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양육자의 하루
오늘도 엄청나게 정신이 없었다.
나는 ADHD 약 중에 콘서타라는 약을 복용하고 있는데, 12시간 효과가 지속되는 종류로 먹고 있어서 너무 늦게 먹으면 수면에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콘서타를 먹었다. 빈속에 먹기보다 식후에 먹는 것을 권장한다지만, 그럴 정신이 어디 있담.
아침에 일어났더니 남편과 아기는 일어나지 않았길래, 혼자서 소파와 TV를 독차지하고 채널을 돌렸다. 주말 아침 홈쇼핑은 왜 이렇게 재미가 없는지. 유튜브를 틀었다. 하필이면 또 남편이 애청하는 금쪽이 영상이 떠서 또 '하이고 저 아기는 왜 저럴까, 저 엄마는 왜 저럴까, 아이고 모두가 우네, 아이고..' 하면서 심란한 아침을 보냈다. 한참 보고 있는데, 아기가 방문을 열고 애착 인형인 야옹이 인형을 한 손에 들고 거실로 나왔다. "잘 잤어? 아침은 뭐 먹고 싶어?" 물으니 "초코 시리얼 주세요."라고 한다.
초코 시리얼을 그릇에 담아서 우유를 부어줬다. 유기농이라고 해서 샀는데, 아기에게 먹이기에는 좀 단 것 같다. 당연하지, 유기농은 건강하다는 뜻이 아닌걸. 성분표를 보니 역시 설탕이 평소에 먹이던 것보다 많이 들어갔다. 대신 유기농 설탕을 썼다. 참나, 이런 바보 같은 선택을 하다니.. 하면서 일단 먹인다.
아이가 시리얼을 먹는 동안 남편을 깨웠다. 남편은 평일 아침에 아이와 함께 직장 어린이집에 등원을 하고, 저녁밥까지 회사 식당에서 먹이고 집에 온다. 평일 보육은 거의 남편이 대부분 하기 때문에, 주말에는 내가 조금 더 하고 있다. 남편이 어제 너무 늦게 잤고, 평일에 아기가 기운이 넘쳐서 꽃놀이하는 것을 뛰어다니며 잡았더니 너무 피곤하단다. "그래, 좀 더 자, 근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차로 같이 병원 가야 해."하고 말했다.
나도 아기랑 같이 아침을 먹었다. 소시지랑 계란 프라이를 후딱 구워서. 코팅 팬을 이사 오면서 새로 샀는데, 반년도 안되어서 계란 프라이가 들러붙는다. 영 못 쓰겠네, 하고 SNS에 글을 올렸다. 한참 먹고 있는데, 정수기 점검 기사가 방문을 했다. 문 열어드리고 마저 먹고 있는데 남편이 일어났다. "어, 일어났어?" 하는데 아이가 "옷에 흘렸어요."라고 해서 슥슥 닦아주고, 다시 내 식사를 시작했다. 빵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원. 빵을 먹다 보니 목이 막혀서 우유와 크림치즈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빵에 크림치즈를 발라 먹는 것을 보더니 아이도 한입 달라고 해서 나눠 먹었다.
다 먹고 나서는 외출을 위해 샤워를 시작했다. 업무 메일이 와서 읽다가 또 정신이 팔렸다. '차라리 이렇게 핸드폰 쥐고 있을 바에는 얼른 씻고 나가서 머리 말리면서 읽자', 하고 후다닥 씻었다. 씻고 나와서 머리를 말리면서 핸드폰을 보다가, 옷을 입으려는데 SNS에 코멘트를 달고 싶은 내용이 있어서 쓴다. 남편이 "뭐해, 안 나오고~"하고 불러서 마저 옷 입고 나왔다.
남편이 옷 입는 동안 아이 옷을 입히고 병원으로 출발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깜짝 놀랐다. "아니 무슨 비가 이렇게 와? 우산 안 갖고 왔는데." 하니, 남편이 "트렁크에 우산이 있긴 해. 일단 문 근처에 내려주고, 이따가 진료 끝나고 나올 때 내가 우산 꺼내서 갈게."라고 했다. 병원 입구에 도착해서 아이를 카시트에서 내리려고 뒷자리로 옮겨가려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문 열고 닫는 그 짧은 사이에도 머리가 축축하게 젖었다. 심지어 뒷좌석에 탈 때 또 차에 머리를 박았다. "아~ 아파!!" 하면서 아이를 카시트에서 내리고, 마스크를 씌웠다. 허둥지둥 내려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보니, 아차. 내 마스크를 두고 왔다.
정신없는 머리지만 빠르게 머리를 굴려봤다. 약국이 어딨더라, 아 건물 밖에 있지, 어차피 이 빗속을 뚫고 나간다고 해도, 마스크 없이 약국에 들어갈 수 없지. 그럼 방법이 없네. 병원에도 못 들어갈 텐데. 가방에 어른용 마스크가 남아있던가? 하.. 없네. 아기용 마스크를 쓸 수 있나? 택도 없네. 긴 침묵의 시간을 보내고, 아이를 쳐다보니 멋있는 바퀴가 그려져 있다며 (사실 바퀴는 아니고 배의 키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 한창 빠방기를 겪고 있기 때문에 뭐든지 바퀴로 보이시는 분이라.) 꾀어내기 위해 씌운 조금 큰 아기용 천 마스크가 보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 없어! 아이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차차야, 엄마가 차에 마스크를 두고 왔어. 차차는 이 일회용 마스크 쓰고, 엄마가 그거 써도 될까?" 하니까, 아이가 히잉 거리며 "아가 거예요! 아가 거예요!"라고 울먹였다. "엄마가 정말 미안해, 마스크를 꼭 써야 병원에 들어갈 수 있어. 잠깐만 엄마 빌려주세요. 응? 한 번만 빌려주세요." 했더니, 불쌍해 보였는지 "네..." 하며 건네줬다. 그렇게 마스크를 바꿔 끼고 엘리베이터를 탄 다음 병원이 있는 층에서 내렸다.
하. 내리자마자 벽에 붙어있는 종이.
<4/3 (토) 강의 일정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휴진합니다.>
아니, 선생님, 하필이면 오늘 휴진이라니요. 이 빗속을 뚫고 왔는데... 애 마스크까지 뺏어서 하고 왔는데...
하지만 전화해보지 않은 내 탓이다. 설마 휴진하실 줄 몰랐지! 남편에게 전화해서 오늘 휴진이라니까 다시 와줘, 하고 다시 입구로 돌아갔다. 어리둥절하는 아이에게는 "오늘 선생님이 쉬시는 날 이래. 다른 병원에 가보자."하고 말했다. 차에 다시 또 비를 맞으며 탔는데, 아이가 카시트에 타기 싫다고 운다. 겨우 앉혔는데 "딸기 사탕 줘요!(딸기 사탕 아니고 비타민 캔디인데, 사탕이라고 우기고 있다.)"하면서 더 크게 운다. 급하다고 그냥 줘버리면 안 되니까, "마스크 빌려줘서 너무 고마웠어. 이거 먹고 이따가도 마스크 잘 써야 해?" 하면서 하나를 꺼내 줬다.
다시 우당탕 조수석으로 옮겨 타서 "그럼 우리 다른 병원에 가보자." 했더니 남편이 "이렇게 비가 오는데 꼭 오늘 예방접종을 맞아야 할까? 우리 다른 날 가자."라고 했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하, 무엇을 위해 이 고생을 했는가. 그냥 비 안 올 때 맞아도 되는 접종인데. 나도 목이 간질간질해서 겸사겸사 진료 보려던 것이었는데, 그냥 약국 약을 먹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단지 내에 있는 마트에 들러서 먹을 것을 샀다. 아이 간식으로 딸기와 토마토. 남편이 하원 후 저녁에 먹일 칼슘 치즈가 다 떨어졌다고 했다. 요즘 아이에게 젓가락을 쓰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데, 팝콘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먹게 하면 재미있고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팝콘도 집었다. 남편이 아직 아침을 못 먹었다고, 본인 먹을 냉면을 골라서 카트에 넣는다. 결제를 다 하고 집에 왔다.
아이가 입이 심심할 것 같아서 딸기와 방울토마토를 꺼내 주고, 장바구니에 있는 것들을 냉장고에 넣었다. 남편이 옷을 갈아입고 아기에게 딸기를 먹이는 동안, 나는 흰색 빨래들을 골라내서 세탁기를 돌렸다. 남편이 냉면을 끓이는 것을 보고 있는 동안, 기침약을 먹었다. '아, 딸기랑 토마토 씻어서 정리해서 넣고 싶은데.' 생각하는 순간, 아이가 "방울토마토 터졌어요."라고 했다. 어떻게 터졌길래? 하고 보니 '아니, 어떻게 이렇게까지 팍 터졌담?' 싶을 정도로 다 튀어있다. 물티슈로 닦아주고 식탁 의자에 겨우 앉아서 물 한잔 했다. "면을 30초만 데치라네? 신기하다." 하는 남편의 말을 듣고, "어차피 나 딸기 씻으려는데 그냥 내가 해줄게"하고 일어섰다. 딸기 꼭지를 떼서 물에 담그고, 냉면 데치고 짜고 그릇에 담아서 주고, 나도 식탁에 앉아서 딸기를 먹으면서 말했다.
"하, 정신없어. 오늘 정신이 정말 하나도 없어."
아니, 여기까지 썼는데도 겨우 정오까지의 일밖에 못 썼다니! 정말 기가 막힌 노릇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 앞에 앉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나. 오후는 더 정신없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