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소여 Mar 08. 2021

조수석에 앉은 남편들

얼마 전에 운전면허증을 갱신했다. 새로 발급받은 면허증은 번쩍번쩍 눈이 부셨다. 카드를 잡고 좌우로 움직이면 조명에 반사된 카드에서 무지갯빛이 흘러나왔다. 게다가 분홍색 셔츠에 검은색 벨벳 재킷을 걸치고, 부족한 고대기 솜씨로 어색하게 멋을 낸 소녀가 아닌 지금의 내 모습이 사진으로 담기자 2021년도판 운전면허증이 훨씬 그럴싸해 보였다.


면허는 22살 무렵에 땄다. 평소 겁이 많아서 떨어질 줄 알았건만 걱정이 무색하게 단 한 번에 성공. 하지만 대중교통이 있으니 운전을 할 필요도 없고 내 명의로 된 차도 없어 그때 딴 면허증은 오래된 통장들과 몸을 맞대고 서랍장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작년이 돼서야 서랍에서 묵은 운전면허증을 꺼냈다. 워낙 오랜만에 하는 운전이라 한동안은 시동을 걸기 전에 '브레이크는 왼쪽! 엑셀은 오른쪽!'을 몇 번씩 외치고 출발했다. 평생을 통틀어 운전대를 잡은 횟수가 10번도 안되는 데다 세단 + 지방에서 면허를 딴 경력이 전부였기에 SUV를 타고 차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서울에서 운전을 하려니 식은땀이 줄줄 났다.


우선 서울 - 파주를 오가며 주행을 익혔는데 강변북로에 진입할 때 가장 긴장이 됐다. 나는 마치 출발 신호만 기다리다가 땅! 하면 로켓처럼 뛰쳐나가는 경주마와 같이 남편이 '지금!'이라고 외치면 앞뒤 옆도 보지 않고 액셀을 밟으며 끼어들었다. 신기하게  이것도 반복하니 익숙해지더라. 여전히 남편이 신호를 주기는 하지만 이제는 백미러를 살피며 내 나름의 타이밍을 잡기도 하고, 서울 시내와 고속도로 등을 달리며 운전대에 앉은 내 모습에 익숙해지고 있다.


내 운전연습 선생님은 남편이다. 요즘에는 운전연수를 전문적으로 하는 강사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만 남편은 차분하고 다정한 성격이라 선생님으로 제격이다. 칭찬도 많이 해주고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팁도 전수해준다. 물론 연수를 하다보면 그도 목소리가 높아질 때가 있는데 화를 내는 건 아니고 정말 '화들짝' 놀랐을 때다. 예를 들어 내가 너무 오른쪽으로 차를 붙이는 바람에 길가에 있는 전봇대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쳤다던가, 도로에 진입하자마자 3차선을 연속으로 옮겨갔을 때? 아직도 초초초보 운전자이면서도 괜히 운전대만 잡으면 기고만장해져서 남편에게 오버 좀 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친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심장을 부여잡으면서도 조수석에 앉는 남편에게 고맙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하면서 카톡방에 남편한테 운전을 배운다고 자랑을 했다. 그러자 아빠 왈,

부부 사이에 운전과 골프는 절대 교습하면 안 된다ㅎㅎ


아빠는 우리 부부가 비정상이라는데, 그 말에 어느 정도 공감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엄마가 운전면허 시험에 도전했다. 뒷좌석에는 나와 동생이 타고 조수석에는 선생님 자격으로 아빠가 탔다. 엄마는 요리도 육아도 성당 활동도 모두 일등으로 해내는 사람이었는데 운전은 당시 그녀의 전문 분야는 아니었던 것 같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녀의 운전 선생님은 인내심이 많은 타입이 아니었다. 반복되는 실수에 선생님의 목소리는 경적 소리처럼 크고 높아졌고, 다소 공격적인 티칭이 이어졌다. 아빠의 이런 교육 방식은 엄마가 정신을 바짝 차리게끔 도와줄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넷이 출발해서 하나는 따로 돌아오는 부부싸움의 서막이 되었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난다. 우리 차는 밤길을 달리고 있었고 나는 전봇대의 불빛들이 스르르 흩어지는 풍경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멀미가 심한 동생은 내 무릎을 베고 누워 코를 골았고. 엄마 아빠가 다툴 때도 있었지만 또 온 가족이 한밤의 드라이브를 즐길 때도 있었다. 어색한 몸짓으로 핸들을 돌리는 엄마, 손가락을 삐쭉 거리며 지시를 하는 아빠,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나와 동생. 다행스럽게도 내 머릿속에는 음소거된 평화로운 풍경만이 남아있다.


엄마는 시험에 10번쯤 떨어지고 나서야 대한민국 공식 드라이버가 되었다. 하지만 질릴 대로 질린 엄마는 운전을 하지 않았고, 몇 년이 지나서야 전문 강사님께 연수를 받아 운전을 시작했다. 지금은 15년 된 SM5를 몰고 못 가는 데가 없다. 반면 아빠는 작년에 빨간불에 멈춰서 있던 앞 차를 살짝 들이받는 바람에 과실 100%의 교통사고를 기록했다. 이 소식을 듣고 엄마는  웃었다.



이미지 출처 unsplash.com

작가의 이전글 새처럼 날아가버린 인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