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하는 여행을 좋아한다. 조용히 사색하는 시간이 좋고, 혼자 걸으면 듣게 되는 바람소리, 새소리, 자동차 소리가 좋다. 나의 사소한 사생활을 잊고 전혀 다른 세계에 초대받은 이방인으로 아주 잠깐 새로운 곳에 머무르는 낭만을 즐긴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처럼 늦은 밤 홀로 걷는 파리 시내에서 고흐와 헤밍웨이, 피카소를 만날 수 있는 그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이유다.
나에게 여행은 도피와 달란트, 그리고 낭만이다. 몇 년간 학교 휴학 후 오후 1시부터 밤 10시까지 학원 알바를 하던 1~2년 동안 오전 중에 근처 뒷산에 하루에 한 번씩 정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이 일상인 날이 있었다. 친구들 모르게, 학교 동생들 모르게 호주 어학연수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가족 이외에는 아무도 나의 휴학 이유를 알지 못했고, 화장실도 없는 1.5개 방이 있는 월세집에 살고 있는 내가 먹는 끼니마다 소화불량으로 두통약과 소화제를 달고 살았던 그때. 나에게 가장 휴식 같은 시간은 아침마다 오르는 등산길이었다. 선선한 바람에 새소리 듣고 푸른 나뭇잎사귀 보며 한숨 돌리고 내려오면 그래도 돈을 벌기 위해 억지로 나가는 출근 길도 조금은 견딜만했다. 1시간 정도 올라갔다 내려오며 단련된 나의 튼실한 다리 근육이 아직도 유효한 걸 보면 그때의 내 스트레스 해소법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몸도 마음도 지켜주는 것이였단걸...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의왕시내 풍경을 보며 복잡하고 시끄러웠던 내 마음을 많이 가라앉혀주는 고마운 곳이었다. 나에게 산은 누군가와 수다를 떨며 간식을 싸와 봄소풍 가듯 오르는 곳이 아니였다. 오롯이 혼자이고 싶었고 유일한 나의 놀이터였다. 조용히 멍 때릴 수 있는..
등산이 지겨울 때 한번 가보고 싶다고 마음속에 생각해두었던 곳을 주말이 되면 훌쩍 혼자 다녀왔던 곳이 있다.
화, 수, 목요일 저가항공의 할인 비행기 시간표에 맞춰 떠났던 제주도. 비용을 아끼려고 늦은 밤 찾았던 탄산온천의 찜질방도, 여러 명이 함께 쓰는 게스트하우스의 삐끄덕 거리는 철제 침대 신경질적인 소리에 뒤척이던 밤도. 뭐 그럭저럭 괜찮았다.
내겐 이른 새벽 가방을 메고 나와 혼자 걷는 숲 향기 가득한 비자림에서의 행복한 시간이 있었고,
오월의 시원한 바람이 너무 좋아 혼자 오르면서도 발걸음이 가벼웠던 용눈이 오름,
만장굴의 괴이한 풍경도 좋았고,
석양을 보며 해안절벽 옆 카페에서 일기를 쓰며 혼자 홀짝이던 스타벅스 커피도 훌륭했으니까.
발바닥이 아프면서도 자갈밭, 모래 밭길을 걸으면 보았던 올레길의 억새풀도
시커먼 까마귀 친구들과 함께 걷던 조용한 영실코스의 한라산 풍경도 '사자와 마녀 옷장'의 배경처럼 환상적이었다.
그 정도면 한 두세 달은 견딜 진통제가 될만했다. 알약으로 된 두통약, 마시는 소화제보다... 그러다 약기운이 떨어질 때쯤 고속터미널에 가서 속초행 버스를 타고 동해의 깊은 푸른 바다를 보고 오거나, 갯배를 타고 드라마 가을동화 촬영지 아바이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오기도 했다.
수원 버스터미널에서 4시간 걸리는 경주에 무작정 혼자 버스를 타고 다녀오기도. 혼자 1박을 하는 게 무섭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관광객이 득실거리는 곳이 아녔기에 조용히 자전거를 타고 보문단지를 돌아다니고, 소박하니 예쁜 연꽃이 가득하고 개구리울음소리마저 귀엽다 느끼는 늦은 밤 대릉원에서 바라본 총총한 별은 나의 처지와 부끄러운 현실에 그래도 감사의 마음을 갖게 하는 인생 멘토가 되기도 했다. 혼자 떠난 여행에서 먹는 식사와 잠자리는 비록 나의 가벼운 주머니만큼 처량해 보일지 몰라도 내가 걸으며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이 나의 정신건강을 얼마나 안전하게 지켜준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친구들이 늦은 밤까지 술을 먹고 노래방을 가고 홍대의 클럽에서 취미생활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나 혼자 저 멀리 떨어져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내 삶을 버티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도 숨 쉴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으니까. 그게 여행이었다.
다행히도 견디고 버텨온 시간의 흐름만큼 나의 생활은 나아지고 안정되어 나에게 해주는 고마운 인사, '수고했다'는 칭찬, 그 어느쯤으로 내 주머니에 조금 무리가 가도 한 번은 거하게 떠나고 싶었던 그곳으로 다녀왔다.
나의 첫 유럽 여행지.
십 년 전부터 너무나 가고 싶었던 그곳. ITALY
마음속 한 구석에 꼭... 한 번은 혼자 다녀오고 싶었던 이탈리아.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의 준세이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피렌체 두오모 성당 그 어딘가에 가면 길 한복판에서 내가 아오이가 된 냥,..헤어진 쥰세이와 조우할 수 있진 않을까 하는 기분 좋은 설레임으로. 혼자 하는 첫 유럽여행이라 자유여행은 부담스러워 선택한 패키지가 조금 아쉬웠지만. 나의 기대와 환상 속 피렌체는 너무도 예쁘고 머무리는 한 순간 한순간 행복한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이 서서히 내 눈 앞에 나타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며 칠이라도 그곳에 머무르며 도시의 구석구석을 다녀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던 곳. 냉정과 열정사이를 읽을 때 함께 하던 그 사람과 꼭 함께 오고 싶었던 그곳. 헤어지고 나서 한 번도 내가 먼저 연락한 적 없었던 그곳에서 생각난 그 사람의 안부 그리고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나의 첫 번째 유럽 여행지. 대학생 친구들의 배낭여행이 너무 부러웠던 내가 그래도 서른세 살이 되어 나에게 기특한 선물을 해줘 뿌듯했던 2014년 그 해 겨울. 내 안의 우주가 더욱 확장되던 시작.
서른 중반 이후부터는 내 통장에 모이는 돈도 있고 부장하며 남들보다 조금씩 더 들어오는 성과급 덕분에 알차게 모인 돈으로 조금 더 여유 있게 여행을 계획하고 가고자 마음먹으면 갈 수 있게 되었다. 십 년 전에만 하더라도 마음속으로만 상상 가능했던 일들을 내 현실로 만들고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다.
가우디 평생의 역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안에 들어가 가족과 나를 위한 기도를 드릴 수 있고,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 나온 대만의 소박한 도시의 낭만을 친구와 수다 떨며 즐겁게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
밤 10시 알렉상드르 3 세교에서 에펠탑의 화려한 조명과 야경을 보며 낭만적인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것.
해리포터가 마법학교에 가기 위해 들른 세인트 판크라스 역의 9와 3/4 플랫폼에 내가 서 있다는 것.
"지윤이의 상상이 현실이 된다."
20대에는 꿈만 꿨던 일들이, 십 년이 지나 내가 하나씩 이루고 있다는 그 사실에 감사한 마음으로.
혹여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 나 자신에 대한 과한 칭찬과 자만으로 읽는 이의 배를 아프게 할 의도는 아니라는 점. 자기 과시용 인스트 그램의 사진 업로드와 방학으로 남는 시간을 해외여행하며 유유자적하는 교사들의 사치로움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님을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여행을 다니며 보고 느끼고 나를 일깨워준 많은 것들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함일 뿐. 일상의 routine에 갇혀 힘들어하는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나에게 장소와 시간의 낯설음이 주는 설레임을 나는 여행을 통해서 재충전하고 새로운 일상의 계획을 세운다는 것. 그 소중한 경험을 기록해두고 싶을 뿐.
앞으로도 나는 시간과 경제적 여건이 마련되는 한 내가 평소에 한 번쯤 머무르고 싶었던 곳으로 용기 있게 돌아다닐 생각이다. 혼자 하는 여행의 외로움과 허전한 멋도 좋고, 함께가 주는 추억의 공유도 이젠 기꺼이 받아들인다. Wil you join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