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법 (law)은 규칙의 체계 (a system of rules)다. 규칙이란 무엇인가. [만약 ~라면 ~~이다]라는 조건 (condition: 만약 ~라면)과 그 결론 (conclusion: ~~이다)이다. 조건과 결론은 곧 약속이다. 법은 약속 모음집이다. 법의 정의를 살펴보자.
Law is a system of rules that are created and enforced through social or governmental institutions to regulate behavior.
학교는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학칙이 있고 교칙이 있다. 공부한 정도에 따라서 A+나 B+를 받는다는 규칙이다. 나아가 어떤 조건을 충족하면 장학금, 어떤 조건을 충족하면 졸업이라는 식이다. 사람을 교육하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규칙이다. 학생이 많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시스템으로 길러지는 학생은 시스템이 제시하는 규칙을 준수하는 한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관점을 내면화한다. 시스템에 잘 적응하는 학생일수록 더욱 그렇다. 시스템 밖의 세상은 알지 못하더라도 시스템 안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시스템을 잘 활용해 시스템의 승자가 될지를 아주 잘 안다. 좁은 우물 안에서도 승자가 있고 패자도 있다.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받은 학생이 결국 학교 밖에서 악을 끼치는 경우가 왜 그런가 생각해보자.
사람마다 각자 다른 자신만의 인격이 있고 살아가는 원칙이 있다. 서로 다른 개개의 인격을 편의상 규격화해놓은 문서가 법이다. 법은 모두에게 적용되지만 모두에게 정확히 적용될 수는 없다. 사람이 열심히 만든 규칙 모음집이기 때문이다. 훌륭하지만 완전할 수 없고 항상 어느 정도의 빈틈을 갖는다. 사람이 만든 어느 체계에도 헛점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학교의 학칙이건 사회의 법이건 규모는 다를지언정 헛점은 꼭 있다.
시스템으로 길러져 시스템 안에서의 승자가 곧 인생의 승자라는 관점을 갖는 학생은 사회의 시스템에도 잘 적응한다. 이 학생들은 규칙 외의 세상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규칙이 있는 이유도 알지 못한다. 맹목적이다. 그러나 규칙만큼은 잘 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법이나 규칙을 준수한다는 말을 당당하게 한다면, 그것은 법 없는 곳에서는 내맘대로 하겠다는 뜻이다. 행동의 기준이 법인데 법이 없다면 기준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행동하는 원칙이 시스템의 규칙에 고착되면 이런 일이 생긴다. 따라서 법을 준수한다는 말은 칭찬일 수 없다.
아래 그림처럼 모든 사람은 제각기 고유한 원칙에 따라 살아간다. 청소년에게는 청소년법이 적용되고 성인에게는 좀더 복잡한 여러 법이 적용된다. 사람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데, 인생의 어느 때든 법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시점이 온다. 법이 완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사람의 원래 인격이 겉으로 드러난다. 법이 있든 없든 선함을 유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법의 테두리 밖에서 바로 이빨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인격을 규칙에 맞추어 길러냈으므로, 규칙이 없을 때 어떻게 하라는 것을 배운 바 없다. 스스로도 혼란에 빠져 남을 물어뜯는다. 못 배운 것이다. 규칙은 잘 배웠지만 정작 배워야 할 것을 못 배웠다는 말이다. 사람을 시스템으로 길렀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제시하지 못하는 점은 배우지 못하고 자란다. 아이들을 교육시키는데 규칙을 지키라는 말을 강조하는건 위험하다. 법 없는 곳에서 어떻게 할 지는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시스템에 기준을 두고 자란 인간은 시스템 밖에서는 포악한 본성을 드러낸다. 못 배웠기 때문이다.
예컨대 응급 현장에서 규정과 원칙을 준수하다 정작 사람 목숨을 희생시키는데 태연한 사람이 그렇다. 법을 지켰으므로 잘못한게 없다는 것이다. 법 이전에 그 모태가 되는 인격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법이 적용되는 시점은 악행이 걸렸을 때부터 라는게 조건이므로, 걸리지만 않으면 무엇이든 된다는 식의 발상도 그렇다. 사회적으로는 배웠지만 인격적으로는 못 배웠다. 인격을 배웠다면 법을 넘어서도 배운 사람이다. 법은 사람의 인격을 편의상 명문화해놓은 문서다. 그러므로 법 이전에 인격이 있다. 공부는 곧 인성공부다. 수학을 공부하든 영어를 공부하든 그것의 입장을 내 입장처럼 받아들여야 기술적으로도 탁월할 수 있다. 입장의 동일함에 대해서는 이전 글을 참고해보자.
선한 자본주의라는 좋은말이 있다. 기업가는 한정된 파이를 가져가는게 아니라 파이 전체의 크기를 키운다고 하는 식이다. 그러나 정말로 전체의 크기가 커지는 걸까? 지구를 닫힌 계로 보면 엔트로피 총량은 일정할텐데, 그러면 한쪽이 얻는 대가로 한쪽은 잃는게 맞지 않나. 아니면 자본주의라는건 태양으로부터 추가로 얻는 에너지만 활용해 부가가치를 만들고 있다는 말일까? 그런 정밀한 자본주의가 구현되는 중이라고 믿을 사람이 있을까? 사람은 사실은 얻는 대가로 잃는 것들을 바닷속에 가라앉혀서 덮어나가고 있는게 아닐까? 아이패드 한 대를 구입하는 대가로 바닷속에 폐기물이 10g씩 쌓이는 식인데 단지 과정이 눈에 보이지 않는 복잡계일 뿐이라면, 눈에 보이는 파이의 크기를 키운다는 좋은 말이 다 무슨 의미가 있나.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윤을 최대화하면 된다는 발상은 그로부터 발생하는 결과에 무지해도 된다는 면죄부로 기능한다.
회사는 월급을 주고 직원의 기술과 시간을 정당하게 구입한다는 좋은 말도 있다. 회사에 기여하지 못하는 직원은 자른다. 월급의 값어치를 회사에 돌려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대로 했으니 문제 없다. 그런데 사람은 복합적인 생물이다. 회사가 구입한 프로그래밍이나 디자인 기술 외에도 천가지 면을 한꺼번에 가지고 있는게 인간이다. 거기서 한가지 면을 구입하고 그것으로 직원을 평가한다면 사실은 그 외의 999가지 면에 대해서는 무심하다는 뜻이다.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회사에서 자신의 999가지 면에 대해 없는 취급을 당하고 1가지 면으로만 인정을 받는다면 그 인격이 제정신으로 견딜 수 있을까? 회사는 직원이 가진 하나의 기술이 아니라 그 직원 한 사람을 구입하는게 아닐까. 직원도 마찬가지다. 회사로부터 월급만 바라보면서 살면 회사의 나머지 면에 무심하게 된다. 회사는 월급주는 자판기가 아니다. 다양한 면을 한꺼번에 갖고 있어서 우리는 법인 이라고 인격체처럼 부르지 않나. 효율을 위해서 구분짓는 정도가 도를 넘으면 오히려 이렇게 억압과 비효율이 생긴다. 못 배운 사람일수록 규칙 외의 것에 무심하다. 배운 바 없기 때문이다.
법을 성실히 준수한다는 좋은말을 돌아보자. 인간이 만든 법은 세상의 모든 질서를 담지 못한다. 아무리 잘 짜여진 법도 분명히 판가름할 수 없는 회색의 지대가 많이 있다. 회사의 사장이 기준을 법에 두고서 법을 준수한다고 자랑한다면, 사실은 법이 없는 많은 영역에서는 무법지대의 자유를 누리겠다는 말과 같다. 세상에는 회색의 무법지대가 많기 때문에, 타인을 해칠 영역이 얼마든지 허용되어 있는 셈이다. 법을 잘 알수록 더욱 법을 준수하면서 빠져나갈 수 있다. 그 영역에서는 착취도 폭압도 허용된다. 법이 일일이 가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규칙은 좋은 말로 이루어진 조건 모음집이다. 규칙에 충실한다는 건 그 규칙이 전제하는 바 외의 세상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못 배웠다는 말이다. 무지하고, 따라서 사회화되지 않은 인간의 본성 그대로 포악하다. 규칙 안에서 훌륭한 사람이 규칙 밖에서는 악마인 경우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았다. 배운 사람이라면 포악할 수 없다. 남과 입장을 동일하게 놓는 연습이 배움이기 때문이다. 남과 나의 입장이 같은데 어떻게 포악해질 수 있나. 겉으로는 많이 배운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못배운 사람을 우리는 사회에서 너무나 많이 본다.
규칙은 필요하다. 완벽하지 않으니 다 버리라는게 아니라, 그 규칙을 필요로 하게 된 원래 세상의 모습을 떠올리자는 말이다. 법 이전에 사람이 있고 사람에게는 인격이 있다. 행동의 기준을 시스템이 제시하는 규칙에 두지 않는 인간은 그 기준을 자기 자신에 둔다. 자기반성 (self-reflection)하는 인간이다.