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알았던 그녀의 죽음이 생각난 날
띠링 하고 알람이 뜬다. 2015년 9월 19일의 추억이라고 화면에 보이는 사진 몇 장.
그날이 그녀의 결혼기념일이다.
20대 중반의 화사하고 건강한 아가씨를 결혼 상대라고 데려온 남편의 오랜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1980년 생들이니까 그때 이미 서른 다섯 먹은 아저씨 아줌마였는데 나이 차이도 제법 나는, 순진한 아가씨랑 결혼한다니! 신부가 너무 애기 같아서 그냥 잘 해줄 수 밖에 없는 상대였다고 할까.
청담동에서 웨딩촬영 할 때도 내가 우리 첫째 애기를 안고 가서 도와줬고 바로 이날 9월 19일의 홍천 예식에도 다녀왔다. 그녀와 깊은 연이 있다는 절에 가서 올리는 결혼식. 사진 속의 나와 우리 아들은 즐거운 얼굴이다.
그렇게 좋은 날 예쁜 나이에 결혼식을 올린 그녀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남편 친구 즉 그녀의 남편은 미국에서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식을 올리고 둘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해에 한국에 왔다며 만났을 때는 목동 아웃백인가 빕스에서 만났는데 미국에 있는 동안 남편이 채식만 시켰다며 서울 들어가면 스테이크 사주기로 약속을 했었단다. 그날 고기를 열심히 먹던 그녀는 며칠 후 그렇게 고기가 땡기던 그때가 임신 극초기였다고 알려왔다.
그 후 그녀의 건강에 본격적으로 생긴 문제는, 임신 중인데 혈소판감소증에 걸렸다는 것이다. 시댁이 부잣집이고 남편은 미국한의사니까 잘 치료 받겠지. 하고 생각했으나 출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아기를 남겨두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눈이 감겼을까. 그녀의 남편이 페이스북에 올렸던 마지막 인사의 장면 묘사는 평안했던 것 같다.
불교를 오래 믿어왔기에 떠남을 받아들이기 쉬웠을까.
아기가 커가며 예쁜 짓 하는 걸 많이 못 봐서 미련이 덜 남았을까.
어쨌든 그녀의 죽음 이후로 남편의 친구는 더이상 친구가 아니다.
남편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그가 그녀의 죽음 이후에 남편을 비난했다. 비난의 내용은 조언을 했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내가 받아들이게 했어야지 였다. 자신의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앞에 이성이 날라가버려서 그랬다고 하기엔 너무 심한 정도였었기에 그녀의 죽음과 함께 우리 모두의 인연도 정리 되었다.
가을은 숙살지기라고 사물을 죽이는 쌀쌀한 기운이 있다고 한다. 정리되는 것이 많은 시기구나.
태어났으면 죽는 것이지만 이왕이면 아름답게 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가을빛을 받으며 빛나던 순백의 신부는 지금 어디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지내고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