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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oresta Oct 22. 2021

6. 신이 보내준 지도




마리아를 따라 도착한 곳은 Cirauqui 라는 작은 마을. 도착해보니 원래 가려고 했던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알베르게는 문을 닫았는지 찾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마리아는 다음 목적지로 걸어가기로 하고, 나는 마을에 하나 있는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다. 일찍 도착해 숙소에 사람도 많지 않고, 몸도 맘도 지친 터라 못하는 영어로 애써가면 새로운 사람을 사귈 기운도 나지 않아서 그냥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저녁 시간이 되었는지 주인아주머니가 밥을 먹으라며 불렀는데, 내 이름 대신 Coreana! (한국여자!) 라고 부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괜스레 꽁한 마음으로 식사를 시작했는데 먹다 보니 샐러드, 퍼스트, 세컨드, 디저트까지 지금까지 먹은 저녁 중 제일 맛있었다. (보통 공식 알베르게는 하루 숙박에 5~10유로, 저녁 식사 또한 5~10유로 매우 저렴하기 때문에 아주 맛있는 음식을 기대하긴 어렵다)


역시 사람은 단순해서 맛있는 걸 먹으니 금세 행복해지고, 꽁한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이 알베르게에 오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함께 식사를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일행인지라 대화에 끼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도 옆에 친절한 영국 아저씨가 앉아 내가 부족한 영어로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며 얘기를 경청해 주셨다. 아무리 길 위에서 열린 마음으로 소통한다고 해도, 언어가 부족하니 사람들과 대화하고 친해지는 데 한계를 느꼈고 시간이 지날수록 답답함과 외로움이 몰려왔다. 아저씨가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자 나도 모르게 "몸도 너무 힘들고 말이 안 통해 롭다"며 한참을 내 신세한탄을 하고 말았다. 루이지(Luigi)는 영어에 익숙지 않아 위축됐던 내가 처음으로 마음 놓고 '외롭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정성이 담긴 음식과 따뜻한 대화 덕분에 지쳐있던 몸과 마음이 많이 회복됐다. 그렇게 저녁 시간이 끝나고 자려고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미토리 방안에 코 고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러 사람과 함께 묵는 알베르게에서 고단한 하루를 마친 후에 누군가 코 고는 소리를 듣는 일은 다반사지만, 코 고는 소리가 계속되자 몇 사람이 뒤척이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한숨을 쉬었다. 어디에서 나는 소린가 들어보니 루이지의 자리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저녁 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진 터라, 시간이 지날수록 괜스레 동행이 눈치를 받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가서 깨워줄까? 오지랖일까? 한참을 고민하다 침대에서 살금살금 내려가 자고 있던 루이지의 고개를 돌려주었다. 순간 잠에서 깬 그에게 "It's okay, just sleep"이라고 말하고는 조용히 내 침대로 돌아왔다. 다행히 코 고는 소리는 멈췄고,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 전날 많이 걷지 못한 터라 일찍 길을 나섰다. 다른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짐을 챙겨 나와 신발끈을 묶고 있는데, 나보다 일찍 나와있던 루이지와 마주쳤다. 인사를 나누고 내가 신발끈을 묶는 동안 기다려준 그와 자연스럽게 함께 캄캄한 새벽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보다 40년은 더 살았을 것 같았지만 그는 나를 친구로 대했고, 목표치를 정해놓고 걷기보단 천천히 이야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는 금세 좋은 동행이 되었다. 어제는 내 얘기를 하느라 바빴기에, 그의 얘기는 많이 듣지 못했다. "넌 왜 이 길에 왔어?" 누구에게나 해오던 질문을 습관처럼 그에게 던졌다. 루이지는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내와 이 길을 함께 걷기로 약속을 했거든. 아내는 먼저 하늘로 떠났지만, 난 아내랑 같이 계획했던 대로 여행을 하고 있어. 사실 나도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무뎌지지 않을 아픔을 담담히 털어놓는 모습에 온몸에 찌르르- 전율이 일었다. 이어 그는 부인의 장례식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장례식장 앞에 도착했는데 사람들이 밖에 나와있는 거야. 아들이랑 나는 사람들이 우리를 맞이하러 나와 있는 건 줄 알았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서 교회 안이 가득 차 밖에까지 서있던 거였어. 내 아내를 위해서. 그걸 알고서 눈물이 나왔어. 정말, 정말 아름다웠어 그 장면은."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던 아내, 누구보다 따뜻하고 사랑으로 가득했던 사람. 그의 아내는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 살아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는 대답했다. "난 네가 맞다고 생각해. 사랑하는 사람과의 약속을 지킨다는 건 정말 중요한 거잖아." 그저 떠오르는 진심을 말했을 뿐인데,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돌아보면 아마도 그때 그에겐 그 말이 너무나 필요했던 것 같다.


우리는 그날 함께 걷기 시작해 일주일 여를 함께 걸었다. 그와 함께 걸으며 나는 '지도도 없이 엉망진창으로 다니는 나를 보다 못해 신이 그를 내게 보내주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내게 '아내가 자신에게 보낸 천사'인 것 같다고 했다. 아마 둘 다 맞았던 것 같다. 그는 내게 지도가 되어주기 위해서, 나는 그에게 '당신이 옳다'는 그 한 마디를 전하기 위해서. 신이든, 그의 아내든, 우주든, 그 무언가가 길 위에서 우리를 만나게 안내했고, 함께 걷는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그는 먼저 길을 떠나며 내가 이 길을 끝까지 걸을 수밖에 없는 한 가지 부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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