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함을 향한 공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일부러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손에 잡히는 건 없고 때때로 공허하다. 더 악착같이 움켜쥐어보지만 자꾸만 뭔가가 비는 느낌이다.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덕에 한 사람이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거리가 크게 넓어진 반면, 백년 전에 살던 사람의 유전자나 요즘 사람의 유전자는 크게 다르지 않다. 기술이 발전하기 이전, 대부분 한 사람의 일생은 고작 자기 살던 마을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답답한 인생이다. 옛날 사람들은 좁은 땅에서 일평생을 사는데 불만이 없었을까.
공허하다는 단어는 땅을 경작하는 농부와 어울리지 않는다. 원하는 어떤 정보든 곧바로 검색할 수 있는 풍요로운 시대에 사는 사람이 더 공허함을 느낀다. 왜 나는 유독 비어있는 느낌에 괴로워할까.
1부터 10 까지의 숫자중 정수는 10개 뿐이지만 실수는 무한히 많다. 좁은 영역을 확대해보면 새로운 숫자가 있다. 그 영역을 또 확대해보면 또 새로운 숫자가 드러난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100이나 1000을 향하여 빠르게, 많이 늘리려는 마음으로 달리는 중이 아닐까. 수직선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무한한 숫자들에게는 정작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외면하는게 아닐까. 공허한 기분이란, 그것이 실제로 비었기 때문에 우리 몸이 자신에게 들려주는 경고음이 아닐까.
해상도는 화면의 일정한 면적에 얼마만큼 많은 점이 들어있는지를 재는 단위다. 같은 크기의 사진이라도 해상도에 따라 화질이 다르다. 예컨대 같은 크기의 사진이라도 그 안에 들어있는 화소의 갯수에 따라 사진의 품질이 좌우된다. 왼쪽 사진은 8x8=64개의 점으로 그림을 표현했고, 오른쪽은 32x32=1024개의 점으로 같은 그림을 표현했다. 오른쪽 사진이 왼쪽 그림보다 사진의 품질(=화질)이 높다. 왼쪽에서는 주어진 화소가 사진의 크기를 다 감당하지 못한다. 각각의 화소를 억지로 잡아늘여 크기를 맞춘다. 겉으로는 꽉 채운 것처럼 보이지만 꽉 찬 느낌을 주는 사진이 아니다. 볼품없고 빈 느낌이다. 종종 느끼는 공허함이 이런 이유에서 오는 거라면 어떨까.
사진의 가치를 좌우하는것은 사진의 크기가 아니라 해상도다.
예술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그 분야를 떠나서 일반인보다 매우 섬세하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자기 작품의 영역에서는 아주 작은 변화 하나 놓치지 않고 감지한다. 많이 배우기보다 깊은 섬세함을 향해 정진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면 풍성하게 채워지지 않을까. 적게 소유하라는 말을 욕심을 버리라는 도덕책의 규칙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세상을 보는 해상도를 높이라는 주문으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우리는 빠르게 많이 공부하기를 원하면서 깊이 공부하기는 잘 원하지 않는다. 깊이 공부하면 겉으로 진도가 안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 (Quality)을 추구하면 양 (Quantity)이 생기기도 하는 반면, 양을 추구한다고 질이 생기지는 않는다.
나는 어느 방향의 공부를 하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