던 그때 습관처럼 틀어놓은 TV에서는 일기예보가 한창이었다. "이번 주말에는 전국이 대체로 흐리겠습니다." 마음에 드는 숙소를 찾고, 원하는 객실까지 예약하는 행운이 따랐으니 날씨마저 완벽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시간이 날 때마다 기상청에서 날씨를 확인했는데 애타는 내 마음을 놀리기라도 하듯 사이트에 접속할 때마다 강수 확률은 높아졌다. 그래, 일기예보가 그렇다면.. 흐리거나 비가 올 때 씨마크호텔을 방문한 사람들의 리뷰를 뒤지기 시작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호캉스는 만족스럽다는 후기가 대부분이었지만 시커먼 바다를 바라보며 "날씨가 무슨 대수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함께 한다는 사실만으로 난 행복해." 따위의 대사를 뱉을 아량이 내게는 없었다. 내 그릇은 좁디좁다.


결국 예약은 취소했고 방이 없는 관계로 우리의 1주년 맞이 호캉스는 한 달 뒤로 미뤄졌다. 

드디어 D-day. 하늘이 밝기는 한데 사진을 찍으면 칙칙하게 나오고 괜히 눈만 부신 이상한 날씨다. 내 기분은 착 가라앉았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신에게 원망을 쏟아내기에 이르렀다. 나의 간절한 바람이, 아니 버릇없는 하소연이 하늘에 닿기라도 한 걸까? 강릉에 가까워질수록 하늘이 선명한 파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운전하랴 내 눈치 보랴 바쁘던 남편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피었고.


씨마크호텔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강문해변과 맞닿아 있다. 체크인까지 시간이 남아 차를 세워두고 잠시 해변을 걸었다. 어른들은 어슬렁어슬렁 걷는 반면 종아리를 시원하게 드러낸 아이들은 얕은 물가에서 신나게 물장구를 친다. 그런 풍경을 볼 때면 나도 두 발을 풍덩 담그고 싶은데, 운동화를 신었다는 핑계로 손 끝만 살짝 담그고 만다. 모래 묻은 발이야 씻고 털면 그만인데 설렘보다 망설임이 앞서는 탓이다. 튜브 하나만 있으면 계곡이고 바다고 용감하게 뛰어들었던 나. 이제는 소독약 냄새 폴폴 풍기는 수영장이 더 좋은 걸 보니 어른이 다 됐나 보다.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족히 30명은 앉을 수 있을 법한 긴 길이의 테이블. 그 위로는 '골든 리본'이라는 타이틀의 조형물이 드리워져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황금색 리본이 길게 펼쳐진 형상이다. 개인적으로 금이라고 하면 황금돼지나 금괴 등이 주로 떠올라서인지 묵직한 무게감도 함께 느껴지는데 이 작품은 마치 리본이 바람에 날아가듯 가볍게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더불어 화려하고 강렬한 황금빛도 이곳 씨마크호텔에서는 백색의 벽과 통창 너머로 펼쳐지는 푸른 바다, 우드 톤의 가구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우아하고 차분하게 느껴지는 마법이 일어난다.


스위트룸 투숙 시 체크인은 2층 라운지에서 진행된다.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고 간단한 다과를 가져다 먹을 수 있는 심플한 공간. 정면에는 창 너머 바다 풍경이 아른거린다. 이름과 몇 가지 정보를 주고받는 시간일 뿐인데 눈앞의 바다 때문일까- 체크인을 하는 지금 이 순간, 이미 가슴 설레는 여행이 시작된 것만 같다.


긴 복도를 지나 드디어 객실로 들어선다.

 

와!

객실이 없을까 봐, 날씨가 안 좋을까 봐 마음을 졸였던 그 시간을 모두 보상받는 것 같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네. 씨마크호텔은 날씨가 좋을 때 가야 한다. 해외에서만 보던 새파란 바다가 당신을 온몸으로 껴안는다.



객실은 긴 직사각형 형태로 리빙룸 - 베드룸 - 욕실 순이다. 그리고 리빙룸과 연결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욕실까지 길게 이어지는 테라스가 나타난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북적이는 시내 풍경이, 정면과 우측으로는 푸른 바다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로비에서만 해도 마냥 푸르게만 보였던 바다를 객실에서 내려다보니, 에메랄드빛에서 코발트색으로 그러데이션되는 것처럼 보인다. 강릉 바다가 이렇게 아름다웠나 감탄의 연속이다.



포근한 우드톤으로 꾸며진 리빙룸을 지나 호텔 느낌 물씬 풍기는 화이트톤의 베드룸을 거치면, 욕실의 하얀 세면대와 그 위에 거울이 눈에 들어온다. 사각형의 아주 큰 거울이 걸려 있는데 창 너머의 바다가 비치며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그리고 욕실에 발을 들인 순간, 또 한 번 감동하고 만다. 달걀처럼 오목한 욕조가 놓여 있고 새파란 바다가 그를 둘러싸고 있다. 화이트와 블루, 단 2가지 컬러만이 존재하는 특별한 공간. 오션뷰 숙소를 많이 가보지는 않았지만 이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이런 게 오션뷰구나' 깨닫는다.

 


사진을 아무리 찍어도 내 눈 앞의 풍경을 그대로 담을 수가 없어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인피니티 풀로 향했다. 강릉 앞바다를 마주한 야외 온수풀. 밖에서는 그리 커 보이지 않았는데 안에 들어가 보니 놀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바다와 가까워서인지 다른 호텔의 온수풀과 비교해 수온을 훨씬 높게 유지하는 것 같다. 보통은 미지근한 정도인데 여기는 물에 들어가자마자 따뜻해서 놀랐을 정도. 풀의 양쪽에는 온수가 펑펑 샘솟는 자쿠지가 마련되어 있어 바닷바람에 지친 고객들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워낙 과감한 차림을 한 멋쟁이들을 많이 본터라 나도 인생 사진 한 장을 남기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갔다. 휴양지 느낌이 물씬 풍기는 챙 넓은 모자에 빨간색 선글라스, 하얀색 모노키니까지. 한껏 기대에 차 입장을 했는데 아뿔싸.. 여기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어린 자녀를 둔 가족 단위의 고객이 대부분인 데다 내 또래 여성들도 하나같이 래시가드 차림. 예상치 못한 분위기에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뭐 어때! 씨마크호텔에 왔는데 마음에 드는 사진은 남기고 가야지. 애써 굽은 어깨를 당당히 피며 남편에게 카메라를 건넨다. (그리고 익숙한 듯이 셔터를 누르는 남편.)



노을이 질 무렵, 수영을 마치고 호텔을 찬찬히 돌아봤다. 조용히 로비를 거닐고 있는데 피아노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늘은 바다와 노을이 어우러져 오로라처럼 오묘한 색으로 물들고, 피아노의 맑고 청아한 소리가 귓가를 적신다. 아름다운 자연과 건축이 어우러지며 일상에 없던 여유가 온몸을 덮쳐오던 순간, 현실은 사라졌고 모든 게 낭만적이었다.



밖으로 연결되는 문을 열고 나가면 넓은 야외 데크가 나타난다. 깊이가 얕은 웅덩이에 물이 고여 있어 하늘을 그대로 비춘다. 그 뒤로는 의자 몇 개와 테이블이 놓여 있는데 편안히 앉아 바다를 감상하기에 그만이다. 여기가 어떤 바다인지, 소나무는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그런 설명은 없다. 눈 앞의 풍경을 마음껏 담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만 있을 뿐. 씨마크호텔은 안과 밖으로 미니멀리즘을 제대로 재현하며 본질에 집중한다.


밤 늦게까지 운영하는 바나 레스토랑이 없는 씨마크호텔의 밤은 고요하다. 예약할 때 결혼기념일이라고 했더니 치즈케이크를 선물로 주셔서 초 하나를 꽂고 이미 지나버린 결혼기념일을 다시 한번 축하했다.



물놀이를 열심히 해서인지 곯아 떨어졌다가 새벽녘에 잠이 깼다. 눈을 반쯤 뜬 상태로 욕실에 갔는데 그 순간 바다 위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순백의 욕실은 온통 붉은 색이었다. 일출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었음에도 가슴이 벅차 올랐다. 밖으로 나가자 테라스의 끄트머리에 붉은 해가 걸려 있었고 한 발자국씩 나아갈수록 태양과 가까워졌다. 이 세상에 해와 바다, 오직 둘만 존재하는 것 같았던 순간. 까치집에 잠옷 차림을 한 두 사람은 한참을 서서 해를 바라봤다.


조식을 먹으러 가는 길에 호텔에서 바라보는 일출이 멋지다던 리뷰가 떠올랐다. 날씨에 집중하느라 일출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꼭 누군가가 준비해준 선물 같은 풍경이었다. 따뜻한 물속을 유영하며 수영장에서 일출을 보는 것도 환상적일 것 같아. 다음에 또 와야지.


마지막 수영을 마치고 객실로 돌아왔다. 체크아웃까지 남은 시간을 만끽하며 남편은 테라스에 앉아 가져온 책을 읽는다. 선물상자에 둘러진 리본처럼 바다에 둘러 싸인 호텔. 머무는 내내 깊은 바다에 잠겨 있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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