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서 카톡이 왔다.
'고양이를 주웠어. 어떡하지?'
우리 엄마는 고양이를 '극혐' 하는 사람이었다. 옛날 어른들이 고양이를 요물이라고 부르던 영향 +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 때문인데 웬 길고양이 한 마리가 죽은 닭을 물고 도망을 가려했단다. 엄마는 뺏기지 않으려고 닭의 날개를 잡고 높게 들어 올렸다가 또 빙빙 돌렸다가 난리를 쳤는데도 고양이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욱여넣고서 절대로 닭을 놓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이 모습이 꽤나 충격적이었는지 엄마는 고양이는 아주 사납고 독한 동물이라며 개는 키워도 고양이는 절대 키우는 일이 없을 거라며 호언장담했다.
그런 엄마가 집사가 되었다. 마당에 버려져 있던 새끼 고양이의 엄마가 되기로 한 것이다. 물론 냥줍을 했다고 하루아침에 고양이 극혐러에서 애묘인으로 거듭난 건 아니다. 살다 보면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거라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엄마의 고양이 극혐증이 완화된 데는 몇 가지 계기가 있다.
첫 번째 사건은 지나가던 아주머니의 팩트 폭력. 엄마가 당시 키우던 강아지와 산책을 가고 있었는데 길고양이가 나타났다. 엄마는 쓰읍! 큰 소리를 내며 고양이를 쫓아냈는데 지나가던 아주머니 한분이 그 광경을 보고 엄마를 크게 꾸짖었다. "아줌마! 길고양이들이 그렇게 사람 피하다가 차에 치여 죽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개도 키우시는 분이 왜 그러세요!" 틀린 말 하나 없는 아주머니의 팩폭에 엄마는 깨겡- 그런 사고가 날지는 전혀 몰랐다며 이 일 이후로 고양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안쓰러워졌다.
두 번째, 마당 냥이와의 만남. 어느 날부터 치즈처럼 노란 코트를 입은 고양이가 우리 집 마당을 제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했다. 엄마가 다가가면 담벼락 위로 도망을 쳤다가도 다시 마당 주위를 맴돌며 뒷밭에 버린 음식 쓰레기를 먹기도 하고 엄마와 오랜 시간 눈을 마주치기도 했다. 어느새 엄마는 고양이에게 '노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그 녀석의 일거수일투족을 내게 알려주곤 했다. 가끔 못된 고양이가 노랑이를 괴롭히면 엄마가 쫓아내 주기도 하면서. 하지만 집주인이 나름 살갑더라고 소문이 났는지 노랑이를 쫓고 새롭게 마당을 차지한 무리가 똥 테러를 하는 바람에 엄마와 길고양이의 짧은 인연도 끝이 났다.
세 번째, 외모지상주의. 혼자 사는 아주머니께서 집에 세를 들어오셨는데 알고 보니 고양이를 어마어마하게 사랑하는 애묘인이셨다. 그분은 털이 하얗고 눈이 파란 고양이를 키우셨는데 사진으로만 봐도 긴 털과 함께 우아함을 뿜뿜 뿜어내는 녀석이었다. 평소 꼬질꼬질한 길냥이들만 보다 엘사처럼 고고한 고양이의 미모에 마음을 빼앗겨버린 엄마. 게다가 낯선 엄마에게도 쓰다듬을 허용하며 젠틀한 매너를 선보인 덕분에 고양이는 무섭고 사납다는 편견이 사라지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이런 사건들이 있고 많은 시간이 지났다. 지난 8월의 어느 날, 엄마에게서 카톡이 왔다. '고양이를 주웠어. 어떡하지?'
눈도 못 뜬 새끼 고양이가 마당 한구석에 버려져 있던 것이다. 죽은 듯이 움직이지도 않기에 엄마는 차마 손으로 만지진 못하고 삽으로 살짝 건드렸는데 그때부터 야옹야옹! 동네가 떠나갈 만큼 우렁찬 목소리로 본인의 존재를 어필하기 시작했다. 친한 집사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병원 검진과 목욕까지 마친 녀석. 엄마는 어미가 데리러 올 지 모르니 당분간 끼니는 챙겨주며 마당에서 키우겠다고 했다.
언행불일치, 역시 사람은 말과 행동이 다르다. 마당에 살면 된다던 녀석이 컴퓨터방을 차지했다. 엄마는 3시간에 한 번씩 손가락 마디만 한 우유병으로 분유를 먹이고, 배변 유도에 트림까지 시켰다. 이걸로도 모자라 잠자는 고양이한테 클래식을 틀어주고, 유튜브에 고양이를 검색해 온갖 동영상을 섭렵한다. 내가 보내준 유산균을 먹였더니 응가가 맛동산이 되었다고 하질 않나, 동물병원에서 츄르까지 사서 먹이질 않나. 정성과 열정이 어마어마하다. 내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분명 나와 동생을 키울 때와 비슷한 모습일 거다. 아니 엄마가 발견했으니 본인의 성을 붙여야겠다고 엄포할 정도면 더한 것 같다.
엄마의 이런 변화는 놀라움을 넘어 당황스럽기까지 하지만 이 꼬물이를 보고 있자면 나조차도 감히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어쩜 행동 하나, 움직임 하나하나가 이렇게 어여쁜지. 한 생명체가 주는 힘과 에너지가 어마어마하다. 일 때문에 나와 아빠, 동생까지 떠난 집을 홀로 지키던 엄마에게 이 고양이 한 마리의 존재감은 우리 셋을 합친 것보다 컸을지도 모른다. 동물병원 선생님께서 예쁘다고 하면 말 다 한 거 아니냐는 엄마가 귀엽고 막내딸처럼 넘치는 애교로 내 자리마저 위태롭게 하는 이 고양이에게 정말 고맙다.
엄마는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예전에 키운 동물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고양이에 대한 편견이 특히 심했고 다른 동물도 가축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던 엄마에게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생명의 존엄함을 매일 깨우쳐 주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함께 살아가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