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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oresta Oct 24. 2021

8. 단순함, 감사, 우정




루이지를 만나고 나의 순례길은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이젠 발에 잡힌 물집마저도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조금 불편하긴 해도 익숙해지니 참고 걸을만했다. 더 이상은 길 위에서 그리 불안하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새벽에 출발해 길 위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길을 걸으며 만나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눴다. 매일 특별한 친구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건조한 평야가 계속돼 사람들이 기피하는 구간에서도 길 위의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냈다. 6~7시간을 걷고 지쳐서 숙소에 돌아와서도,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리면 얼른 신발을 신고 숙소에서 뛰어나갔다. 오전에는 길을 걷고 오후에는 다른 순례자들과 둘러앉아 노래를 부르고, 마을 축제에 가서 사람들을 구경하고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루이지에게 배운 마음 덕분에, 좋은 경험을 하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하루는 일정을 일찍 마치고 알베르게가 문을 열길 기다리며 그 앞 길가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다. 슈퍼에서 바게트와 정어리(Sardinas) 캔을 사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면 좋은 점심 겸 맥주 안주가 되곤 했다. 그날도 길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고 있는데, 같이 숙소 오픈을 기다리던 꼬마가 궁금한지 나를 보더니 자기도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빵 사이에 정어리를 넣어서 꼬마에게 건넸다. 맛있게 먹는 아이를 보며 아이의 아버지는 내게 고맙다고 하셨다. 그날 저녁 아이의 부모님이 함께 식사를 하자며 초대하셨고, 그렇게 정어리 한 조각이 저녁 만찬이 되어 내게 돌아왔다. 길 위에선 자주 그렇게 마음을 주면, 더 커져 돌아온 마음을 받곤 했다.


루이지가 떠나고 며칠 지나고 나서는 곧 한 자매를 만나 함께 길을 걸었다. 비슷한 나이대의 그들 덕분에 지루하던 평야와 언덕을, 비바람이 치던 새벽길을 웃으면서 걸을 수 있었다. 함께 농담을 나누며 길을 걷고, 음식을 함께 먹고, 길 위에서 맞은 생일을 축하했다. 어두운 새벽길에 앞뒤에서 서로를 지켜주고, 경사진 오르막과 빗 속에서 서로를 응원하고, 물집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함께 고민했다. 길 위에서 사진을 찍어주고, 부르고스 성당을 구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함께 노래하고 친구를 사귀었다. 그렇게 셋이 일주일 동안 순례길 위에서의 기쁨과 어려움, 추억을 함께 나눴다.


부르고스를 지나 외진 길가에 있던 아주 작은 알베르게에 묵게 된 날이었다. 우연인지 그곳에선 길에서 자주 마주치던 순례자들이 모여있었다. 함께 둘러앉은 저녁시간, 서로 돌아가며 소개를 하고 큰 냄비에 든 빠에야를 나눠먹었다. 저녁을 먹고 디저트를 기다리는데, 숙소 주인분이 "모두가 자기 나라 노래를 하나씩 해야 디저트를 먹을 수 있다"라고 재밌는 제안을 했다. 다들 잠시 머뭇대다가 영국인 노부부가 먼저 노래를 시작했고, 나는 한국 대표로 초딩때 특기적성 시간에 배운 판소리를 불렀다. 그렇게 함께 박수치고 환호하며 러시아, 스페인, 독일 노래까지 각국의 노래를 듣고는 다 함께 디저트를 먹었다. 그날 밤 숙소의 모든 사람들과 연결된 기분이 들었다.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한 기운이 숙소를 둘러싼 느낌이었다.


저녁식사 후 잠들기 전 영국인 할머니가 카드점(?)을 봐주신다기에 다 같이 할머니 곁에 둘러앉았다. 각자 세 개의 카드를 뽑았다. 내가 뽑은 카드는 <단순함, 감사, 형제애 (Simplicity, Gratitude, Brotherhood)> 였다. 그 세 가지가 내가 순례길을 걸으며 배운 모든 것이었다. 단순한 일상을 통해 지금 여기에 있는 내게 집중하고, 그를 통해 느끼는 작은 것들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이 모든 여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길 위에서 함께 걷는 이들과의 우정. 준비 없이 가서 더 많이 고생해야 했지만, 빈 틈이 많은 덕분에 길 위에서 배운 것들과 사람들, 마음 속 따뜻한 기억들을 가득 채워 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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