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워니스홍 Mar 19. 2019

편집자

소비하고 창조하는 정도의 차이

인생이 자꾸만 궁지에 몰리는 기분이다. 취업도 안되고 아무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돈은 떨어져가는데 부모님에게 손 벌리는 것도 답답하다.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롭고 우울하다.

우리는 소비에 익숙하다. 어려서는 부모님의 인생을 소비하면서 자랐고, 자라서는 광고물이 제시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소비하면서 살아간다. 학교에서는 교육 서비스를 소비하고, 직장에서는 상사의 지시를 소비하고, 퇴근 후에는 남의 회사가 만든 제품을 소비한다. 일자리를 소비하기 위해서 취업준비를 하는데 취업준비 학원이 주는 서비스를 소비한다. 소비로 소비를 돌려막는 소비 인생이다. 


아래 그림을 보자. 세로축은 소비자 (Consumer)다. 가로축은 창조자 (Creator)다. 사람이 극단적으로 소비만 하던지 창조만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소비자와 창조자 사이의 적당한 곳에 자리한다. 모든 창조는 지구상에 있던 기존의 무언가를 편집해서 제시하고, 외계의 물질을 가져다 판매를 하지는 않는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창조는 곧 편집이다. 우리는 모두 편집자 (Editor)다. 편집을 덜 하면 세로축으로 가까울 것이고, 편집을 많이 하면 가로축으로 가깝다. 편집하는 정도의 차이다.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 고객에게 판매하는 사람은 다음 네 가지 사항을 주의깊게 살핀다

- Originality (독창성): 얼마나 새로운가

- Presentation (제안): 어떻게 제시하는가

- Reference (기존 것과의 연결): 기존 것과 어떻게, 또 얼마나 관련되는가

- Significance (중요도): 받은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을 얼마나 바꿔놓는가


Originality가 있으면 경쟁 우위를 가질 수 있다. 독창성은 남과 다르기 위해 애써서 나오기보다 자기만의 무언가를 충실히 꺼내므로 나온다. 같은 제품/서비스라도 Present를 어떻게 하느냐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거부당하기도 한다. 제안하는 제품이 기존의 것과 얼마나 유관하게 제시되는가에 따라 납득이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다. 익숙함과 너무 동떨어진 것을 제시받으면 불편함을 일으킨다. 받기 전과 비교해 받은 후에 얼마나 달라지는가, 이전과 이후가 많이 바뀔수록 중요하다.


만드는 사람은 소수고, 소비하는 사람은 다수다. 만들기는 어렵고 소비하기는 쉽기 때문이다. 만드는 사람은 주의깊게 고려할 점이 많다. 소비하는 사람은 아무 것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만드는 사람이 다 해준다. 소비가 극단으로 치우치다 보면 특히 인생의 어느 방향 (significance)을 통제할 권한까지도 남에게 순순히 내어준다. 위에 적었던 질문을 다시 읽어보자.

인생이 자꾸만 궁지에 몰리는 기분이다. 취업도 안되고 아무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돈은 떨어져가는데 부모님에게 손 벌리는 것도 답답하다.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롭고 우울하다.

왜 궁지에 몰리는가. 받기만 해서 그렇다. 제품을 제공받고, 서비스를 제공받았다. 무한히 받을 수는 없다. 그 눈구도 일방적으로 제공만 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공급이 끊기고, 그러면 궁지에 몰린다.

왜 취업이 안 되는가. 받기만 해서 그렇다. 구직자는 양질의 일자리가 없다는 한숨을 쉬지만 기업은 뽑을 사람이 없다는 한숨을 쉰다. 기업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직원으로부터 뭔가를 제공받아야 하는데, 기업에게 가치를 제공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가치를 주는 법은 모르겠고 일자리라는 권리를 받고 싶은 사람은 많다. 

왜 인정받지 못하나. 받기만 해서 그렇다. 내가 남에게 가치를 준다면 왜 그것을 인정하지 않겠나.

왜 돈이 떨어지나. 받기만 해서 그렇다. 내가 남에게 가치를 준다면 왜 돈을 받지 못하나.

왜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 받기만 해서 그렇다. 내가 남에게 가치를 준다면 남이 나를 왜 필요로 하지 않겠나.

문제가 무엇인가. 받기만 해서 그렇다. 어릴 적을 포함해 인생의 너무 오랜 기간을 온갖 제품과 서비스를 받느라 소비자로만 살아봤다. 남에게 무엇을 제공해 보았나. 


주는 법을 안다고 현실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모든 문제의 답으로써 받기만 해서 그렇다 라고 쉽게 단정지을 수도 없는 문제다. 취업난을 해소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도 필요하고 사회 문화적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현실적인 어려움도 많다. 그러나 개인이 국가 단위의 정책을 좌지우지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당장에 살아야 하는 개인 단위를 보자. 주는 행위는 받는 것과 질적으로 매우 다른 난이도를 갖는다. 소비는 받으면 그만이지만 주기는 매우 어렵다. 학교에서는 학교의 커리큘럼을 잘 소비하도록 가르친다. 남에게 잘 주는 법은 가르치지 않는다. 잘 살고 싶어서 진학한 학교로부터 교육 서비스를 받느라 훈련받은 소비자의 관점이 개인의 삶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교육이 서비스화 되면 이런 일이 생긴다.

옛날 아이들 다시 말해 노동주체로 출발한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하는 ‘공부’와 집에서 하는 ‘노동’은(둘 다 영어로는 work가 되지만) 동일한 것이었다. 열심히 'work'하면 가족과 지역사람들로부터 ‘유용한 사회적 존재로 승인’받는다는 직접 보상을 약속받았다. 그러므로 “work를 하면 뭐가 좋아요?”라는 질문 따위가 나오지 않았다.(중략) 이에 반해 소비주체로 출발한 아이들은 자기 앞에 놓인 사물을 항상 ‘상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흥정’하려고 한다. 최소의 화폐로 최대의 상품을 손에 넣으려고 한다.
                                                                                                                                               - 하류지향

사람을 뽑기 위해 온라인으로 지원서를 모집하고 면접을 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거기 자리 있냐는 식의 질문부터, 학력이 어떻고 공모전이 어떻고 하는 스펙을 늘어놓는다. 그럴 때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이 두드러진다.


1. 회사로부터 받게 될 것에 관심이 많다. 

2. 자기가 유능하다는 것을 보인다.


사람을 채용하면 월급을 주겠지만 월급을 주자고 채용을 하는 건 아니다. 자기를 뽑았을 때 회사가 무엇을 얻게 될 것인지를 제시하는 지원자는 가뭄에 콩 나듯 한다. 회사의 입장은 모르겠고 지원하는 자신의 입장만 본다. 자기가 유능하다는 것을 보이는 (학력/수상경력/어학점수 등) 지원자는 왜 자기가 떨어져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A+받은 성적표가 회사 제품하고 어떤 관련이 있는가. 빛나는 상장이 포장되어 회사 제품으로 팔릴 수 있나? 높은 어학점수로 해외 마케팅을 잘 할 수 있나? 전혀 다른 성질의 일이다. 자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상을 얻어내는 학교 안 사고방식이다. 학교 안에서 자기를 증명해 보상을 받던 습관을 회사에 들고 온다. 학교 안에서는 유의미하지만 학교 밖에서는 사회가 전혀 다르게 동작한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한다. 

작가의 이전글 규칙에 충실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