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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여 Oct 28. 2021

카메라는 켜졌다. 연주를 시작했다.

뉴에이지 음악의 거장, 유키 구라모토의 meditation

중학생 무렵부터 나는 뉴에이지 음악을 즐겨 들었다.


한창 아이돌을 덕질하며 가요를 들을 나이에 뉴에이지 음악이라니. 음악에 조예가 깊은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나는 아이돌을 좋아하던 평범한 10대였고 뉴에이지 음악은 내게 '덕질'을 위한 훌륭한 수단이었다.


바로 팬들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주인공으로 직접 쓰는 소설, 일명 팬픽을 읽을 때 배경음악으로 뉴에이지 음악만 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사가 없어 집중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기쁨이나 설렘, 애절함, 혹은 분노나 비장함까지 느낄 수 있기에 뉴에이지 음악을 틀고 소설을 읽으면 완벽한 몰입 상태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의 나는 유키 구라모토의 음악을 들으며 가슴 설레어하고,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곤 했다.


지난 3월, 30대인 나는 초등학교 때 이후로 거의 발길을 끊었던 피아노 학원을 다시 등록했다. 특별한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다룰 수 있는 악기 하나쯤은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독서나 영화감상을 대신할 새로운 취미를 만들고 싶기도 했고.


동요 수준으로 편곡된 베니스의 사육제를 시작으로 내가 칠 수 있는 곡은 하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학원을 3개월 정도 다녔을 때 이루마의 샤콘느 chaconne를 배웠다. 난이도가 확 올라가서 애를 먹었지만 뉴에이지 음악을 배운다는 기쁨이 더 컸다. 이후 2곡 정도 더 배우고 나서야 나는 학원 책장에 꽂힌 '유키 구라모토' 악보집을 꺼낼 수 있었다.


악보집에 수록된 곡들 중에 내가 선택한 건 유키 구라모토의 '메디테이션 meditation'

발매된 지 20년 가까이 된 곡이지만 들을 때마다 감탄을 자아낸다. 비 온 뒤 이파리에 맺힌 물방울처럼 맑고 투명한 소리와 서정적인 선율이 어우러지고, 가슴속에는 떠오르는 해처럼 희망이 차오른다. '명상', '묵상'이라는 뜻의 제목처럼 음악이 흐를수록 먹구름으로 뒤덮인 마음이 맑게 개는 듯하다.


이 곡을 직접 연주하게 되다니! 비록 내가 보는 악보는 원곡에 비해 길이도 짧고 음표도 숭숭 빠진 초보자용이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건반 위를 헤매던 손가락이 제자리를 찾고, 귀에 익은 멜로디가 손 끝에서 피어난다는 사실만으로 행복감이 무럭무럭 샘솟았으니까. 이런 게 힐링이지.


새로운 곡을 배울 때는 가장 먼저 계이름을 익힌다. 그러고 나서는 음표에 따라 멈췄다가 또 움직이는 간격을 맞추며 멜로디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조정하고, 손과 눈에 악보가 익으면 강약 표현에 집중한다. 3분 내외의 짧은 곡이지만 그 안에서도 강함과 약함, 빠름과 느림을 조절하면 훨씬 풍성한 연주를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건반을 누르는 힘의 세기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하는데, 20년 넘게 키보드 워리어로 살아온 열 손가락에 힘이 있을 리가. 특히 제일 작고 얇은 새끼손가락은 피아노를 칠 때마다 옆으로 쓰러지기 일쑤. 소리가 시원찮은 건 당연지사고.


손가락마다 무거운 추라도 달아볼까 우스개 소리를 하다가 선생님의 제안으로 '하농'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하농은 기초적인 피아노 테크닉을 익히도록 도와주는 연습 교본이다.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훈련해야 하기 때문에 보통 어린이고, 어른이고 하농을 싫어한다지만 나는 오히려 하농을 칠 때마다 스트레스가 풀렸다. 손가락 끝에 온 힘을 싣고 그저 달리기만 하면 되는데, 짜증날 게 뭐람?


 하농 수업 때는 열정이 지나쳤는지  끝은 물론 머리부터  끝까지 온몸에 힘을 주는 바람에 등에 담까지 얻었다. 그럼에도 나는 하농이 좋다. 쾅쾅 건반을 내리치는 쾌감과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소리를 느낄  있어서. 하농 만세!




메디테이션을 연습한 지 한 달쯤 되던 날,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았다. 학원에서는 한 곡을 마스터하면 그랜드 피아노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 보내준다. 누가 등 떠밀어 학원에 등록한 건 아니지만 콩쿠르 수상 같은 목표도 없고, 취미로 다니는 이들이 대부분이기에 지속적인 '동기 부여'를 위한 성인 피아노 학원의 정책이다.


그랜드 피아노는 큰 덩치만큼이나 깊고 넓은 소리를 낸다. 꼭 동굴같다. 낮은 음은 심연으로 빠져들 듯 더 낮게 들리고, 높은 음은 하늘을 뚫을 듯 더 높게 내지른다. 폐쇄된 연습실에서 일반 피아노를 칠 때는 음 하나 하나가 바로 내 귓가에 날아와 꽂힌다면, 그랜드 피아노에서는 각 소리들이 얽히고 증폭되어 어디론가 날아가버리는 것만 같다. 웅웅 울려퍼지는 소리가 어색하고 건반을 누르는 느낌이 낯설다. 게다가 카운터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내 촬영을 위해 숨죽이고 있다. 손바닥에는 평소 잘 나지도 않는 땀이 샘솟고 급기야 나는 첫마디부터 틀리는 실수를 하기 시작한다.


잠시 방에 들어가 가뿐 호흡을 가다듬고 연습을 했다. 그리고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지만 이미 페이스를 잃은 지 오래. 의지와 집중력은 옅은 안개처럼 흩어져 현관문 사이로 빠져나가는 중. 내가 원하면 50분 내내 찍고 또 찍을 수 있었지만 결국 촬영 중단을 선언했다. 선생님은 다른 수강생들도 많이들 긴장한다며 1주일간 그랜드 피아노에서 연습하라는 특훈을 내려주셨다.


어느 것 하나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일상 속에서 피아노는 나의 발전과 성취를 오감으로 확인할 수 있는 도구이자 탈출구였다. 그래서 나만의 meditation을 멋지게 완성하고 싶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씁쓸했다.


저녁을 먹고 두 달 전에 산 전자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촬영하던 순간을 곱씹었다. 심지어 첫 촬영도 아니고 두 번째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이없는 실수를 남발했다. 첫 촬영 때는 엉덩이에 땀이 날 만큼 긴장했지만 그래도 연주는 마쳤는데 오늘은 왜 그랬을까.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충분하지 않았다는 걸.


눈을 감고도 칠만큼 연습했다면 도구가 대수일까. 연습할수록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욕심이 커지고 생각도 많아진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내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면 결국 해냈을 거다. 내 부족함을 인정하고 나니 덩굴처럼 얽혀있던 생각과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1주일 후, 다시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본격적인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20분 정도 연습시간을 가졌다. 첫 음부터 마지막 음까지 연주하는 데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건반을 누르는 손 끝이, 패달을 누르는 다리가 덜덜 떨릴 만큼 긴장했지만 마음은 오히려 차분했다. 이 곡을 수십 번 치고 들으며 연습했으니까 자신 있었다. 마침내 두 번째 촬영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선생님과 원장님, 카운터에 앉아있던 수강생 한분이 박수를 쳐주셨다. 김소여 잘했다! 나도 마음속으로 짝짝짝.


어느덧 삼십 대 중반. 사춘기와 오춘기 사이에 접어든 것인지, 아니면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어른이 되는 과정에 돌입한 건지 모르겠지만 수많은 고민과 불안에 잠식되는 날들이 많았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고민과 노력 없이 얻어낸 것들의 가치는 금세 사라진다는 걸 배우며- 여전히 불안정하고 불만족스러운 나를 다스리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는다. 이 과정이 꼭 마음을 위로하는 meditation 같다면 유난일까.




지난 9월, 유키 구라모토가 전라북도 김제시를 방문했다. MBC 유튜브 오느른에 출연해 동이 트는 새벽녘, 길 한가운데에서 작은 콘서트를 열었다. 02:03부터 meditation. 이 영상을 보시는 분들도 나와 같은 행복을 느끼셨으면 좋겠다.

유키 구라모토의 시골길 라이브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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