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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경가 준서 Nov 03. 2022

정원이라는 낯선 이름

우리에게 정원이란 무엇인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2011년 어느 날. 우리는 낯선 런던의 모처에 앉아 있었다. 이곳은 Hyde Park의 한 귀퉁이로, Serpentine Gallery가 있는 곳이다. 이 미술관의 야외에 커다란 Black Box 같은 구조물이 있다. 밖에서 보면 단순히 검은 벽에 둘러싸인 직육면체 같은 구조물이다. 하지만 이 벽안으로 들어가면 좁고 어두운 복도가 있고, 들어가는 문과 어긋난 위치에 내부로 뚫린 다른 문이 있다. 그 좁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야 만 내부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해둔 것이다. 그렇게 외부와 차단된 내부는 다시 처마가 있어 내리는 비가 닿지 않는 둘레 공간을 만들고 있고 길쭉한 화단을 머금고 있다. 하지만 그 화단의 위는 하늘로 열려있다. 모든 색을 삼켜버린 검은 벽, 세상의 모든 빛과 색을 드러낸 화단. 이 강렬하고 간명한 대비를 이루는 이 공간은 Hortus Conclusus. 곧 정원이다. Peter Zumthor가 제안한 이 공간은 Serpentine Gallery가 마련한 프로그램인 Serpentine Pavilion Project에 제출된 건축가의 설치작품이다. 그해의 건축가로 선정된 그는 그의 건축 작품으로 정원을 선사한 것이다.

Hortus Conclusus

처마 아래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화단을 망연히 들여다보다 그 주변에 앉은 다른 이들을 바라봤다. 어느 누구도 인상을 쓰는 이 없이 밝고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더러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 서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그 소리조차 이 행복한 미소에 묻혀 시끄러움을 잃어버렸다. 이들은 왜 이렇게 행복해 보이는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이 행복한 느낌의 공유는 어떻게 가능한가. 끊임없이 궁금증이 몰려들었다. 

이들을 이렇게 행복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 공간이다. 오로지 아름다운 꽃과 식물들을 바라보도록 조작해 놓은 이 정원이, 비록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잔뜩 찌푸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세상 어디서도 본 적 없을 것 같은 행복한 미소를 이들에게 선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원은 그런 곳이다. 

오늘날에야 이 '정원'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낯설게 느껴지지 않지만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삶과는 많은 거리감을 두고 있었다. 어느 날엔가 열심히 설계안을 프레젠테이션 하는 내게 클라이언트가 물었다. '박 소장, 저 담장 너머 산에 온갖 자연이 펼쳐져 있는데 꼭 이 울타리 안에 돈을 써서 이렇게 만들어야 하나?' 내 머릿속은 순간 멈춰 섰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이없는 이 질문에 나는 어떤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했었다. 이 말은 '정원이란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저 대자연에 비교 할바도 안 되는 그런 것인데 집 짓는 일에도 돈이 많이 드는 상황에서 굳이 돈을 들여 만들어야 하나'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바탕은 사실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건물을 짓는 데는 수억 원의 돈을 당연히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원을 짓는 데는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자체와 공공기관을 통해 만들어지고 소비되고 있는 00 정원박람회들은 우후죽순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지만 우리의 일상 속으로 들어오기엔, 우리 삶 속에 자리잡기엔 아직도 먼 거리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정원의 시작

정원은 '숲'에 대한 그리움, '숲'에 대한 간절한 욕구로부터 시작된 공간이다. 먼 옛날 인류의 진화는 바로 숲이라는 집에서 이루어졌다. 언덕 위 드넓은 들판을 앞에 두고 키 큰 숲이 시작되는 바로 그 경계가 수백만 년 동안 인류의 집으로 쓰인 곳이다. 숲은 온갖 위험으로부터의 피신처이자, 휴식처이며 먹을 것을 제공받는 식당이었다. 그 숲에 사는 동안 지금의 인간이 가진 온갖 본능이라는 심리적 기제들이 형성되었다. 

이 숲을 떠나 지구 전체로 흩어져 또 다른 숲을 찾아 이동에 이동을 거듭하다 불과 만 년 전에야 비로소 집을 짓고 곡식을 키워 한 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농경은 더 이상 숲 속을 뒤져 먹을 것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되게 했고, 집은 비를 피하고 위험을 피하고, 사람들과 연대할 수 있는 기회의 공간이 되었다. 서구 문명의 발생지라고 하는 유프라테스 강변의 풍경을 보면 숲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곳이다. 다만 비옥해서 농사를 짓기 좋은 강의 하구 언저리이다. 생산물이 많고 물길을 이용한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그런 곳이었다. 도시가 발전하고 부가 쌓임으로써 비로소 그리운 숲을 내 집 안에 만들 수 있는 여력과 기술력이 생겼고 그래서 정원이라는 형식의 공간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2500년경에 숲을 인공적으로 조성한 Ziggurat라는 사원이 만들어졌고, 부유한 권력자, 왕의 궁궐 같은 곳에 정원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것들로 봐서 기원전 4000년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유명한 고대의 정원은 아마도 Hanging Garden, 일명 공중 정원일 것이다. 고대 Babylon 때(지금의 이라크 언저리) Nebuchadnezzar2세(BC605~562)가 그의 왕비인 Amytis를 위해지었다고 한다. 이 공간은 그녀의 고향에서는 흔했던 숲이 우거진 동산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그리워하는 그녀를 위해 그 모습을 그대로 지어 올린 구축물이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아내라도, 그럴 수 있는 권력과 힘이 충분한 왕이라도 그 동기에 동의하고 그 필요성에 동의하지 못했다면 이런 거대한 인공 동산의 조성이 가능했을까를 생각해본다. 그처럼 숲에 대한 동경과 욕망은 컸다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정원이란 '내 집 안으로 끌고 들어온 숲'이고 할 수 있다.


정원은 숲

비로소 위험으로 가득한 숲에서 벗어나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 바로 농경의 시작과 건물의 발명이다. 건물은 그런 의미에서 사람과 자연을 절연시키는 장치물이다. 건물은 자연과 인간 사이에 벽을 쳐서 그 위험을 분리시키는 도구이다. 하지만 건물은 그 위험만 분리시킨 것이 아니라 숲 자체를 분리시켜 버렸다. 그렇게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고, 도시를 이루고 살다 보니 점 점 숲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그 숲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만 갔다. 그래서 기어이 정원으로 구현해 놓은 것이다. 정원은 건물에 의해 분리된 인간과 자연의 사이를 다시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된다. 


정원은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문화권마다 일정 정도의 형식과 사상을 달리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태도는 동일하다. 자연이라고 통칭되지만 인간이 사는 이 삭막한 사막 같은 도시에 어떻게 숲을 들여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다양한 정원으로 태어난 것이고 볼 수 있다. 인간성의 드러냄을 죄악시 한 중세시대에는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중정의 형태로,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 된 르네상스 시대에는 거대한 바닥그림 같은 정형적인 정원으로, 영국에는 영국의 풍경을 받아들인 낭만적 자연주의 정원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서구 정원의 역사이다.

Sissinghurst Castle Garden

Le Corbusier와 같은 현대건축의 대가가 일생 건축 설계 행위를 통해 구현하려고 했던 것도 건축의 근원적 한계인 '자연과의 절연'이라는 상황을 극복해내고자 하는 노력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를 비롯해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 부르는 수많은 건축가들이 이루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 포인트였다. 벽으로 가로막히고 분리된 인간과 자연을 어떻게 건축행위로 이어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열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열심히 건물을 들어 올리고, 투명하게 하고, 물 위에 얹고 하는 등의 노력 기저에 깔린 것이 바로 그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산업혁명으로 도시에 사람들이 몰려 닭장 같은 삶을 살아가다 병이 들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짓기 시작한 것이 공원, 즉 public park이다. 처음엔 영주와 왕 등이 가진 개인 소유의 숲-사냥을 하고 사병을 훈련시키는 등의 목적으로 쓰인 숲이 park이다-을 공공의 이용을 허용하도록 함으로써 비로소 public park이 출발하게 되었다. 바로 사막 같은 도시에 사람들의 삶을 건강하게 되찾기 위한 노력으로 시작된 것이 숲을 도입하는 것이었던 점은 정원이 만들어진 이유와 정확히 일치하는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낯선 이름 정원

일면 왜 우리에게는 찬란한 정원문화가 없었나 반문하게 되지만 어떤 면을 봐도 그럴만한 기술이 모자라서도, 그만한 문화적 소양이 부족해서도 아니었다. 단지 우린 그런 작위적 형식의 정원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았을 뿐이다는 얘기다. 즉, 우리는 한 번도 숲을 떠나 산적이 없기 때문에 작위적 정원을 들일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땅에 처음 발을 들여 살기 시작한 5000년 전의 선조들부터 아름다운 숲의 가장자리에 마을을 일구고 도시를 일궈 살아왔다. 그러니까 서구의 그것처럼 일부러 정원을 만들지 않아도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오랜 역사 기간 동안 수많은 정원들이 만들어져 왔다. 하지만 그들은 서구의 그것들에 비하면 매우 소극적이고 의미적인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담양 소쇄원

그나마 많은 정원 유산이 남아 있는 조선시대만 보더라도 소쇄원 같은 훌륭한 정원들이 있다. 하지만 소쇄원 조차도 물이 흘러내리던 계곡 한편에 누각을 세우고 시를 지어 벽에 붙인 울타리로 소박하게 두른 정원이다. '조작'의 힘 보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려 한 노력이 더 많이 작용한 정원이다. 이런 정원을 서양의 정원과 비교해서 덜 화려하다거나, 양식적으로 비교해 볼품이 없다거나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저 우리의 정서와 역사문화 시대정신에 따른 결과물이고 그 자체로 귀하게 보아야 하는 대상이다. 이런 아름다운 자연을 가까이 가지지 못해 작위적인 정원을 만들어야만 했던 서구 문화를 오히려 측은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분명히 서구와는 다른, 우리만의 고유한 정서와 욕망이 여기에 깔려있음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전통이 있던 나라에 건물을 올리면서 정원을 지으려고 하니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열심히 프레젠테이션 하는 내게 저 담 밖의 귀한 숲을 내버려 두고 담장 안에 돈을 써 정원을 짓는 일을 하찮게 얘기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작위적인 조작에 둔감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사랑하며 늘 그 가까운 곳에 사는 것을 기본적인 삶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여전히 '정원'은 낯설다.


정원의 시대

하지만 이제 정원은 필수적인 공간이 되어야 할 때가 됐다. 한국은 전쟁을 끝낸 지 70년이 지나면서 어마어마한 도시들을 키워왔다. 그 안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이미 숲을 떠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서울의 어느 풍경

물론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도시는 산업혁명기 영국의 산업도시 같은 그런 삭막하고 매연이 가득한 사막도시 같은 공간은 아니다.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풍부한 녹지를 지니고 있고, 꽤 넓은 면적의 공원도 곳곳에 지어져 있어 그래도 풍성한 숲을 품고 있는 도시로 성장해오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그와 같지 않다. 전쟁 이후 아파트라는 낯선 주거 형식이 이 땅에 도입되었다. 지금은 전국의 주거 형식 중 단연 압도적 비율로 독보적 우점 주거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불과 50여 년 만에 벌어진 일이다. 이 과정에서 아파트는 우리의 일상을 책임지는 '집'으로서의 성공이 아니라 '부동산 가치'의 측면에서 더 많이 '소비'되었다고 본다. 집이 집이 아니라 사고파는 물건이고, 자산을 늘리는 재산가치로 평가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모두 아파트를 소유하려고 하고, 아파트 값의 변동에 따라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하며 큰 빚을 지고 모든 삶을 거기에 매달리게 하는 기이한 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 '아파트'는 '집'이라는 본연의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흥미로운 점은 아파트라는 공간 형식이 제안된 이유가 바로 정원을 공유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이다. Le Corbusier의 이론적 도시 제안에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아파트 단지 구상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는 집이란 단지 잠을 자는 기계와 같다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수평으로 도시공간을 잡아먹을 필요 없이 수직으로 쌓아 위로 올리고 그만큼 남는 공간을 정원으로 둬 사람들이 공유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제안한 것이다. 정원을 공유하기 위한 기계로서의 건물이 곧 아파트인 것이다. 이것이 독일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지고 전후 황폐화된 도시에 순식간에 독점적 주거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철저히 수요와 공급의 논리에 의해.


그러나 '정원'에 대한 어떠한 생활 속 욕구도 가지지 않은 우리에게 오랜 시간 아파트의 녹지공간은 외면받아왔다. 대신 그 자리는 도로와 주차장이 차지하게 되었고, 그야말로 기계장치 같은 건물로 팔려 다녔다. 제대로 된 '정원'이 들어선 아파트는 90년대에 와서야 지어지게 되었고, 의외로 좋은 반응을 얻어 지금은 지상에 차가 없는 아파트 단지가 기본형식으로 자리 잡아간다. 그래서 화려한 정원을 가지지 않은 아파트 단지를 찾기가 오히려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아파트는 '소비'만 되고 있지 '집'이 되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므로 여전히 '숲'에 대한 그리움은 바깥에서 채우거나-등산과 캠핑의 열풍 같은 것을 떠올려보면 이해되지 않을까?-근사한 음식점의 장식 공간으로서의 화단 정도로 스쳐 지나가고 있다. 수없이 많은 00 정원박람회를 통해 멋지고 예술품 같은 show garden들이 선보이지만 작가의 솜씨를 뽐내는 자리일 뿐이거나, 밋밋한 공원을 화려하게 채워주는 소품처럼 작동하고 있을 뿐 여전히 사람들의 삶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모습니다.


정원이 있는 삶을 꿈꾸며

숲이 집이다. 집은 숲 같아야 한다. 집은 우리 삶의 가장 근원 공간이며 모든 삶의 시작점이다.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삶을 이어갈 에너지를 얻어야 한다. 힘든 일을 겪고 집으로 돌아가 위안을 얻고 따듯한 음식으로 힘을 얻어 다시 삶을 이어가는 그런 곳이어야 한다. 그런 치유와 에너지의 원천 공간으로서 집이 제 역할을 하려면 '정원'을 빼놓고 생각할 수없다. 정원을 뺀 '집'이란 반쪽도 되지 못하는 집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집이란 그러한 곳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야 한다. 공간적으로 아무리 근사한 정원을 가지고 있어도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이를 알아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다고 누구나 근사하고 넓은 정원을 가져야만 집에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하지만 아파트의 작은 베란다, 사무실의 좁은 테라스, 월세방의 내 책상 위에도 작은 나만의 정원을 들일 수 있다. 자꾸만 죽어나가지만 끊임없이 화분을 들고 집으로 오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이미 정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 베란다에 만든 작은 정원

형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숲을 가까이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값비싼 정원을 가지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정원을 대하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낙엽 지는 모습을 가까이하고 있는지, 식물을 가꾸고 돌보는 땀을 흘리고 있는지, 그 안에서 일상적으로 위안을 얻고 안정감을 느끼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정원은 그냥 사치품이거나, 안 해도 되는 그런 곳이 아니어야 한다. 정원은 수억을 들여 화려하게 지어야 하는 곳도 아니어야 한다. 내 집안 어느 곳에 내손으로 작은 정원을 짓고 그를 통해 우리가 자연의 산물임을, 그로 인해 살아가는 존재임을 시시때때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비싼 집에 사는 걸 자랑하는 삶이 아니라 오늘도 아름다운 꽃을 보고 출근했음을 자랑하는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돈이 얼마가 들었다고 평가되거나 일상에 괴리된 숫자로 존재하는 숲이 아니라 내 일상 속에 깊이 뿌리내린 진정한 삶의 근거지로서의 숲이 늘 함께 해야 한고 생각한다. 지구환경의 위험, 북극곰의 멸종, 빙하의 소멸을 귀하게 여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삶을 평온하게 돌아보고 내 존재의 소중함을 일깨울 수 있는 기회가 늘 가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숲에서 안온 감을 찾고, 숲을 돌봄으로써 성취감을 얻음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삶의 압력을 낮추는 것, 그런 기회를 주는 것이 곧 정원이며, 이 정원이 곧 집이어야 한다. 그런 집이 늘어갈 때 우리 삶이 더 자연스러워지고, 더 아름다워지고, 더 행복해짐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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