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
2. 부모 없는 어린아이와 자식 없는 늙은이.
자식 없는 늙은이라... 미래의 나는 세상이 이렇게 정의하겠구나... 싶은 생각에 잠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사회 곳곳에서 '고독'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뉘앙스 역시 부정적인 경우가 많아 마치 이 사회에서 고독하다는 건 나는 원하지 않는 나에 대한 측은함을 불러일으키게도 한다. 굳이 사전적 뜻까지 찾아본 이유는 읽고 있던 책의 한 구절 때문이었다.
'외로움은 감정이지만 고독은 존재의 본질적인 조건이다.’
인간은 원래 고독한 존재이고 고독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제대로 마주하며 이를 통해 성장하고 나아간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시대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공감하는 주제이다. 하지만 그 고독의 주인공이 내가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회생활에서는 '고독해 보이지 않으려' 필요 이상으로 남에게 보여지는 나를 꾸미고 인간관계 속에서는 '고독하지 않으려' 내가 가진 것 이상의 에너지를 쓰며 어떻게든 고독과 거리를 두려 애를 쓰는 꼴이다. 그러는 중에도 정작, 가장 중요한 나 자신은 어딘가 방치되어 고독 속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때마다 고맙게 나의 안부를 물어주는 친구들이 있어도 가끔은 외롭고 쓸쓸하다고 느낀다. 그동안 내가 쌓은 노력과 시간들이 딱히 부정당한 것도 아닌데 일순간 모든 것이 의미 없고 헛된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가장 많이 돌아오는 대답이 있다.
"나이 들어서 그래."
나는 "그런가 봐." 헛웃음을 지으며 답하지만 나이 따위는 상관도 없다는 듯 와락 나를 안아버리고 마는 고독은 태어남과 죽음이 필연적 관계이듯 그렇게 누구의 삶과도 맞닿아 있다.
더 열심히, 더 치열하게, 더 많은 것을 갖고, 더 높이 올라가라고 부추기는 미디어와 그걸 방관하는 시대. 더 많은 좋아요와 클릭수에 대한 과도한 열망과 경쟁은 오히려 인간은 고독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하루가 끝나도 쉬이 불이 꺼지지 않는 누군가의 방 창문을 보면 마음속으로 조용히 안녕을 묻게 되곤 한다. 때로는 그것이 자조 섞인 한탄이 될지라도 타인들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나에게 미안하지는 않은지 스스로 질문하고 답해야 한다. 그렇게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볼 '건강한 고독'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시대는 어찌하여 내 몫의 고독마저 포기하게 만드는 걸까.
그러다 고독이라는 단어가 이름처럼 붙을 때가 있다. 어떤 모르는 이의 발견되어진 죽음 앞. 애석하게도 이 한 단어로 인해 그의 삶 전체는 마치 실패한 인생처럼 비추어진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기사 제목 속 한 단어로 누군가의 삶을 처량하다 단정 지어 생각했던 건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언젠가 한 고독사 기사에 딸린 댓글 하나를 인상 깊게 보았다. 세상은 그를 고독하게 죽었다고 말하지만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을 거 같다는 내용이었다. 고인의 방을 찍은 사진 한 장은 얼핏 보면 어수선하고 외로움의 흔적들이 방 이곳저곳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거 같아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자신이 좋아했던 영화의 dvd나 배우의 사진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사람일은 장담할 수 없다지만 이대로라면 아마도 사회가 정의하는 외롭고 쓸쓸한 거기에 자식까지 없는 늙은이가 될 나는 유언장에 꼭 이렇게 쓰리라 마음먹었다.
"나의 죽음을 고독사라 부르지 말아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나는 나의 삶을 스스로 선택해 행복하게 살다 자연스러운 때가 되어 죽음과 마주하는 것뿐입니다. 고독은 나에게 누구보다 진실한 벗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 환경운동가였던 '훈데르트 바서'는 말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기만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누구나 마음 깊은 한편에 고독이 자리하고 있다. 자신의 고독과 평화롭게 마주할 수 있을 때 지독한 현실 속에서도 나의 세계는 무한히 확장되고 그 세계의 진정한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대, 고독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