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피아노를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내 목표는 베토벤을 치는 것도,
학원의 연말 연주회에 나가는 것도 아니다.
피아노를 치는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나도 여느 초등학생처럼 피아노 학원을 다녔었다. 처음에는 학교 근처 상가에 딸린 학원을 다니다가 가정집에서 운영하는 학원으로 옮겼는데, 거기 피아노에는 뾰족한 가시가 붙어 있었다. 생각 없이 손가락을 굽혀 건반을 쳤다가는 따끔! 가시에 찔리기 십상이었다. 그럼에도 피아노 학원을 가는 게 아주 싫지는 않았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대부분 취미 학원에서 입시 학원으로 옮겨가듯 나 역시 흥미를 잃고 학원을 그만두게 됐다. 아쉽지 않았다.
대학생이 되었다. 시간표를 짜다가 대학생으로서 교양을 좀 쌓아야 할 것 같아 선택한 클래식 수업에 재미가 붙었다. 클래식은 지루하고 졸린 음악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모차르트, 베토벤, 리스트 등 수많은 거장의 음악을 들어보고 그 배경을 배우면서 수많은 악기가 조화를 이루고, 또 단독으로 멜로디 뿐 아니라 섬세한 감정을 표현하는 클래식의 매력에 매료되었다. 더불어 유키 구라모토, 이루마 등 감성을 자극하는 뉴에이지 음악도 들으며 '살면서 악기 하나쯤은 다룰 수 있어야 한다'던 어른들의 말이 가슴속에 계속 맴돌았다.
그렇게 학교 근처의 피아노 학원에 등록했다. 초등학교 앞에 있어서 방과 후가 되면 아이들로 와글거리는 작은 학원이었다. 어릴 때 피아노를 배웠다는 말에 선생님은 기초부터 하지 않아도 된다고 1곡을 정해서 이것만 파자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곡은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ost <언제나 몇 번이라도>.
음악으로 들을 때는 꽤 간단한 멜로디 같았는데 막상 약 10년 만에 마주한 악보는 외계인보다 더 낯선 존재로 다가왔다. 게다가 계이름도 읽지 못하는 상태에서 양손을 다르게 움직이려니 뇌와 몸이 분리돼 거의 유체이탈이 될 지경이었다. 틈틈이 학원에 가서 연습을 했지만 내 한계는 뚜렷했다. 결국 몇 줄 배우지도 못한 채 학원을 관뒀다.
10여 년이 흘러 나이의 앞자리가 3이 되었다. 집 근처에 생긴 성인 전용 피아노 학원의 간판이 눈길을 끌었다. 카톡으로 상담은 했지만 등록하지 않았다. 스무 살 무렵에 그랬듯 또 실패할 것 같아서.
나도 참 미련이 많은 사람이다. 1년이 지나고 피아노 학원에 다시 카톡을 보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작년에 연락 주신 분이죠?'
앗차, 카톡이 남아 있었나 보다. 첫 문의인 척하고 싶었는데 그만 들켜버려 민망했지만 왠지 이번에 포기하면 내년에도 이런 카톡을 받게 될 것 같아 바로 수업을 잡았다.
떨리는 마음을 안고 학원에 들어섰다. 성인 전용 피아노 학원이라지만 별반 다른 점이 있을까 했는데 확실히 내가 다녔던 어린이 위주의 학원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마치 카페에 온 느낌이랄까. 카운터에는 내 또래의 원장님이 서 계셨고 커피나 주스 등 원하는 음료도 마음껏 마실 수 있다고 했다. 카운터 왼편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데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연주 영상을 찍을 수 있다고도 했다. 슬쩍 돌아보니, 작은 방에서 나처럼 다 큰 어른들이 피아노 연주에 열중하고 있었다.
'잘 찾아왔구나.' 마음이 편안해졌다.
피아노를 배운 지 4개월가량이 되었다. 내가 좋아서 배우는 피아노지만 때로는 학원을 가는 게 노동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다.
피아노는 전신운동이다!
두 눈은 악보를 뚫어져라 쳐다보느라 벌게지고, 목은 악보를 봤다가 손을 봤다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눈을 보좌하느라 거북이처럼 굽는다. 그 사이에 뇌는 '이 자리가 도였나? 몰라, 우선 눌러보자.' 했다가 '아니다, 미를 눌러! 그다음에는 라로 가야지!' 라며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는데, 수신 상태는 복불복이라 10개의 힘아리 없는 손가락은 제멋대로 건반 위를 뚱땅거린다. 한껏 긴장한 어깨와 등은 삑사리가 날 때마다 경직되는 바람에 뻣뻣하게 굳어가고 멜로디에 맞춰 페달을 밟아야 하는 오른발은 이미 내 몸이 아니다. 이렇게 1시간 수업을 하고 나면 등이 어찌나 아픈지! 수업을 하고 난 다음 날 아침에는 어김없이 앓는 소리가 난다.
게다가 피아노 연습을 계속하다 보면 웃기는커녕 짜증이 솟구친다. 매주 실력이 느는 걸 보려고 연습 영상을 찍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틀리지 않으려고 온 정신과 에너지를 집중하건만 결국 삑사리가 나고 만다. 반복되는 실수에 진이 빠질 때쯤 머릿속에서 영상 하나가 자동 재생되는데, 바로 조카들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영상이다. 어릴 때부터 배워서인지 손은 건반 위를 날아다니고, 심지어 악보도 없이 수다를 떨면서 연주를 한다. 내가 아무리 시간과 애를 써서 피아노를 배운 들 그 초딩들을 따라갈 수 있을까... 현타가 오면서 패배감이 스멀스멀 차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피아노 학원을 재등록했다. 어려워서 포기하고 싶던 곡들도 결국은 완주하게 되었을 때 느끼는 성취감과 멋진 아티스트의 곡을 들으며 언젠가 나도 연주할 수 있기 되기를 상상해보는 설렘, 때로는 견디기 어려운 도시의 소음과 사람들의 말소리에서 벗어나는 데서 오는 해방감까지! 별 일 없이 흘러가는 매일에 피아노는 큰 파동을 만들어내며 일상에 멋진 변주를 선사한다.
베토벤 교향곡을 치고 말겠다거나 연주회에 나가겠다거나 하는 목표는 없다. 그저 지금처럼 피아노를 배우고 연습하는 일이 내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기를 바란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 머리가 하얘지고 강아지 같은 손자들이 생겼을 때 이들 앞에서 피아노를 치며 호호 웃는 할머니로 남고 싶다.
딩동-
주문한 피아노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