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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여 Jan 26. 2021

새처럼 날아가버린 인연

5월이던가 9월이던가 뜨겁지 않게 햇살이 내리쬐던 어느 날, 고3이었던 우리는 졸업앨범에 실을 단체사진을 찍기 위해 우르르 운동장으로 나갔다. 학교 생활은 나름대로 즐거웠으나 매일같이 반복되는 수업에 지쳐있던 우리는 답답한 교실을 잠시 벗어난다는 것만으로도 한껏 들떴다.


결혼식에서 마치 신랑 신부를 중심으로 하객들이 서서 사진을 찍듯이 우리는 담임선생님을 둘러싸고 대열을 맞췄다. 사진에 모두의 얼굴이 잘 나오도록 제일 앞줄에는 간이의자를 뒀는데 담임선생님과 키가 작은 아이들이 앉았다. 거기에는 나도 포함되었다. 함께 어울리는 무리 중 하나인 박은하도 160이 안되었지만 나보다는 3-4cm가량 큰 덕분에 내 뒤에 서게 되었다.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신난 우리는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그러다 박은하가 악!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왼쪽 어깨에는 허옇고 진득한 액체가 묻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운동장에 서 있던 수백 명의 아이들 중에 하필 박은하가 새똥을 맞은 것이다. 그녀는 성질을 내며 화장실로 뛰어갔고 우리는 역시 박은하라며 깔깔 웃었다.


학창 시절, 박은하의 별명은 '거성'이었다. 당시 방영되던 무한도전에서 개그맨 박명수가 거성으로 불리는 것에서 따온 것이다. 그녀의 겉모습은 2대 8 가르마의 깻잎 머리를 플라스틱 머리띠로 고정시키고 교정기를 낀 평범한 여고생이었으나 다소 시니컬한 면이 있었다. 또 언행과 행동이 과감하고 의욕과 욕심이 있었으며 새똥을 맞은 것처럼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자주 생기는 친구라 거성이라는 별명이 딱 어울렸다. 우리는 그녀를 자주 놀렸는데 거성은 버럭버럭 화를 내며 장난을 받아주었다. 나는 박은하의 그런 모습을 좋아하면서도 짓궂은 말로 그녀를 놀리고 때로는 상처를 주기도 했다. 겉으로는 강한 척했지만 마음이 약하고 착했던 박은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내게 모질게 굴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박은하는 수도권 소재의 한 대학교에 입학했다. 외국어학과였는데 박은하가 잘했던 영어도 아니고, 활용도가 높은 중국어나 스페인어도 아닌 제3의 나라의 언어를 전공한다고 했다. 나는 어딘가 특이한 구석이 있는 박은하다운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입학과 동시에 각자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지며 친구들 사이에 연락은 다소 뜸해졌다. 우리는 간간히 문자를 주고받았는데 박은하는 성적을 잘 받아서 제3의 나라로 교환학생을 가고 싶다고 했고 또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남자애가 양아치스러운 구석이 있지만 매력적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여느 대학생처럼 평범하고 별 볼 일 없는 대화가 오고 갔다.


언젠가부터 박은하는 내가 보낸 문자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의 연락에도 묵묵부답이었다. 전화번호는 바뀌었고 SNS도 탈퇴했다. 왜 연락을 끊은 건지 우리는 예상조차 할 수 없었고 그녀의 안부를 궁금해할 뿐이었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박은하에게서 잘 지내냐는 문자가 왔다. 그녀는 주로 우리의 안부만 물었고 자신의 이야기는 쉽사리 털어놓지 않았다. 내가 남자친구와 사귄 지 3년 정도 됐다고 하자 그녀는 동거를 하냐고 물었다. 오랜 연애와 동거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던 나는 어렴풋이 그녀가 누군가와 함께 살고 있는 걸까 짐작만 했다.


그렇게 일방적인 질문과 답변이 몇 번 오가면 어김없이 연락이 끊겼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박은하에게서 문자가 왔다. 급한 일이 생겨 고향에 내려가야 하는데 기차표값을 빌려줄 수 있냐는 내용이었다. 친구 사이에 비교적 가볍게 빌려줄 수 있는 금액이었지만 그녀의 부탁은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수중에 돈이 전혀 없는 걸까, 룸메이트가 있다고 했는데 그 친구에게는 빌릴 수 없는 상황인 걸까.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지만 그냥 돈을 보냈다. 그 이후로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녀를 잊고 지낸 지도 오래되었다. 휴대폰에 박은하라고 저장되어 있는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혹시 박은하 씨 휴대폰인가요?’


문자 2통이 연달아 왔다.

‘아니요.’

‘박은하?'


낯선 이여 당신은 누구신가요. 내 친구 박은하는 어디에 있나요.




얼마 전 친구 하나가 20대 초반에 찍은 사진을 보내주었다. 사진 속에는 나와 친구들, 그리고 박은하가 손가락으로 브이를 한 채 웃고 있다.


여느 때처럼 피곤한 화요일 아침. 그녀도 어디에선가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길 바란다. 아주 나중에라도 연락이 닿을 수 있다면 더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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