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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oresta Oct 24. 2021

7.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촛불을 켜 주겠니




종일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걸으니 혼자서 걸을 때보다 시간이 빨리 흘렀다. 새벽 6시부터 걷기 시작해 11시쯤이 되자 점차 햇볕이 뜨거워졌다. 이런 날씨에 수박 한쪽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수박 한쪽은 팔지 않았고, 그날 다 먹지 못하면 다음날 가장 무거운 짐이 되었기 때문에 맘 편히 사 먹기도 어려웠다. 그런 생각을 하다 루이지한테 "한국에는 수박 노래도 있어" 하면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수박~ 수박이 나왔어요~ 맛 좋은 수박이 꿀맛이에요. 내일은 못 사요, 빨리빨리 사가세요~ 내일은 못 사요, 다 떨어집니다!" 별생각 없이 노래를 부르고 가사 뜻도 설명하며 걷고 있는데 루이지가 길가에 잠시 멈추자고 했다. 멈춘 곳은 과일가게 앞. 그는 가게에 들어가서 잘 익은 수박 한 덩이를 사 왔다.


별생각 없이 꺼낸 얘기를 흘려보내지 않은 그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먹고 싶었던 수박을 먹게 된 게 신나서, 얼른 그에게 수박은 내가 들겠다고 했다. 시원한 수박이 뜨거워지지 않도록 배낭 안쪽에 소중히 넣었다. 수박 무게가 최소 2kg 은 되었을 텐데도 발걸음이 가벼웠다. 마지막 마을 입구의 오르막을 오를 때에도 그의 따뜻한 마음과, 가방에 있는 수박 덕에 힘든 줄도 모르고 남은 길을 걸었다. 오르막을 오른 후 벤치에 나란히 앉아 수박을 나눠먹었다. 다 걷고 나서 먹는 수박은 말 그대로 '꿀맛'이었다. 이제 막 수박을 먹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그가 일어서더니 힘들게 올라온 오르막길을 다시 뛰어 내려갔다. 무슨 일인가 봤더니 다리를 다친 한 순례자가 언덕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는 다리가 불편한 순례자의 배낭을 들고 언덕을 올라온 다음, 다시 수박을 먹기 시작했다. 루이지는 그런 사람, 그런 어른이었다. 나는 내가 그의 동행이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그와 함께 걸으며 많은 것을 배웠다.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기쁨을 배웠고, 여름 순례길은 아침 6시쯤 시작해 12시쯤 도착해야 해가 가장 뜨거운 시간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브리오쉬와 카푸치노'로 아침을 시작하는 즐거움과, 슈퍼에서 빵, 치즈, 과일, 살라미를 사서 길 위에서 먹는 점심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배웠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마음 놓고 길을 즐기는 법을 배웠다. 그와 만나기 전까지 나는 혼자 많이 긴장하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준비 없이 왔기에 매일 아침이 막막했고, 어두운 이른 아침에 혼자 걷는 것이 무서웠다. 표지를 찾지 못해 길을 잃는 것도 힘겨웠다. 산티아고 순례길과 그 이후의 여행까지 생각하면 경비가 빠듯해서 아침은 먹지 않고 하루를 시작했고, 점심도 대충 때우기 일쑤였다. 생각해보면 초반에 몸도 맘도 지친 건 당연한 결과였다.




<2015. 7. 21 @페이스북>


지도를 가져오지 않았다. 안내서도 없이 무작정 시작한 길이지만 매일 길 위에서 지도를 만난다. "신이 널 위해 모든 걸 준비해 놨으니 걱정 말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길 위에서 깨닫는다. 혼자 걷는 길은 목적이었지만 함께 걷는 길은 여행이 됐다.  "I didn't bring a map, but God sent me a map just like you, Luigi"




정말 그랬다. 처음 혼자 걷던 길은 목적이었지만, 함께 걷는 길은 여행이었다. 무작정 길을 걷기 시작한 나는, 그를 만나 순례길을 걷는데 필요한 지식과, 태도와, 마음가짐을 배우며 비소로 순례자가 되었다. 우리는 5일을 함께 걸었다. 이후엔 내 발에 물집이 잡혀 함께 걷는 속도를 맞출 수 없었기에 각자 걸은 후 숙소에서 만나곤 했다. 며칠 후 결국 컨디션이 좋지 않던 나는 쉬어가기로 결정하고,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루이지는 먼저 숙소를 떠나야 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침대 맡에 그가 두고 간 과일과 치즈가 담긴 봉투가 놓여있었다. 더 이상 마주치지 못하게 된 이후에도 그는 메일로 내 안부를 묻고, 자신이 묵었던 숙소가 괜찮다며 정보를 알려주고, 어떤 구간에서는 물을 특히 자주 마시라며 충고를 해주었다. 그리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던 날, 마지막으로 묵은 숙소에 선물을 맡겨놨다며 그곳에 도착하면 꼭 찾아가라며 당부했다.


함께 길을 걷는 동안, 일정상 산티아고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돌아가야 했던 그는 내게 한 가지 부탁을 남겼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내 아내를 위해 성당에 촛불을 하나 켜주겠니?


나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가 떠나고 나서, 나는 다시 혼자 길을 걸었고 길 위에는 예상치 못한 수많은 고생과 불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의 중간 지점을 지났을 땐 모든 걸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그럼에도 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산티아고에 가야만 했던 건 그와 한 약속 때문이었다. 그 약속이 내가 끝까지 순례길을 걷도록 지탱해줬고, 결국은 불운 뒤에 기다리던 행운을 만날 수 있도록 날 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나를 위해 신이 보내준 지도가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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