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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여 Nov 05. 2020

내 인생을 망치러 온 구원자, 믹스커피

머리로는 몸에 나쁘다는 걸 알아.

근데 끊을 수가 없어.

한입 들이키는 순간 뇌가 행복해진다고 할까.

단단히 빠져서 어쩔 수가 없어.



나는 태어날 때부터 식욕이 적은 편이었다. 밥을 먹는 데 관심이 없었고 노력을 쏟기 싫었다.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부모 마음은 그게 아니다 보니 뭐라도 먹여야겠는데 내가 가장 잘 먹는 게 '단 거'였다. 7살 무렵까지 내 주식은 밥이 아니라 '죠리퐁'이었다.


사탕은 안 좋아한다. 초콜릿은 당 떨어질 때 한 번씩 사 먹는 정도. 과자도 자주 먹진 않는다. 케이크는 좋아하지만 여럿이 카페에 갈 때 한 조각씩 시키는 수준. 꿀도 싫어한다. 이렇게 쓰고 보니 달다구리를 좋아한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콕 집어 말하면 나는 '믹스커피'와 '바닐라 라테' 애호가다.


회사를 다니면서부터 믹스커피를 본격적으로 마셨던 것 같다. 사무실에 막 출근해 정신이 없을 때나 점심식사 후 졸음이 몰려올 때 마시는 믹스커피의 뜨겁고 달짝지근한 첫 모금은 짜릿하기까지 하다. 뇌가 깨어나는 느낌이랄까! 1 봉지만 타면 양이 적긴 하지만 어차피 종이컵이 금방 식어 부족한 듯 마시는 게 좋다. 더군다나 10초도 되지 않아 커피 한잔이 완성되니 요즘 같은 세상에 더없이 편리하다. 출근할 때마다 직진하면 회사, 오른쪽으로 꺾으면 스타벅스가 나와 잠시 고민하지만 대부분 직진을 선택하는 이유다.


언제부터 바닐라 라테만 고집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대학생 때는 캐러멜 마끼아또도 먹고 카페 모카도 마셨는데 결국 바닐라 라테로 정착했다. 내 기준으로 캐러멜 마끼아또는 너무 달고, 카페 모카는 좀 텁텁하달까? 캐러멜과 초콜릿 시럽(파우더)은 달콤하지만 특유의 맛이 강해서 조금 자극적으로 느껴지는 반면 바닐라 라테는 고소하고 부드러운 라테에 포근한 바닐라의 향과 은은한 달콤함, 커피 본연의 쌉싸름까지 더해진 느낌이라 아무리 마셔도 질리질 않는다. 예전에 같이 일했던 상사와 나는 지극히 비즈니스적인 관계였는데 그조차도 내가 바닐라 라테만 마신다는 건 알았으니 말 다했지 뭐.


온갖 미디어에서 액상과당을 줄여야 한다고 입을 모으길래 나도 믹스커피를 끊으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회사 사람들에게 이제 믹스커피를 끊을 거라고 큰 소리를 쳤는데 도전은 4일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 이유는 바로 믹스커피는 순간의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일을 하다 보면 열이 받는 일이 종종 생기는데 가슴속에 화는 차오르고 동료들에게 내 분노를 성토할 점심시간이 아직 멀었다면? 달콤한 말로 엉클어진 마음을 달래주고, 따뜻한 손길로 어깨를 토닥거리며, 부드럽게 조언을 전해주는 상상 속의 선배처럼- 달콤함과 따뜻함, 부드러움을 모두 갖춘 믹스커피 한잔을 들이켤 수밖에.


믹스커피와 함께 바닐라 라테도 끊어보려고 했었다. 차마 내 돈 주고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는 없어서 라테로 바꿔보기로 결정! 처음 한 두 번은 '음, 이게 바로 라테의 고소한 풍미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 라테 마니아가 된 듯 행동했다. 나도 이제 폴 바셋이나 블루보틀에 가야겠다면서.


그러다 점심식사 후 동료들과 카페에 갔다. 수다를 떨다가 동료가 가져다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는데, 그 순간 악!! 소리를 질렀다. 내가 주문한 건 라테가 아니라 바닐라 라테였던 것이다. 내 깊은 무의식이 카운터에 선 나를 조종해 바닐라 라테를 시켜버린 것. 혀 끝에 닿는 단 맛을 인지한 그 순간의 당황스러움이란.


어쨌든 나의 화를 부추겨 도전을 실패하게 하려는 모종의 세력과 어이없는 주문 실수로 인해 나는 결국 단 음료의 세계로 돌아오고 말았다. 입맛을 바꾸려던 과감한 도전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내게 위안이 되는 사실 하나는, 스타벅스 기준으로 원래 바닐라 라테는 시럽을 3번 펌핑하지만 이제는 2번으로 줄여 요청한다는 것 : )


다큐 공감에 출연한 믹스러버 교수님. K-믹스커피의 힘이란.


믹스커피와 바닐라 라테를 이렇게 좋아한다고 해서 다른 종류의 커피를 입에 대지도 않는 건 아니다. 고향집에 가면 늘 다 같이 커피를 내려마시는데 이 커피의 이름은 '레전드'. 고급스러운 패키지와 베트남 커피 치고 높은 가격을 자랑하는데 커피를 잘 모르는 내가 먹어도 맛과 향이 일품이다. 하지만 드립 커피를 마시고 나면 왠지 모르게 허하다고 할까. 입안이 너-무 개운한 나머지 오히려 커피를 안 마신 것 같단 말이지. 결국에는 한 시간쯤 지나 포트에 물을 올린다. 남편은 이런 나를 보며 '래디컬 믹스니스트'라고 부른다.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을 보면 장례식장에 고인이 생전 좋아하던 음식을 가지고 조문을 온 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이가 들면 입맛이 변한다고 하지만 지금도 믹스커피에 설탕을 추가해서 드시는 우리 할아버지를 보면 나 역시도 비슷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먼 훗날, 누군가 내 장례식에 조문을 온다면 스타벅스 바닐라 라테 한잔을 사 와주면 좋겠다. 바닐라 시럽은 3번 펌핑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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