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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여 Sep 13. 2021

된장남과의 데이트

나와 남편은 친한 지인의 소개팅으로 만났다. 지하철역 출구 앞에서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누며 그가 예약해둔 파스타집으로 향했다. 2월이었지만 다소 견딜만한 추위에 둘 다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가 코트를 벗자 태평양 바다처럼 넓은 어깨가 나타났다. 나는 풍덩 빠져 버렸다.


우리는 잘 맞았다. 둘 다 영화를 좋아했고 특히 미국 드라마 '프렌즈'의 팬이었다. (결혼을 하고 보니 그는 프렌즈보다 '오피스' '하우 아이 멧 마더'를 훨씬 더 좋아한다. 배신자!) 처음 만난 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던 우리는 곧 연인이 되었다.


관계는 물 흐르듯 순탄히 흘러갔다. 그를 몇 개월 만나지 않았음에도 이 사람이면 결혼해도 좋겠다 싶었다. 마침 우연한 계기로 남편은 우리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고 나도 곧 그의 가족을 만나 결혼 날짜까지 잡게 되었다. 그렇게 결혼 준비로 바쁘지만 또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아마도 결혼식을 6개월쯤 앞둔 겨울이었다.


외식을 하고 내가 살던 자취방으로 돌아온 우리. TV도 보고 수다도 떨다가 헤어질 시간이 되어 현관에서 아쉬움 가득한 포옹을 하는 참이었다.


나는 향수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내 취향에 완벽히 부합하는 남자 향수 하나는 알고 있는데 바로 러쉬의 '더티'다. 나를 만나기 전부터 남편이 썼던 제품인데 호불호가 강하기로 유명한 제품임에도 불구하고 내겐 언제나 '호'였다. 남편에게서는 늘 기분 좋은 더티 향기가 났고 혹여나 향수를 뿌리지 않는 날에는 그만의 포근한 채취가 맴돌아 그건 그거대로 좋았다.


그런데 데이트를 마치고 헤어지려던 그 겨울밤, 내 후각에 감지된 향기는 러쉬의 '더티'도 그의 '채취'도 아니었다.


그건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구수한 '된장냄새'였다.


더 최악은 심지어 그가 입은 니트마저 된장 색이었다.

짙은 브라운도 연한 베이지 아닌

리얼 된장 색 말이다.


이 색과 비슷하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가 잘 아는 음식을 시켰는데 완전히 다른 맛이 느껴질 때의 당혹스러움과 황당함 말이다. 나도 신혼여행을 가려고 탄 터키항공에서 단호박 수프에서 카레맛이 나서 식욕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경험이 있는데 된장 사건도 같은 맥락이었다. 내 눈에 항상 멋졌고 세련됐던 남자에게서 몇십 년은 쾌쾌 묵은 된장냄새가 나다니! 그 순간 그를 감싸고 있던 콩깍지는 와장창 부서져버렸다. 내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된장남이었다.


'아 된장냄새 뭐야!!'

내가 분노하자 남편은 당황하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니, 벽에 걸어둔 거 입고 나왔는데.. 집 냄새가 배였나 봐..'


장담하건대 내 자취방은 물론이고 본가에 아무리 옷을 걸어둬도 그 정도 레벨의 된장냄새는 배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는데 (콩깍지 파괴로 인한 대혼란의 시기를 겪고) 결혼 후 시댁에 가서야 그의 말이 진실임을 알 수 있었다.


시댁에 가면 서울 한복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시골 할머니 댁에 온 느낌이 든다. 부엌에는 세월이 켜켜이 쌓인 어머님의 살림살이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고 안방에는 요즘 빈티지 카페에서 볼법한 자개장이 세워져 있다. 거실 벽에는 무려 아버님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셨을 때 찍은 흑백 사진부터(남편은 늦둥이다) 자식들이 초중학교 시절 대회에 나가 받은 상장과 메달들, 사랑스러운 손주들의 사진까지 3대의 역사가 고스란히 펼쳐져 있다. 베란다에는 어머님이 밭에서 따온 빨간 고추가 마르고 있고. 그리고 집에서는 디퓨저나 인센스 향이 아닌 쾌쾌하면서도 친근한 우리네 된장냄새가 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버님과 어머님은 결혼 후 서울로 상경하셨다고 한다. 두 분은 밤낮없이 일하며 사업을 꾸려 나가셨고 어머님은 다섯 가족의 식사까지 책임지셨다. 그러니 멸치육수에 된장 몇 스푼 풀고, 냉장고에 있는 야채 두세 가지만 듬뿍 집어넣어도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되는 된장찌개는 이 집의 안방마님이 되어 늘 부엌 한편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었던 것이다. 된장냄새는 늘어나는 추억과 함께 더 짙어졌을 것이고.


집에서 풍기는 쿰쿰한 된장 냄새, 일흔이 넘으신 시부모님,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시조카들, 거실에 앉아 이 가족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꼭 주말 연속극을 시청하는 기분이 든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면 흙침대에 앉아 어머님의 무릎을 조물 거리며 수다를 떠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이렇게 된장 가족의 일원이 되어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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