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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니스홍 Mar 25. 2019

연속성

분리된 감정이 의미하는 바

고등학교에서 하는 공부는 재미가 없다. 하긴 해야 하는데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학은 취업 잘 되는 학과를 가라고 해서 왔는데 역시 공부는 재미가 없다. 전혀 관심도 없고 끌리지도 않지만 졸업하고 취업할때까지만 버티기로 한다. 

좋은 조건으로 취업을 했는데 역시 일은 재미가 없다. 퇴근시간만 기다리며 하루를 보낸다. 집에 가면 드러누워 유투브 보는게 낙이다.

학생때도 사회인이 되어서도 역시 본업은 재미가 없다는 사실을 되풀이해 깨닫는 것 같다. 이제는 기대를 접고, 일 외의 취미로 악기를 하나 배우려고 몇 번 퉁겨봤는데 재미가 없다.

공부도 일도 취미도 하라면 하겠는데 막상 하면 재미가 없다. 재미가 없으니 오래도록 붙들기 어렵다. 오래도록 붙들지 못하니 시간이 지나도 실력이 늘지 않는다. 아직 나의 취향에 걸맞은 재미있는 활동을 못 찾은 것일까? 좀더 다양한 것을 시도하다 보면 나에게 맞는 그것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아기때 깊은 애착을 가졌던 인형을 떠올려보자. 고작 물건에 품었던 전혀 다른 감정이다. 어른이 된 이후 무엇이 와닿는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얼마나 있는가 되돌아보자. 


기계는 조립한다. 생물은 합성한다. 이 차이에 대해 알아보면 도움이 된다. 조립 (assembly)과 합성 (convolution)의 차이다. 하나의 음파가 여러 주파수 대역의 기본 파형으로 분리되고 또 합쳐지듯, 사람은 하나에서 이 속성과 저 속성을 빼거나 더하면서 사고한다. 예컨대 미술 스케치를 하면 전체 구도를 대강 그리고, 그 위에 덧대어서 약간의 자세한 구도를 잡고, 또 덧대어서 조금 더 세밀하게 그리는 식으로 전체 그림이 완성을 향하여 나아간다. 사람이 사고하는 방식은 합성이다. 프린터 기계가 그리는 그림은 이 과정을 겪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렬로 완성한다. 그림을 이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위 과정을 음악에 적용해보자. 전체 곡을 대강 그려보고, 그 위에 덧대어서 약간의 자세한 울림을 넣고, 또 덧대어서 조금 더 세밀하게 연주하는 식으로 전체 곡을 완성해 나간다면 어떨까. 어릴 때 피아노 학원에서는 음 하나하나를 정확히 치는데 주의를 기울였다. 프린터기가 그림에 대한 이해 없이 인쇄하듯, 그렇게 악기연주를 배웠다. 학원에서 하듯 1챕터를 익히고 2챕터를 익히는 식으로 배웠다. 그런데 수학이나 영어가 미술과 같다면 어떨까. 사람이 배우는 모든 방식이 이와 같다면 어떨까. 사람을 기계로 보는 관점 말고, 사람을 생물로 보는 관점으로 공부할 수는 없을까. 


아래 그림의 왼쪽은 사람이 그린 그림이다. 오른쪽은 기계가 그린 그림이다. 사람은 그림의 전체 구도를 유지하면서 덧대어 그리기를 반복한다. 이전의 경험이 연속되어 다음의 경험에 덧입혀진다. 기계가 그리는 그림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번에 인쇄를 완료한다. 이전의 경험과 다음의 경험이 연속적이지 않다.

비유 (metaphor)는 다른 상황을 덧대어 입는 사고방식이다.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의 구조를 현재 상황에 그대로 도입한다. 속담이나 고사성어가 그렇다. 비유는 효율적이고, 또 유용하다. "어떤 일이 실제로는 전혀 관련없는 다른 일과 우연히 함께 발생했기 때문에 마치 관련이 있는 것처럼 오해받는다." 라는 이야기를 "까마귀 날자 배떨어진다"는 속담으로 전달할 수 있다. 까마귀나 배가 중요하지 않다. 전달하려는 이야기의 구조가 유지되면서 덧입혀졌는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한 가지의 비유는 수천 수만가지의 서로 다른 경우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비용 효율적인 사고방식이다. 어떤 이야기의 뼈대를 유지하면서 어떤 속성을 걷어내고 또 다른 속성을 덧대어 그린다. 비유는 인간의 창의성을 이루는 근본적인 요령이기도 하다. 인간의 사고방식으로는 구성요소를 조립하는게 아니라 덧대어 합성하는게 자연스럽다.


직업이나 학과를 결정하는데도 마찬가지 비유를 들어볼 수 있다. 어떤 학과에 가서 그 전공 공부를 하는 것으로, 또 어떤 학원에 가서 그 공부를 하는 것으로, 우리는 어떤 기능이 몸에 장착되기를 바란다. 사람을 기계장치로 보는 사고방식이다. 반면 어느 원시림 부족의 한 마을에 사는 아이가 나중에 갖게 될 진로를 선택하지 못해 괴로워할까? 혹은 몽고 유목민족의 한 아이가 나중에 갖게 될 진로에 대한 불확실함으로 고민할까? 원시 인류의 모습에서는 어릴 때 고사리손으로 어른의 일을 돕던 그것이 나이가 들어도 계속된다. 어릴 때도 전통문양 뜨개질을 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노인이 되어서도 같은 일을 한다. 일하는 수준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 근본은 같은 성질의 일이다. 어릴 때 토끼를 잡던 사냥이 나이가 들어서 멧돼지 사냥으로 발전한다. 토끼에서 얻은 경험이 덧대어져 멧돼지의 경우가 된다.


학교에서는 어떻게 하나. 어릴 때 하던 그것이 어른이 되어서 연속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대학에 가서 전공공부를 시작해야만 그때부터 무엇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어릴 적에는 사람의 내장기관이나 질환에 대해 무관심했으면서 어느날 하늘에서 떨어지듯 의대 입학식날부터 의학 지식을 장착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정말로 의사가 되고 싶었다면 어릴 때 엄마가 시장에서 사 온 오징어 배라도 갈라서 내장기관을 보는 호기심이 뒷받침되어야 하지 않을까. 오징어 배를 가르는 것과 사람 배를 가르는 것은 천지차이로 다르긴 하지만, 생물의 내장기관이라는 점에서 연속된 일이다. 근본이 같은 성질의 일이다. 어릴 적부터 하던 일이 세월을 따라 연속되고, 덧대어지면서 보다 발전한다. 그때가서 와닿는가 아닌가를 문제삼을 필요가 없다. 어릴 적부터 자기 일이었기 때문이다. 몸에 부담스럽지 않고, 숨쉬듯 자연스럽다.


삶과 직업이 연속되지 못하는 이유, 무얼 손대도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유가 이미 있는 무언가를 놔두고 전혀 다른 것을 가져다 붙이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라면 어떨까. 연속성이 없고 그래서 와닿지 않는 것이라면. 가져다 붙이는 족족 남의 이야기일 뿐, 금세 흥미를 잃고 그만두게 되는게 아닐까. 반면 이미 나에게 있는 무언가에서 시작해 어떤 속성을 더하거나 빼어서 변형시켜보자. 근본은 유지하면서 약간의 차이가 발전으로 이어진다. 수준차이가 있을 뿐 이미 오래전부터 나의 것이므로 나에게 와닿는다. 와닿으므로 거부감이 없다. 거부감이 없으니 오래도록 붙들고 있을 수 있다. 그러면 더욱 실력이 향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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