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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여 Nov 02. 2020

'어쩔 수 없다'는 주문

출근 1시간 전, 당일 휴가를 냈다. 도저히 사무실에 진득하게 앉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 아침식사를 간단히 차려먹고 집 청소를 했다. 외출 준비까지 마치니 어느덧 12시. 점심을 사러 나가야겠다.


웬만해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편이지만 당일 휴가도 선언했겠다 괜스레 택시를 타고 싶었다.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고 우아하게 목적지 앞에 도착하고 싶었달까. 다행히도 금방 콜이 잡혀서 설레는 마음을 안고 택시에 몸을 실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스마트폰으로 고정. 밤새 지인들이 올린 sns 게시물들을 살펴보다 고개를 들었다. 가게의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얼핏 목적지 근처에 온 것 같아 택시에서 내렸다. 기사님께서는 '왼쪽에 가게가 있죠?'라며 계산해주셨다.


가게가 바로 보이지 않기에 지도 앱을 켜 현재 위치에서 목적지까지의 도보 거리를 계산했다.

응?

눈을 씻고 다시 화면을 본다.

걸어서 8분이란다.


목적지 앞에 우아하게 내리고 싶어서 택시를 선택한 건데..!! 나는 왜 갑자기 택시에서 내리겠다고 했으며 내비게이션을 따라 운전하신 기사님은 나를 말려주지 않았는가.

아니, 왜 나는 애초에 지도를 자세히 보지 않았을까. 휴.


'어쩔 수 없지'


이미 나는 택시에서 내렸고 택시는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바보 같은 내 행동에 어이가 없었지만 다시 택시를 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버리자 마음이 편해졌다. 어차피 나는 휴가를 낸 자유의 몸이라 시간도 많고 미세먼지 지수는 높지만 날씨는 화창하다. 차라리 잘됐어! 이왕 이렇게 된 거 목적지까지 기분 좋게 걷기로 하자.


약 8분을 걸어 도착한 곳은 망원동의 한 식료품점. 이탈리안 스타일의 피자부터 생면, 버터, 페스토 등 다양한 식료품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 4인까지 앉을 수 있는 바 테이블이 비어있기에 점심을 먹고 가기로 했다.


치즈를 듬뿍 올린 피자는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고 이태리에서 유학을 하신 걸로 보이는(가게에 외국인과 찍은 사진들이 붙어있다) 사장님은 아주 친절하셨다. 스피커에서는 이탈리아 가수의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쏟아지는 햇살마저 9월의 로마처럼 따가웠고 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참으로 가벼워 보였다. 멍하니 이 한가로운 풍경을 보고 있으니 다시금 '어쩔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약 10년쯤 됐을까. 후회라는 구덩이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은 일과 인연을 곱씹고 또 곱씹으며 자꾸만 과거로 되돌아가려 했다. 내가 A가 아니라 B라고 말했더라면, C가 아니라 D라는 행동을 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헤르미온느의 마법의 시계라도 생기면 모를까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불변의 법칙. 그걸 완전히 깨닫는 데, 아니 받아들이는 데 1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힘은 들었지만 실컷 후회하고 자책하며 내 감정에 충실했던 만큼 정리는 쉽게 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내 몸과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생각과 태도 역시 명확해지며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너는 어쩜 그렇게 쿨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살다 보면 불시검문처럼 후회의 싹이 돋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시간을 되돌려 과거의 나를 원망하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피어오르지만 이제는 어떻게 할지 안다.


그래서 뭐 어떡해. 어쩔 수 없지.


나는 택시에서 내렸고 택시는 진작에 떠났다. 어쩔 수 없는 일은 훌훌 털어버리고 지금 이 순간, 내가 마주한 행복에 마음껏 취하기로 한다. 달콤 쌉싸름한 이탈리아 맥주 '페로니'를 마시며.

@polveri.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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