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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니스홍 Mar 27. 2019

준비, 대비

미래를 대하는 방식

스펙이 높은데도 취업이 되지 않는다.
직장은 들어갔지만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
뭐라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에 퇴근 후 학원을 찾는다.
오래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했는데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할 줄 아는게 없으니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학교 안에서는 증명을 통해 보상을 받는다. 성적표, 졸업장, 수상이력은 자신이 유능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자료다. 취업할때 유리하다고 하니 이것저것 준비해둔다. 직장에서도 증명을 통해 보상을 받는다. 직급이나 연차에 따른 보상이다. 대리, 과장, 부장, 기타 직함이 기입된 명함이 나의 존재를 드러낸다. 직장 내 자리를 보전한다는 조건이 만족되는 한 나는 그만한 월급을 받는다. 뭔가를 더 잘했다는 조건이 충족되면 인센티브를 받는다. 나에게 보상을 주는 주체는 시스템이다. 보상을 위해 내가 어떤 조건을 충족할지가 투명하게 잘 알려져 있다. 그에 맞추어 나는 마치 미래를 아는 것처럼 계획하고 준비할 수 있다.


학교나 직장 밖에서는 교환을 통해 보상을 얻는다. A를 주면 B를 받는다. 음식을 팔아 돈을 버는 식이다. 고객은 까다롭고, 입맛에 맞지 않으면 무섭게 외면한다. 나에게 보상을 주는 주체는 사람이다. 사람마다 무엇을 원하는지는 전부 다르고 겉으로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 사람에게 팔지 못하면 사람으로부터 벌지도 못한다. 잘 만들어 팔겠다고 내놔도 안팔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리 좋은 것도 남에게 필요가 없다면 팔리지 않는다. 미래는 커녕 당장 내일의 고객 마음도 알 수 없다.


시스템 안에서는 그 기준을 충족하는가가 우선의 관심사다. 학교를 다니거나 직장에서 월급을 받으면 남의 필요에 무심해도 보상을 얻을 수 있다. 보상에 대한 기준이 있으므로 얻기 위한 준비가 의미있다. 반면 시스템 밖에서는 준비가 아니라 대비가 필요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은 기본적으로 고난이고, 또 불확실하다.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아는 사람은 없다. 날것의 삶에 있는 고난불확실함이 시스템이라는 필터를 통과하면 확실한 조건으로 정제된다. 시스템 안에서는 안전하고, 조건을 잘 충족하는 사람이 승자다. 반면 시스템 밖에서는 고난의 비를 막아줄 사람도 눈을 막아줄 사람도 없다. 아무도 나에게 뭔가를 먼저 제시하지 않는다. 시스템 밖에서 보상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남의 필요를 채우고 그만한 값어치를 돌려받는 것이다. 누구의 어떤 필요를 채워야 하는지는 정해진 기준이 전혀 없다. 비가 올지 눈이 올지 모르니 비가 와도 견디고 눈이 와도 견디는 사람이 되도록 나를 훈련시키는 대비가 필요하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내가 할 줄 아는게 없는데 남에게 무엇을 해주고 돈을 벌지가 여전히 막막하다. 


유학을 가려면 교수를 설득해야한다. 입사를 하려면 면접관이나 사장을 설득해야한다. 창업을 하려면 고객을 설득해야한다. 전부 나보다 사회적인 지위가 높거나 혹은 나에게 아쉬울 게 없는 사람들이다. 내가 그들의 어떤 필요를 채우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있을까 고민해보자. 


남의 필요를 채운다는 말은 아주 사소한 행위도 포함이다. 예를 들어 칭찬 한 마디가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교수든 사장이든 다르지 않다.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남이 인정받기 원하는 바로 그 부분을 콕 짚어 칭찬해준다면 내가 필요한 것을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얻어낼 수도 있다. 반짝이는 재능과 유능함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보다 남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고 더 웃고 더 친절하고 더 세심하고 더 감사하고 더 무릅쓰면 그것만으로 수많은 기회를 손에 쥘 수 있다. 내가 교환을 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건 내가 가진 능력이나 재산이 아니라 나의 태도에 더 유관한 문제다.


이 고민이 되지 않으면 나를 뽑을 사장이나 교수 앞에 가서 내가 얼마나 유능한지를 드러내보이는 실수를 저지른다. 학교에서 성적으로 나를 증명해 보상을 받은 그 방식을 그대로 면접에까지 가져가는 것이다. 나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내가 가진 성적이나 자격증에 전혀 관심이 없다. 성적을 팔아서 돈을 벌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평가하는 사람에게 유익한 뭔가를 내가 정확히 제시하든지, 그럴만한게 없다면 적어도 정확한 칭찬 한 마디로 감정의 필요를 채워 일이 되게 만들 수도 있는데 엉뚱하게도 비싼 졸업장을 가져와 자기과시를 하면서 들이민다. 사람에게 무심하면서 학교공부만 열심히 하면 이런 일이 생긴다. 


사람이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모든 면이 실은 가치의 교환이다. 칭찬 한 마디도 그만한 값어치를 갖는다. 돈 외에도 가치의 종류는 무한하므로, 돈 없이도 이것과 저것을 교환하고 또 다른 것으로 교환하면서 값어치를 불릴수도 있다. 조금만 섬세하다면 평소에 쉽게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수많은 교환을 볼 수 있다. 조카에게 주는 세벳돈 몇 푼은 어떨까. 일방적으로 돈을 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돈을 줬으면 그만큼 얻는게 있기 때문이다. 조카가 웃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든지, 능력있는 삼촌으로 보이고 싶었다든지 하는 나의 욕구를 실은 돈으로 교환하는 중이다. 돈을 아무 생각없이 쓰지 않고 세심하게 관찰한다면 또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일이 그냥 벌어지게 놓아두기보다 이렇게 저렇게 조절할 수도 있다. 작은 것을 조절할 수 있다면 큰 것도 조절할 수 있다.


가치를 돈의 액수로만 평가하면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같은 가격이라도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재화가 누군가에게는 필요없기 때문이다. 상식이지만 평소에는 잘 인식되지 않는다. 돈이 있기 이전의 수요와 공급은 언제나 변한다.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다. 아까 다르고 지금 다르다. 돈을 벌거나 쓰기 전에 그 이면에 있는 가치교환을 인식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지금 가진 돈의 양보다 없는 돈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해주는 세상에 대한 안목이 더 중요하다. 남에게 주는 것도 연습이고 남에게 받는 것도 연습이다. 교환되는 값어치가 큰가 작은가를 따지는 것보다, 내가 의도한 정확한 그 위치에 내가 의도한 그 교환을 일으킬 수 있는가를 물어보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야 하므로 아주 세심한 연습이 필요한 기술이다. 무심하면 배우지 못한다. 세심해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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