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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oresta Oct 09. 2021

0. 얼렁뚱땅 산티아고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2012년 우연히 웹툰 <비바 산티아고> 를 보게 됐다. 작가님이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서로 다른 곳에서 사연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과정이 인상 깊었다. 이십 대 초의 나는 버스에서 처음 본 사람한테도 말을 걸고 싶은 아이였고 (블로그에 써놨던 글을 최근에 발견하며 알게 됨) 아마도 거기에 가서 나도 다양한 사람을 만나기를, 특별한 경험을 하고 추억을 만들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그 후로는 누군가 ‘꿈이 뭐냐’고 물으면 ‘산티아고 길을 걷는 거’라고 얘기하곤 했다. 맘만 먹으면 금방 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경험하고픈 것도 많고 알바도 계속해야 하던 상황에서 한 달의 시간을 내는 것도, 몇백만 원의 경비를 마련하는 것도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부분 꿈이 그렇듯, 꿈은 바쁘게 굴러가는 일상 속에서 잊혀졌고, 2015년 스물다섯이 되었을 때엔 꿈을 물어보는 질문에 다른 대답을 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대학교 졸업반이 되어 인턴십을 시작할 무렵, 아는 동생의 SNS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진이 올라왔다. 그때, 내가 그것을 '꿈'이라고 말하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나는 지난 3년간 꿈이라고 말하고 아무것도 시도해보지 않는 사이에, 그렇게 그 꿈을 잊어버린 사이에, 내 친구는 지금 그곳에서 그 길을 걷고 있었다. 아마 그때 그 친구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 나는 인턴십을 마치고, 취업을 하고, 산티아고 길을 걷는 꿈같은 것은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미 떠나기 어려운 이유가 백 가지쯤 되는 현실에 묶여 아직도 '나중에, 언젠가'를 외치고 있지 않았을까.


잠깐 꿈을 잊기도 했지만, 다행히 아직 여행 한두 달 다녀온다고 크게 잃을 것 없는 나이였다. 마침 인턴십을 시작해 빠듯하지만, 돈도 모을 수 있는 상황이었고. 남은 5개월 여의 인턴 기간 동안, 약 120만 원의 월급 중 절반 이상을 저축했다. 그렇게 해도 모을 수 있는 돈은 왕복 비행기표 사고 나면 숙식도 간당간당할 300만 원 남짓이었지만, 이십 대 때는 여행 갈 돈만 모이면 통장 잔고를 0원으로 만들고도 떠나는 성격이었기에 (미래의 고생은 미래의 나에게...!) 돈이 100만 원쯤 모이자마자 일단 파리 인아웃 왕복 비행기 티켓을 샀다. 파리에서 바욘으로 가는 기차표를 사고, 바욘에서 생장으로 가는 버스표를 샀는지...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어쨌든 여행은 비행기표만 사면 일단 어떻게든 시작하게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5개월 동안 교통비와 식비를 빼고는 거의 지출을 하지 않았고, 교통편을 결제하고 출발할 때쯤 모인 여행경비는 200만 원이 약간 넘었던 것 같다. 원래 계획하는 걸 무지하게 싫어하는 성격이라 생애 첫 배낭여행 준비도 <왕복 비행기표+3일간의 한국 민박 예약 (18일 일정이었다)> 이 전부인 나였지만, 그래도 산티아고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문제는 알고는 있었는데 현실은 결국 늘 하던 대로 흘러갔다는 것. 출국 한 주 전까지 여행경비를 모으려 알바를 했고, 그 핑계로 별로 준비해둔 짐은 없었다. 그렇게 미래의 나를 믿는 동안 시간은 쉼 없이 흘러갔고, 그 흔한 산티아고 안내 책자 하나도 없는 상태로 출발 날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남은 일주일 동안 준비물을 챙기려고 했는데, 등산용품이 생각보다 너무 비쌌다. 시간이 없으면 돈이라도 있어야 문제가 해결될 텐데, 나는 여행 가서 쓸 경비 말고 등산용품 살 돈 같은 건 또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도 한숨이 나오는 나 자신...)


시간은 없는데 어디서 돈이 나올 데도 없었다. 출국은 정말 코앞으로 다가오고, 닥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넋 놓고 되는대로 있다가는 정말 ㅈ될 것 같다는 느낌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다른 이들은 최소 몇 개월에서 1년도 준비하는 길이라는 걸 후기를 통해 알고는 있었기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마감 시간은 다가오는데도 아무것도 안 하고  멍 때리는 시간이 길어진다. 출국이 일주일도 안 남은 그날도 아마 등산용품을 사려고 알아보다 예산이 부족해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카페에 멍을 때리고 앉아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 모든 준비물을 혼자 힘으로 구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서 지인들에게 빌리자!'(응?) 였고, 카페에 앉아서 ‘혹시 아무도 댓글 안 달아주면 어쩌지?’ 맘을 졸이며 페이스북에 아래의 글을 써서 올렸다.




<2015. 7. 7 @페이스북>


다음 주 월요일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납니다. 가진 돈은 별로 없습니다. 딱 비행기 타고 최소한으로 먹고 잘 만큼. 먼저 길을 걷고 있는 친구의 말로는 준비를 많이 해와야 한다는데, 준비할 시간도 돈도 부족해요. 원래 누구에게 '도와달라'고 말하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이번엔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혹시 집에 처박아 두고 쓰지 않는 35L 이상 배낭 / 판초우의 / 등산스틱 / 침낭 같은 아웃도어 용품 있으신 분들 저 좀 빌려주세요! (그냥 주셔도 좋아요!) 없으면 뭐 결국은 어떻게든 살아가겠지만 일단은 도움 주실 분이 있는지 여쭤보아요!


지금까지 너무 많은 생각을 했고, 너무 많은 걸 하려고 했고, 너무 많이 어른인 척하고 강한 척했는데, 이번엔 그러지 않으려고요. 산티아고 걷다가 힘들면 포기할 거고, 노력도 책임감도 다 내려놓고 다닐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하기' 그게 목표입니당. 지금이 그럴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때인 거 같아서요. 하여튼! 멋진 말, 설득 없이도 그냥 제게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이 계시다면 저 좀 도와주세요. 집에서 먼지 쌓여가는 아웃도어 용품들에게 산티아고 나들이를 시켜주고, 함께 더 잘 먹고 잘살다 오겠습니다!! :)  -끝-




삼십 대가 된 지금에 돌아보면 한숨이 나오고 쟤는 도대체 어쩌려고 저렇게 계획도 없이 패기만 넘쳤나 싶지만, 다행히 대학 시절 내내 열심히 사람을 만나고 다닌 덕에 돈은 없어도 늘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 (다시 한번 답 없는 어린양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어 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와 사랑을!)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고 나서 50명 정도의 지인분들이 댓글을 남겨 주셨다. 반나절 만에 리스트에 있던 물건과, 생각지도 못 했던 물건까지 구하고, 거기다 진심이 담긴 응원까지 마음 한가득 챙길 수 있었다. 오전엔 ‘산티아고에 갈 수 있을까’ 생각하며 눈물을 찔끔거리고 있었는데, 같은 날 오후엔 사람들의 응원에 신나고 벅차서 ‘꼭 여행을 잘하고 오고야 말겠다’ 다짐을 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여행은 이미 그날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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