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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서 C Dec 21. 2020

튤립을 키운다는 것

삶에 정성을 더하는 방법



마스크를 쓰고 집과 회사만 오가던 권태로운 일상에서 어쩐지 인간성마저 해체되는 느낌이 들어 집안에 식물을 들이기 시작했다.


유주나무를 시작으로 오렌지자스민, 애플민트, 수국을 차례로 들였는데 살아남은 것은 유주나무와 오렌지자스민 뿐이다. 살아남은 녀석들도 아무리 비료를 주고 미네랄을 줘도 그저 목숨만 유지(?)하고 있다.


과실수인 유주나무는 이제껏 한 번도 노란 열매를 맺지 않았다. 하긴 열매가 생기기 전 보여야 할 꽃도 보이지 않았으니 바라는 게 무리지만 말이다. 오렌지자스민도 처음 마트에서 사서 온 한주만 꽃이  풍성하게 피어있었을 뿐 몇 달째 꽃이 피지 않는다. 튀겨지다 만 팝콘 같은 꽃망울 하나를 봤던 것이 전부였다. 참고로 자스민은 적당한 온도와 빛만 있으면 연중 꽃을 보여주는 식물이다.


그 더딘 성장에 지루함을 느낄 때쯤 코스트코에 갔다가 튤립 구근을 주워왔다. 곰팡이 탓에 키우기 어렵다는 튤립 구근을 양파 까듯 다듬다 보니 처치 곤란한 상황이 되었고 결국 화분 세 개가 나왔는데, 그중 하나는 수경재배 중이다.




긴가민가 하며, 그동안 죽였던 식물들의 빈 화분을 새척하고 새 흙을 깔아주고 튤립을 심었었다. 수경재배는 화분보다는 싹이 더 빠르게 잘 나왔는데, 혹시 이전에 식물이 죽었던 화분이라 어떤 안 좋은 균이 남아 성장이 더딘 것인지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재택 중 한동안 낮에 한껏 해를 쏘여 주기도 했다. 난 내 밥도 제때 챙겨 먹기 귀찮아하는 사람인데 내가 생각해도 해가 바뀔 때마다 화분을 이쪽저쪽으로 옮겨두는 내가 웃겼다.



식물은 신기하다. 해를 듬뿍 맞은 날은 어쩐지 그 키가 훌쩍 더 자라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날 해를 쪼여주어서가 아니라, 생물 성장 주기 상 키가 크는 날이었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 우아한 초록을 보고 있자면 왜 그 옛날 유럽 귀족들이 이 꽃을 그렇게 비싸게  취급했었는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한번 더 싹이 훌쩍 더 자란, 지난 토요일의 튤립.


수경재배 한 녀석에는 곰팡이가 자라고 있어서 아마 곧 다 죽을 것 같아 속상하다. 몇 번이나 물을 갈아내도 구근 주위로 피어난 곰팡이는 다시 또 생긴다. 물이 닿는 부분도 아닌데 곰팡이가 나서 억울하기도 하고 콥콥한 냄새를 맡으면 더 희망을 가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곰팡이가 핀 녀석은 혼자만 성장이 멈추어 있다. 아무리 해를 더 쏘여줘도 말이다. 곧 잎이 말라죽겠지 싶은 녀석을 보며 간만에 유주나무 잎사귀를 마른 천으로 닦아주었다. 언제고 닦아 줄 테니 너까지 가지 말아라, 계속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 중얼거리며 말이다.


식물이 늘면서 혼잣말도 늘었다.  주말 아침 일찍 일어나면 커피를 내려놓고 유주 나무와 자스민 잎을 하염없이 닦아내며 정말 친구라도 된 듯 잘도 조잘거린다. 누가 보면 섬뜩하겠지만 이 식물도 없었다면 얼마나 삭막한 한 해였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또 이렇듯 섬세하게 관리해야 할 대상이 생기고 보니 꽃 하나 싹 틔우기도 이렇게 힘든데 하물며 사람인 나는 얼마나 나에게 정성을 들였는가에 대해 또 반성도 한다.


자책으로 귀결되는 질문이긴 하지만 봄이 올 때쯤 튤립이 싹을 틔울 때면 내 삶에 대한 태도도 또 어느 정도 더 변화해 있겠지라고 생각해본다. 그리고 아주 막연한 미래에 아이를 낳는다면 아이에게 식물 키우는 법을 알려줘야겠다는 결심도 해봤다.



막연한 미래도 미래지만 그보다는

당장 꽃이 피는 내년 어느 날에는 지긋지긋한 시나리오 공모전도 끝나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화사해진 풍경을 만끽할 수 있길 바라본다. 사실 주말 내내 보고 있던 노트북을 그만 보고 싶어 간만에 주절거리 듯 글을 올리고 있다. 나는 아직 멀었다. 그래도 또다시 노트북 앞에 엉덩이를 붙여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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