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이 약속이라도 한 듯 제주도로 휴가를 떠났던 지난여름, 나는 청개구리 심보가 발동해 제주를 제외한 내륙의 여행지를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여행지가 아니라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는 말이 맞다. 호텔업에 종사하면서부터 내 여행의 중심은 뭘 보고, 뭘 먹느냐보다 '어디서 자느냐'가 되었으니까. 깨끗하고 정돈된 공간이 선사하는 쾌적함은 물론 콘셉트와 분위기, 디테일이 한데 어우러져 그 공간만의 개성이 한껏 묻어나는 곳에서는 새로운 활력과 자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덩달아 나도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은 설렘도 있고.
평소 인스타그램에 북마크 해놓은 게시물을 보다가 '아원고택'을 발견했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전주의 한옥스테이로 알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전주 옆 완주에 있다. 편도로 약 3시간 30분 거리라 1박으로 다녀오기에는 조금 부담스럽지만 장장 7일간의 휴가에 이 정도쯤이야. 마침 내가 가능한 날짜에 원하는 객실도 남아있다! 이럴 때 제일 신나.
가는 날이 장날이다. 미친 듯이 폭우가 쏟아져 장장 4시간이 넘게 걸렸다. 구불거리는 산길을 오르자 소양고택이라는 표지판이 보여 움찔- 이곳은 아원고택과 같은 계열이나 자녀 동반 고객을 위한 펜션과 카페, 서점으로 구성되어 있단다. 직접 들어가 보진 않았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노키즈존이라 두 숙소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 않을까 싶다.
드디어 아원고택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숙소 매니저님께 전화를 드리자 직원이 익숙한 몸놀림으로 입구와 주차장을 가로막고 있던 대나무를 치우고, 우리의 짐을 받아 갤러리로 안내해준다. 1박 가격이 웬만한 호텔과 맞먹지만 예상치 못한 캐리어 서비스에 기분이 좋다.
아원고택은 한옥과 갤러리, 카페로 구성된 복합 문화공간이다. 관람료를 내면 오후 4시까지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체크인을 30여분 앞두고 우리가 도착했을 때까지 꽤나 북적거렸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갤러리에 들어서자 생각했던 것보다 크고 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벽에 걸린 그림들이 인상적이다. 어떤 그림은 살풀이 중인 무당 같기도 하고 또 어떤 그림은 전통 의상을 입은 이들의 힘찬 행렬을 그린 듯하다. 명확하지 않은 선과 형태 사이로 온갖 색이 휘몰아치는 듯 강렬한 기운을 내뿜고 있어 자꾸만 시선이 닿는다.
다른 벽에는 고급스러운 피아노가, 그 옆에는 인스타그램에서 자주 보던 나무 모양의 오브제가 서 있다. 천장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 빗줄기가 나무 위로 계속해서 쏟아진다. 톡톡톡- 비가 추락하며 내는 소리,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이름 모를 음악, 사람들의 말소리, 검은색 피아노, 불교색을 띤 그림들. 어우러지지 않을 것 같은 요소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생경하면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신기한 풍경. 웰컴 드링크로 받은 오미자차를 마시고 있자니 어느새 비가 그쳤다.
오후 4시, 드디어 체크인 시간이다. 매니저님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우리가 하루 동안 머물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는 작은 연못도 있고 대나무가 늘어선 숲 속 산책로도 보인다. 곧이어 사진으로만 보던 세 채의 한옥이 나타난다. 이들은 본래 경남 진주에 있던 것으로 이축을 위해 분해했다가 다시 이곳에 와 조립한 것이라고 한다. 마치 레고처럼 집을 조립하고 분해할 수 있다니! 조상님들의 지혜는 알면 알수록 대단하다. 게다가 이 한옥들이 지어진지는 무려 250년이나 되었다. 몇 세대가 바뀔 만큼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는 것에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우리가 머물 곳은 설화당(안채). 입구에서 보자면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 왠지 모를 안락함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크기도 다른 한옥에 비해 작은 편이지만 대신 단독으로 사용할 수 있고 두 사람 머물기에 아늑하기 그지없다. 지대가 높은 곳에 있어 부드러우면서도 깊은 산세를 자랑하는 종남산과 흐드러지게 핀 마당의 백일홍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주차장과 연결되는 골목길과 가까워 외부로의 이동은 또 수월한 것도 장점이다.
대강 짐을 풀고 처마에 앉았다. 한창 사진을 찍던 관광객들이 바쁜 발걸음으로 아원고택을 벗어난다. 언제 그랬냐는 듯 쨍쨍 내리쬐는 햇살 아래, 처마에 등을 기대고 앉아 떠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꼭 대감집의 주인어른이라도 된 듯 어깨가 으쓱해진다.
편한 신발로 고쳐 신고 본격적인 구경에 나선다. 다른 한옥들은 어떻게 생겼나 열심히 구경하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면서 걷는 차우차우와 인사도 나눈다. 산책로가 있어 걸어볼까 했는데 모기에 잘 물리는 남편이 도저히 못 견디겠다길래 시작도 못하고 빠져나왔다. 유독 모기에 잘 물린단 말이야.
한 바퀴 돌아봤으니 이제 인스타그램에서 보던 인생 사진을 따라 찍어볼까. 포토존은 한옥 중에서 산과 가장 가까이 마주하고 있는 만휴당 앞에 있다. 작은 디딤돌을 밟고 올라서면 그 뒤로 그림같이 넓고 푸른 종남산이 펼쳐진다. 건축가는 이 산의 아름다움에 반해 아원고택을 짓게 되었다고 했다. 디딤돌 바로 뒤에는 산을 더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 물웅덩이와 잔디밭이 있다. 잔디는 연둣빛으로 밝게 빛나고, 웅덩이에는 산자락이 고스란히 비쳐 마치 3D 영상을 보는 듯 입체적인 자연 풍경을 사진에 담을 수 있다.
아원고택의 전체 대지는 1000여 평에 달한다. 늘어선 돌담이나 조경에서 자연 그대로의 멋을 느낄 수 있으며 노는 공간이 없게 신경 써서 조성했다는 느낌이 든다.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한옥 또한 마찬가지다. 방으로 들어가는 문에는 문풍지가 발려져 있고 문을 잠글 때는 어릴 적 할머니 집에서 보던 물고기 모양의 자물쇠를 채워야 한다. 내부로 들어가면 차를 내려 먹을 수 있는 차기 세트와 소반, 깨끗한 이부자리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일반적인 숙박시설에 갖춰진 tv나 냉장고는 없다. 대신 편안하고 쾌적한 휴식을 위한 다이슨 공기청정기와 이솝 어메니티가 세팅되어 있어 투숙의 질을 높인다.
어둠이 내린 밤. 산이 잠자리에 들자 다시 빗줄기가 굵어지며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집과 정면으로 부딪히고, 빗방울은 처마 위로 추락하며 굉음을 낸다. 몇 겹의 두꺼운 유리창에 둘러싸여 그동안 듣지 못했던 자연의 소리. 이러다 집이 통째로 날아가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소란스러웠지만 신기하게 잠은 잘 잤다.
눈을 뜨고 창문을 열었다. 비는 그쳤고 바람도 잠잠하다. 다만 전날 밤의 비구름이 남겨두었는지 풍성한 운무가 산을 휘감고 있다. 여행에서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는 것만큼 우울한 일이 없지만 아원고택만은 예외다. 히끄무리한 운무로 인해 산과 흐린 하늘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신비로움이 감돈다. 이처럼 가공되지 않은 자연에서는 고상하고 우아한 멋마저 느껴진다. 이런 걸 '운치'있는 풍경이라고 하더라.
멍하니 밖만 바라보다 조식을 먹으러 나섰다. 아침을 많이 먹는 편은 아니지만 여행의 꽃은 조식이 아니던가. 숙박비에 조식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더더욱 놓칠 수 없다. 갤러리 안쪽으로 향하자 몇 개의 테이블과 정갈하게 차려진 아침상이 눈에 들어온다. 뜨끈한 누룽지와 합이 좋은 나물 반찬들, 갓 구운 옥수수, 시원한 수박 한 조각. 소박하면서도 정성이 뚝뚝 묻어나는 식사에 '와, 역시 아원고택이다' 탄성이 흘러나온다.
서울, 경주, 전주 등 전국 각지에서 한옥 스테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중 아원고택은 할머니께서 내어주신 어느 시골집 혹은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한옥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장엄하게 품은 대감집에 가깝다. 아원고택은 이용객들에게 이 느낌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각 공간을 세심하게 조성하고 품격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처럼 통일된 아이덴티티로 브랜드를 만들었다는건 짓고, 운영하는 이의 수많은 고민과 노력의 결과물이다.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아원고택에서의 하룻밤은 더욱 특별한 추억으로 남았다.
추운 겨울, 흰 눈으로 뒤덮인 종남산과 아원고택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다음에는 겨울에 와야지.
* BTS는 '2019 서머 패키지 인 코리아' 화보와 영상을 아원고택에서 촬영했으며
최근 한국관광공사의 'the rhythm of korea - 전주 편' 영상에 아원고택은 등장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