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4일,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낼 겸 집에서 쿠키를 구우려고 반차를 썼다. 베이킹 유튜브를 틀어놓고 따라 하는데 밀가루를 너무 많이 넣었는지 반죽이 뭉쳐지질 않았다. 계란을 넣었다가 버터를 넣었다가 한참 사투를 벌인 끝에 겨우 완성된 반죽을 냉장고에 넣을 수 있었다.
반죽을 휴지 시키는 동안 한숨 돌리려는데 이마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컨디션에 따라 미열이 잦은 편이라 반죽하느라 너무 힘을 썼나 보다 싶었지만 최근 수도권을 중심으로 코로나 감염이 확산되는 데다 무증상자가 대거 발생한 점, 회사에서 답답하다고 마스크를 벗기도 했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밖에서 점심을 먹은 것까지 떠오르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현재 시간은 오후 4시 55분, 선별진료소가 닫는 시간은 오후 6시.. 바로 집 앞에서 택시를 잡아 타고 근처의 선별진료소로 향했다.
주말에 선별진료소에 갔다가 2시간 30분이 걸린다는 말에 되돌아온 전적이 있던 터라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전속력으로 달렸다. 다행히도 주말에 비해 사람이 훨씬 적었다 세이브! 헉헉대며 숨을 고르고 있으니 내 뒤로 한 둘씩 늘어난다. 한 10명쯤 섰을까?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이 입장이 마감되었다는 종이가 붙은 거치대를 들고 줄 끝에 선다.
해가 질수록 추위가 짙어진다. 롱패딩에 기모 바지까지 옷을 있는 대로 껴입고 나왔건만 옷 속으로 한기가 스미는 건 막을 수가 없다. 발을 동동거리며 몸을 움직이는 사람도 있고, 잠시 줄에서 벗어나 간이 난로에 손을 녹이는 이도 있다. 방호복으로 중무장한 의료진도 간혹 난로에 손을 갖다 대며 추위를 견디는 모습이 안쓰럽고 또 감사하다.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가지각색이다. 나처럼 혼자 온 사람들의 대부분은 날도 추우니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저 줄이 빨리 줄어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일행이 있는 사람들은 수다를 떨기도 하고, 이미 검사를 받은 친구가 와서 참을만하다는 둥 이야기를 건넨다. 누군가는 가족에게 검사를 기다리고 있다며 전화를 하고, 어떤 이는 붉게 물든 하늘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나는 코로나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심에 검사를 받으러 왔는데, 다소 평온한 모습으로 검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신기하기도 하다. 불청객처럼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코로나19가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상황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선별진료소 입장이 마감됐음에도 하나둘씩 검사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도착한다. 입장 마감이라고 적힌 거치대를 든 의료진은 누군가 다가올 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한다. 오늘은 마감되었으니 근처에 늦게까지 운영하는 보건소로 가시거나, 모레에 다시 오시라고. 대부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가지만 몇몇은 강하게 불만을 토로한다. 운영시간은 오후 6시까지 아니냐고, 왜 벌써 마감이 되냐고. 항의를 하는 데 성별, 나이는 관계가 없다. 젊은 여성도 중년의 남성도 있었으니.
줄 밖에 서 있는 그와 줄 안에 서 있는 나. 마치 38선을 두고 남과 북으로 나눠진 것처럼 거치대 사이로 우리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검사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된 대기줄에 서서,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그들을 바라본다.
'그러게, 빨리 왔어야지. 18시까지니까 18시에 문을 닫는다는데 저 똥고집은 뭐야. 나이를 어디로 드신 건지..'
아저씨는 분에 못 이겨 자리를 떴고 나는 예정대로 검사를 받았다. 처음이 아니었는데도 면봉이 콧구멍으로 들어간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사실 이번이 더 아팠다. 검사를 받고 나니 몸이 괜찮아지는 것만 같은 이상한 개운함을 느끼며 집으로 향했고, 이틀 뒤 음성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날 밤 줌으로 친구들에게 검사 후기를 영웅담이라도 되는냥 떠들며, 고생하는 의료진들에게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 망정 불만을 토로하던 사람들의 뒷담화도 빼놓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연휴가 끝나고 출근을 했다. 아침부터 습진이 난 손가락이 따가워 신경이 쓰였다. 코로나 때문에 손을 자주 씻다 보니 피부가 건조해 탈이 난 것이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우선 핸드크림을 바르며 관리를 해보고 차도가 없으면 먹는 약을 쓰자고 하셨는데, 초기에 습진이 심했던 부위가 괜찮아지자 곧 다른 손가락이 부르트기 시작했다. 이쪽은 상태가 더 심각해서 결국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병원에 다녀오기로 했다.
회사에서 병원까지는 약 1시간. 회사 근처에도 피부과가 있지만 굳이 집 근처의 병원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의사 선생님 때문이다. 결혼식 6개월 전부터 이 피부과를 다니면서 선생님과 내적 친분을 쌓은 데다 세심하고 꼼꼼한 관리로 내 피부를 최상의 상태로 끌어올려주신 전적이 있기 때문. 병원에 도착하니 12시, 병원 점심시간까지는 한 시간이나 남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카운터로 다가갔다.
"이름은 김소-"
"진료 마감되었습니다."
달랑 세 글자뿐인 이름을 끝마치기도 전에 진료를 볼 수 없다는 말이 귓가에 앉았다. 대기 환자가 많아 오전 진료가 벌써 마감되었단다. 간호사 선생님은 오후 2시에 다시 오라는데 당일 반차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머리가 아파온다.
"저 2시에는 회사로 돌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좀 안될까요?"
"이미 대기 환자가 많으셔서 1시 이후에도 진료를 봐야 하는 상황이에요."
순간적으로 찌푸려지는 내 미간.
"아.. (혼잣말로) 의사 선생님이 보시면 해주실 텐데.. 저까지만 좀 어떻게 안될까요?"
"죄송합니다."
흥. 나는 홱 돌아서서 병원을 나왔다.
안 그래도 월요일이라 힘들어 죽겠는데.. 겨우 믹스 커피 한잔 마시고 지하철에 버스까지 갈아타며 장장 한 시간을 걸려서 왔는데 진료를 못 받는다고?
겨우 손가락 하난데, 의사 선생님이 30초만 봐줘도 되겠구먼. 내가 여길 5개월 가까이 다녔는데 진짜.. 너무한 거 아냐?!
점심거리를 사서 집으로 걸어가는데, 머릿속에 선별진료소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이 스쳤다. 의료진에게 계속해서 항의하며 자기만 받아달라고 말도 안 되는 떼를 쓰던 이들의 모습이. 그리고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그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내 모습이 오버랩됐다. 언성만 높이지 않았을 뿐- 나는 그들과 다름이 없었다. 완전 진상.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내 눈에는 이미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서 진료를 받고 점심을 먹어야겠다는 생각뿐.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과 대기가 마감돼 발걸음을 돌렸을 이들, 그리고 병원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내 사정만 생각했던 거다.
만약 선별진료소에서 내가 몇 분 차이로, 아니 몇 초 차이로 검사를 받지 못했다면 나는 쿨하게 돌아설 수 있었을까?
불쑥 튀어나온 이기심에 얼굴이 화끈,
부르튼 손가락이 찌르르 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